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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을까?

프랑스현대철학_에밀브레이너_낭만주의학파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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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반추한다. 인간은 한가지의 방향으로 정의할 수 없고, 정의한다고 해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항상 변화하는 지점에 인간은 몸을 통해서 생각의 흐름을 만들고 행동의 궤적을 그린다. 역사 속에서 철학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쪽을 택했다. 관념이 중심이었던 철학자들이나 육체가 중심이었던 철학자들 혹은 둘다 아니라 자연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알아볼 '낭만주의학파'는 오히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철학의 아이디어를 '낭만주의' 혹은 '로마전통'에서 가져오게 된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동물이거나 신이지만 인간의 심성과 욕정을 가졌거나 하는 식의 그리스로마신화의 신 개념은 그 자체로 '혼합주의' 혹은 '절충주의' 혹은 '통합주의'이다. 17세기 초기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이성과 반이성의 통합, 영혼과 육체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펼쳐 나간다. 지난시간 스코틀랜드의 상식학파에 이어서 오늘은 독일의 낭만주의학파를 알아보려고 한다. 에밀브레이너의 관점으로 말이다.


주요내용

피히테의 낭만주의 철학전통의 시작과 기존의 학문체계인 칸트철학 비판

셸링의 자연철학과 객관적 주관주의

노발리스의 철학과 사상

슐레겔의 주장과 낭만주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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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히테의 칸트비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낭만주의자로 유명하다. 낭만주의는 정신과 현실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방법론을 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쪽에만 치우친 학자들을 비판한다. 피히테가 공격하는 대상은 칸트이다. 피히테는 칸트주의는 전제로 변증법을 감추고 있는 비판론이라고 주장한다. 피히테와 칸트의 관계는 독일 관념론의 역사에서 단순한 사제 관계를 넘어선 복잡하고도 중요한 연결 고리를 형성한다.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존경했지만,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한다. 이를 지식발생학(Wissenschaftslehre)이라고 부른다. 피히테가 지은 '모든 지식학의 기초(1794)'라던지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자연법의 기초(1796)'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럼 어떻게 칸트에 접근했고 칸트를 극복하려고 했는지를 알아보자.


피히테는 칸트의 제자로서 칸트 철학의 핵심 사상을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와 도덕적 자유의 중요성을 깊이 통찰했다. 특히, 피히테는 칸트가 도덕 법칙과 인간의 자유를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확고히 정립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사실과 가치가 분리되지 않고 실천과 순수한 이성이 분할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유가 시작될 수 없었다. 그러나 칸트가 실천이성과 순수이성을 나누고 각각 기능을 다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접근이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순수이성은 '정'이고 실천이성은 '반'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이 된다.


나누어지지 않는 것들을 통합하는 자아라는 개념


학부시절에 '형법총론'을 들었는데 교과서가 너무 두꺼워서 기말고사를 준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칸트에 대해서만 공부했는데 교수님이 시험문제를 들어오셔서 한 문장을 쓰고 가셨다. 그것은 다름아닌 '칸트가 보는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 쓰시오'였다. 나는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도덕적 자아와 목적의 왕국이 생각나서 무의식적으로 썼던 것 같다. 그결과 A+을 맞을 수 있었다. 형법의 관점에서는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초월과 절대적인 자아의 개념에서 '법'은 자신을 보조하는 도구이면서 정신이 분할된 도구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에 대한 이해가 더 쉬워진다. 칸트가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을 인간의 자율성에 두었듯이, 피히테 또한 인간 자아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활동을 모든 철학적 사유의 근원으로 삼았다. 이는 후에 피히테가 주장하는 '절대적 자아' 개념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피히테는 칸트의 '목적들의 왕국(Reich der Zwecke)' 개념을 사회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 칸트가 모든 개인이 서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제시했다면, 피히테는 이를 '상호 승인'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그는 개인이 타인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자신과 같은 자유로운 주체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가 형성되고, 이 과정을 통해 도덕적인 공동체가 탄생한다고 보았다. 김만권 교수님도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다른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현대자유주의자들이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의는 어떻게 보면 피히테가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내가 성장하는 때는 다른 사람도 나처럼 아파하고 어려워하고, 즐거워하고 신나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이다. 마치 방 안에 나 혼자 있다고 생활할 때랑 여러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생활할 때랑 제스처나 말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학문이론의 세 가지 원리들 Les trois principes de la théorie de la science

사물들의 실재성은 그것이 오성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가? “나는 자연 속에서 작동(agir)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며, ...” 이 신념들이 우리의 도덕적 삶을 가능하게 하자마자, 충분히 정당화 된다.

