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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는가?

한스큉_그리스도교'고대그리스도교 헬레니즘 패러다임'

by 낭만민네이션

0. 들어가기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나님나라였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였다!"라는 구절에서 Alfred Loisy 알프레드 루아지가 이야기한 내용이다. 굳이 영어로 보자면 Jesus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and what came was the Church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루아지, 불트만 그리고 예수세미나의 일부이다. 이것은 신학자 대다수의 관점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의 신학자들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발전했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그러니깐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시작을 단절과 대립으로 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예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교회의 연속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교회론'에 있어서 이렇게 소소한 대립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

예수와 교회를 단절, 긴장으로 보는 입장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나님나라였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였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종말론적 회복, 새로운 질서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등장

한 것은 제도화된 교회였다. 결국 하나님나라는 종교조직, 성례, 성직자 중심의 계층 구조였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왜곡, 혹은 변질이다.

루아지, 불트만,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


연속으로 보는 견해

예수와 교회를 성취와 발전으로 보는 입장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교회를 통해 성취, 발전되었다.

예수의 공생애에서 복음서의 핵심 주제,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였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가르침에는 교회론적 함의가 있다. 신약의 교회론적 그림, 즉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전 등은 하나님나라 비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 외 대다수


이러한 흐름에서 한스큉은 이 둘을 연결한다. 시간차