첫째로 만일 전자아(le Moi)는 그 자체로서(pour soi, 대자) 현존한다. 지식발생학(une gnosogonie)이라고 선언한다.

둘째 원리, 즉 온비자아(le Non-Moi)가 도입 : 첫째 원리[온자아]의 구축, 둘째 원리가 “형식에 관하여” 독립적이라고 선언

셋째 원리, 분할 가능한 비자아를 분할 가능한 자아에다가 대립시킨다.” 대립이 반대가 아니라 할 때, 대립들은 여럿이며 이들의 토의, 평의, 평결이 필요 / 독일, 대립자들의 통일을 변증법으로; 프랑스, 대립자들의 평결로서 인민의지의 실현 / 이것은 순수 논리적 관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변증법을 사용한다.


칸트 철학에 대한 피히테의 비판과 극복 시도

피히테는 칸트 철학의 핵심이자 가장 큰 난점인 '물자체(Ding an sich)'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 세계의 원인으로, 우리의 인식 범주를 넘어선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피히테는 '물자체'가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X'로 남아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이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필요하며, 철학 체계의 불완전성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피히테는 "모든 것은 주체인 자아의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외부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물자체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

피히테는 칸트 철학에 내재된 이원론(dualism)을 극복하고자 했다. 칸트는 대상을 인식하는 순수이성(이론이성)과 도덕적 행위를 규정하는 실천이성을 분리했다. 피히테는 이러한 이원론적 분리가 철학적 탐구를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는 인식과 행위의 근원이자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를 찾으려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모든 것을 '정립(Thesis)', '반정립(Antithesis)', 그리고 '종합(Synthesis)'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설명하는 '절대적 자아' 개념이다. 이 자아는 단순한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립하고 대립하는 비-자아를 극복하며 활동하는 근본 원리이다.


피히테는 칸트가 제시한 철학적 틀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칸트 철학이 남긴 빈틈들을 메우고,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원을 단일한 원리에서 찾고자 했다. 피히테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계승을 넘어선 혁신이었으며, 이후 셸링과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기존의 칸트의 접근은 변증법으로 규정하고 변증법의 방식으로 칸트를 재해석하여 현실과 정신을 연결하려는 낭만주의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의 발견은 이후 우리가 알아볼 셸링, 헤겔, 노바디스가 모두 공유하는 생각의 방식이었다. 헤겔이 변증법을 발견했다고 하기에는 다른 낭만주의자들이 땅을 치면서 웃을 것이다.


지식학의 변형들 Les transformations de la theorie de la science

모호성 두 가지 : 자아와 비아의 대립의 드라마, 자아에 의한 비아의 규정은 매우 혼동된 개념이며 확실히 피히테의 내밀한 감정 안에는 모호성이 없다.

인간적 삶의 목적은 투쟁이며, 진보는 내적 교육에 의한 자기지배(ἐγκρατεία)고 주장했고 이는 중세시대의 도미니크파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에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도덕적 금욕주의이며 완전하고 명석하게 정합적인 퀴니코스학파의 도덕과도 연결된다.

셸링의 반론들 : 지식(un Savoir)은, 즉자로서(en soi) 그리고 자기에 앞서서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마치 플로티누스에서 일자가 지성(Intelligence, Ame)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피히테는 유출설은 아니다. 피히테는 절대자로부터는 아무것도 연역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근본적 자유는 아직 도덕적 자유가 아니다. 물질적 세계에서 자아만이 자기의 자유를 느끼고 맛본다. 한편 즉자적인 닫힌 절대자는 무기력한 존재이며, 무엇보다 행동이라는 원리의 관념에 응답하지 못한다.

다른 한편 절대자와 자유의 이원론은 체계의 통일성과 양립할 수 없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자유가 중요하다. 이 자유는, 자유가 출현하는 기원과 무한히 위치를 늘여가는 목적 사이에서 중간일 뿐이다.

피히테는 전 생애를 통하여 세 가지 점에서 저항했다. 신의 무매개적 직관을 가지고서 신비주의에 대해, 자연에 내재하는 자기의 신을 가지고 자연주의에 대해, 소위 국가를 종교에 예속시키려는 카톨릭주의에 대해 저항했다.

피히테가 보기에 크리스트교는 역사에 하나의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데, 하나는 본능의 시대로서, 도덕의식이 아직 잠자는 시대이며, 다른 하나는 타락과 원죄의 시대로서, 절대왕정의 외적 권위로 유지되는 시대, 또 다른 하나는 속죄와 내밀한 변형의 시대, 인간이 신의 도구가 되는 시대의 의미이다.



2. 셸링과 낭만주의 철학


피히테에 이어서 이제 셸링에 대해서 알아보자.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은 독일 관념론의 중요한 철학자이자 초기 독일 낭만주의 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이다.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예술적 감성과 자연에 대한 신비로운 직관을 철학적 사유로 끌어들여, 낭만주의를 단순한 문예 사조가 아닌 하나의 체계적인 철학으로 발전시켰다는 의미에서 체계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셸링에게 낭만주의는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생기와 범신론'을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연결점을 만드는 셸링의 철학은 낭만주의의 핵심적인 사상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정립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로 이어진 이성 중심의 관념론에 반발했던 낭만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래서 동일성의 철학과 자연철학의 연구를 시작한다.


셸링의 주요 이론

자연과 정신의 통일성: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객관적인 물질로만 보지 않고, 인간의 정신과 연결된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해했다. 셸링은 이를 '동일철학(Identitätsphilosophie)'으로 체계화했다. 절대자가 주관인 정신과 객관인 자연으로 분화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둘이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셸링에게 자연은 '보이는 정신'이고, 정신은 '보이지 않는 자연'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를, 피히테가 자아와 비-자아를 분리했던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낭만주의적 열망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

동일성 철학 :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인 절대자가 있다. 절대자는 주체도 대상도 아니고, 정신도 자연도 아니다. 권능들의 각 삼원성은 주체-객체(le sujet-objet) 속에서 세 가지를 실재적 국면에서는 지식이고, 이상적 국면에서 행동이고, 두 개의 동일성에서는 예술. 취향과 예술.예술은 유한 속에서 무한의 표현이다. 신화는 예술의 기초이다. 사실상 크리스트교는 신화에 적대적이다. 이교도 신화, 크리스트교, 새로운 신화는 예술사의 세 가지 찰나들, 즉 그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

예술과 직관의 역할: 낭만주의자들은 합리적 이성보다 예술적 감성, 상상력, 그리고 직관을 진리 탐구의 핵심으로 여겼다. 셸링은 이러한 주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며, 예술이야말로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인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매개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적 창조 행위가 의식적 활동과 무의식적 영감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예술가는 무한한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셸링의 예술 우위론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철학의 영역에서 예술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자연은 보이는 정신이고 정신은 보이지 않는 자연이다


셸링의 자연철학과 낭만주의적 세계관

셸링의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은 낭만주의의 세계관을 가장 명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그의 독창적인 사상이다. 이 자연철학은 고전적이고 기계론적인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생명력이 넘치는 유기체로 이해했다.

자연의 역동성과 생명력: 셸링은 자연을 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그는 자연을 '스스로를 의식하려는 정신'으로 해석하며, 무기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의 단계들이 절대적 통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낭만주의자들이 자연을 살아있는 존재로 신비화하고 숭배했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자연철학은 과학적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원리를 찾아내려 했다.

무의식과 창조적 영감: 셸링은 인간의 의식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잠재된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창조 충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무의식적인 힘이 예술적 창조의 진정한 원천이며, 이를 통해 예술가는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자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낭만주의자들이 찬양했던 '천재적 예술가'의 창조적 영감에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셸링에게 예술 창조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창조력을 재현하는 행위였다.

영성주의(spiritisme): 자연과 인간은 신적 드라마의 잡다한 국면들이라 한다.

뵈메(Böhme, 1575-1624)와 신비주의 신학자인 바아더(Baader 1765-1841)의 영향

선(先)낭만주의 시대부터 특히 상-마르땅(Saint-Martin, 1743-1803)의 영향으로 그 자연철학자가 매우 늦게서야 신지학자가 되었다

온자연(la Nature)은 다시 젊어지려는 무한한 권능 덕분에 독립적이고 자치적이다. “빛들세기”에서 자연의 자율성과 자발성에까지 이르지 못함. 유일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함. 자연 철학은 자연을 하나의 전체로서 간주한다. 화학과 생물학에서 빌려온 이미지들로 채웠다.

세계영혼에 대하여(1798) : 산소의 효능에서 전자기의 이중화로 스토아사상과 연관 가능성 높음.

독일의 물리학자 리터(Ritter, 1776-1810)의 영향 하에서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하나의 동물이며 피히테의 지식학(1801)에서 변증법적 방법과 그 도식을 참조.

(피)온자아 대신에 자연을 대체한다면, (셸) 자연철학은 바로 무한한 활동성이다.

지식학과 동일한 수준의 추상작업을 유지하는 것이며, 자연철학을 구축. 셸링은 자연의 직관을, 칸트보다 앞선 독단론으로 되돌아간다.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의 저작들

자연철학을 향한 이념들(1797)

세계영혼에 대하여(1798)

체계의 초안(1799)

나의 체계 서설(1801)

브루노(1803)

철학과 종교(1804)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와 그에 얽매인 대상들(1809)

예술철학(1803)

세계 시대들(1811)

신화의 철학(1842)

계시의 철학(1854)


셸링에게서 만년의 철학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1809)는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셸링은 더 이상 연역하지 않고, 이야기 한다.

에크하르트(Eckhardt, 1260-1327)와 뵈메(1575-1624)에게 영향을 입음

우주발생론적 생성(le devenir cosmogonique)이다.

유신론(un théisme)의 삼항: 창조적 신, 자유로운 인간, 인간과 신의 최종통합, [영성주의(spiritisme)]

자연의 생성뿐만 아니라 신 자체의 생성, - 모든 생성은 승리이다.

최초의 권능인 원초적 배아, 둘째 권능인 있는 존재, 셋째 권능인 위계적 통합상위구축으로 세계를 연역한다.

첫째는 자연의 재료, 둘째는 정신의 재료, 셋째는 세계영혼의 재료.

신의 생성은 완성되었고, 우주의 생성이 시작한다.

첫째 권능은 자연의 형성자, 다음으로 유기적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신발생론적 과정(le procès théogonique)에서 자연, 인간을 바라보기

말년: 두 개의 철학을 “순수하게 추론적 철학”과 “실증 철학”으로 분리


셸링의 이러한 철학적 시도는 독일 낭만주의 운동에 강력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의 사상은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등 초기 낭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낭만주의가 예술과 자연에 대해 가졌던 독특한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욱이 셸링은 이성 중심의 철학에서 벗어나 자연과 예술, 그리고 직관을 철학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독일 관념론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피히테가 칸트에게서 독립하여 칸트가 분할한 물자체와 이성을 ‘자아’라는 개념으로 통합했다면, 셸링은 이러한 ‘자아’개념 역시 ‘자연’과 동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시 자아를 자연 속으로 넣는다. 자연 속에서는 정신과 물질,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이 원래부터 하나였다. 이것이 바로 셸링이 말한 ‘동일철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에 포섭된다. 절대적인 것은 어떻게 보면 신적인 것이다. 신의 정신 안에서 모든 것이 통합된다. 그리고 셸링을 지나서 다음 시간에 알아볼 헤겔에 와서는 변증법이 된다. 절대적인 것은 세계의 전체이다.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들 안에서 통합되어 있다. 통합된 것 안에서는 구조와 질서가 있고 인간이 나누던지 나누지 않던지 언제나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낭만주의 철학이 헤겔이 아니라 오히려 셸링에 와서 꽃을 피웠다는 것이 여기에서 나온다. 정리하자면 피히테의 철학을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하고 셸링의 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3. 횔덜린의 시에 나오는 낭만주의적 접근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은 독일 낭만주의의 중요한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낭만주의학파의 핵심적인 가치인 감성, 상상력, 직관을 중시하며, 근대 세계의 분열을 극복하고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을 시적 언어로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르네상스 이후의 계몽주의가 항상 그렇듯이 산업혁명이 쫓아낸 과거의 ‘신화’들을 되살리고, 인간이 잊어버린 이상과 숭고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인간은 언제나 분할된 것을 통일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요즘말로 하면 ‘플래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한 산업사회에서는 ‘분할’의 명령이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인간의 내면도 몇 차례로 나누어 버린다. 그래서 이렇게 분할되어 버린 인간의 존재를 하나로 연결하는 과정은 오히려 ‘재신화‘하는 것이다. 횔덜린이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그의 시에서 이러한 낭만주의적인 명령이 세상을 서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횔덜린의 시는 비장함에 비해서 아름다운 서정시를 넘어, 낭만주의의 깊은 철학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횔덜린 시에 나타난 낭만주의적 특징

횔덜린의 시는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이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그의 작품은 계몽주의가 강조했던 이성적 합리성을 넘어서는 감성과 직관의 세계를 보여준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은 고대 그리스 신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신이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궁핍한 시대(dürftige Zeit)'라고 명명했다. 이는 낭만주의자들이 느꼈던 근대 세계의 상실감과 정신적 공허함을 상징한다. 횔덜린은 이러한 시대에 시인의 역할을 신과 인간, 자연과 정신을 잇는 신성한 매개자로 보았다. 이는 낭만주의가 예술을 통해 잃어버린 신성함을 회복하려 했던 태도와 일치한다. 그는 시인이야말로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흩어진 존재의 조각들을 다시 하나의 전체로 엮는 신성한 사명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리스 신화의 재해석과 조화: 횔덜린은 고대 그리스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이상향으로 삼아, 탈신화화된 근대 세계를 재신화화하려 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가 가졌던 자연과 정신의 조화로운 통일성을 통해 근대 세계의 분열과 고통을 치유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시적 형식과 신화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인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의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은 이상적인 그리스 정신을 갈망하는 주인공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이러한 낭만주의적 이상을 그려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존재의 미적 형상화: 횔덜린은 이성적 논리로는 존재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존재의 진리가 미적인 형상화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었으며, 시를 통해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의 시적 언어는 감각적 경험과 초감각적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어, 마치 햇빛에 비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현실 너머의 신성한 진리를 비추어준다. 이러한 미적 관조를 통해 횔덜린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서는 직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낭만주의의 핵심 가치인 상상력과 감성을 철학적으로 정립했다. 그의 시는 깊은 사색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순수하다.


빵과 포도주, 횔덜린

횔더린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 :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할지를 궁핍한 시대의 시인들이 왜 존재하는지는 나는 모른다. 허나 그대는 말한다. 시인은 마치 성스러운 밤에 여러 나라를 배외하는, 포도주 신의 성스러운 사제들과 같다고.

하이데거는 시인들의 위치를 높게 보았고 특히 횔덜린의 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신이 없는 시대’ 혹은 ’어둠의 시대’에 빛을 밝혀주는 존재, 어둠과 빛을 서로 연결하는 존재가 시인이었다.

이는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특수와 전체, 개체와 합체, 자연과 인간, 정신과 몸을 연결하는 방식의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시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낭만주의자들의 전형이었다.


횔덜린은 낭만주의학파의 다른 주요 인물들과 달리, 삶의 대부분을 고통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보냈다. 그의 비극적인 개인사는 그의 시에 깊은 멜랑콜리와 상실감을 부여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이러한 고통은 시적 감수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는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이상을 가장 순수하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시인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정신의 다양성과 삶의 다양성이 서로 만나는 방식은 정해져있지 않다. 언제나 불안하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이다. 때론 충동적이고, 삶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에 모더니즘이 휩쓸고간 혹은 도래한 시대에서 시인은 언제나 방황할 수 밖에 없다.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라는 말처럼. 낭만주의자로서 횔덜린은 몇 세기가 흘러서야 부각된다. 20세기 들어와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이 그의 시를 재발견하면서, 횔덜린은 독일 낭만주의를 넘어 현대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노발리스


노발리스(Novalis)는 초기 독일 낭만주의학파의 가장 중요한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본명은 게오르크 필리프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Georg Philipp Friedrich von Hardenberg)이며, 그의 짧은 생애와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신비주의적 사상은 낭만주의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발리스의 작품은 낭만주의학파가 추구했던 핵심적인 가치들, 즉 감성, 상상력, 직관을 통해 세계와 존재의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을 잘 드러낸다. 노발리스의 작품과 사상은 낭만주의학파의 여러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노발리스의 주요 사상

푸른 꽃(Blaue Blume)의 상징: 노발리스의 미완성 소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Heinrich von Ofterdingen)‘에 등장하는 '푸른 꽃'은 독일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 푸른 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무한한 동경과 사랑, 자연과 인간의 통일, 그리고 존재의 신비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의미한다. 주인공 하인리히가 꿈속에서 본 푸른 꽃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낭만주의자들의 정신적, 예술적 탐험을 상징한다.

밤과 죽음의 찬양: 노발리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밤의 찬가(Hymnen an die Nacht)‘는 약혼녀 조피 폰 퀸의 죽음 이후 쓰여졌다. 이 작품에서 밤은 어둠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낮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진정한 내면의 세계이자,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이와 재회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는 낭만주의가 현실의 이성적, 합리적 질서에서 벗어나, 밤, 꿈, 죽음과 같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마술적 관념론': 노발리스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변형시켜 '마술적 관념론(magischer Idealismus)'이라는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의 의식과 상상력이 세계를 창조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낭만주의가 예술가의 주관적 감성과 상상력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예술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려 했던 태도와 일치한다.


노발리스는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형제를 중심으로 한 예나 낭만주의 서클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예술을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는 것을 넘어, 철학, 종교, 과학을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아우르는 '발전적 보편문학(progressive Universalpoesie)'의 이상을 제시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학파가 문학을 통해 모든 학문과 예술을 통합하려 했던 보편주의적 열망을 대표한다. 비록 그는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과 사상은 초기 낭만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후대 낭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 처럼 시와 문학을 아우르는 예술은 언제나 낭만주의자들이 즐겨서 사용하는 세상을 통합하는 방식이었다. 과학이나 수학은 세상의 일부분을 발췌해서 그것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인’으로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과학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이 볼 때는 말이다.



5. 슐레겔


슐레겔 형제, 즉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과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은 독일 낭만주의학파의 창시자이자 핵심적인 이론가들이다. 그들은 '예나 낭만주의(Jena Romanticism)'라는 초기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낭만주의의 미학적, 철학적 원리를 정립하고 전 유럽에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사상은 단순한 문학적 경향을 넘어, 근대 예술과 비평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흔히 이들을 낭만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비평가라고 부른다. 슐레겔 형제는 낭만주의의 이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기존의 고전주의와 대립하는 새로운 미학을 제시했다.


슐례겔의 주요 철학

‘아테네움(Athenäum)’ 저널: 슐레겔 형제는 1798년부터 1800년까지 ‘아테네움’이라는 저널을 발행하며, 초기 낭만주의의 공식적인 목소리를 대변했다. 이 저널에는 그들의 비평과 더불어 노발리스, 슐라이어마허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기고하며 낭만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졌다. 이들은 이 저널을 통해 낭만주의가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지적 운동임을 주장했다.

'낭만적 아이러니' 개념: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하는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 개념을 정립했다. 이는 예술가가 창조의 주체인 동시에 자신의 창조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동적인 태도를 뜻하며,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상징한다. 이 아이러니를 통해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를 시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진보적 보편 문학':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 문학을 "진보적 보편 문학(progressive Universalpoesie)"으로 정의했다. 이는 모든 예술 장르와 학문(시, 산문, 철학, 비평)을 융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려는 낭만주의의 보편주의적 열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문학이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낭만주의의 확산을 이끈 번역가이자 학자 :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탁월한 번역가이자 문학사 학자로서 낭만주의의 지평을 넓혔다.

셰익스피어 번역: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 문학계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슐레겔의 번역은 원작의 운율과 분위기를 완벽하게 살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셰익스피어 번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번역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정의: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극 예술과 문학에 대한 강의(Über dramatische Kunst und Literatur)’를 통해 '고전적(classic)'과 '낭만적(romantic)'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의했다. 그는 고전주의가 고정된 형식과 질서를 중시한다면, 낭만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유기적인 예술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이 강의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낭만주의의 미학적 원리를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슐레겔 형제는 단순한 작가를 넘어, 낭만주의학파의 이론적 지도자였다. 그들은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 철학을 문학적, 미학적 사유로 연결하며,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을 예술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 그들은 낭만주의가 과거의 유산(그리스 고전, 중세 시대)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고 모든 것을 융합하려는 역동적인 운동임을 보여주었다. 슐레겔 형제는 낭만주의의 핵심 사상을 언어로 정립하고 전파함으로써, 낭만주의학파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낭만주의는 유럽 전체를 휩쓰는 거대한 문예 및 사상 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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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는 통합하고 연결한다.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전체를 아우르려고 한다. 이것은 과거의 중세시대 이후 계몽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통합하고 연결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영역은 예술영역이었다. 물론 낭만주의가 17세기 발현한 이후 헤겔을 지나면서 아예 ’이상’만 추구하는 현실에 부적응한 사람들의 노래로 들리기는 하지만. 초기 독일의 낭만주의는 오늘 살펴본 것처럼 주관론과 객관론 사이에서, 절대와 상대 사이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생기와 영혼 사이에서 항상 이것들을 접함하려고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오늘날 어떻게 보면 AI시대에 다시금 필요한 것은 낭만주의자들의 접근이 아닐까한다. 분할된 것들을 통합해서 전체를 보고 고민하고 선택하는 인간의 역량이 다시 개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공부로 필명을 ‘낭만민네이션‘이라고 짓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을 놓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부르기도 했다. 이것이 슐레겔이 이야기한 ’낭만적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정도면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재료들은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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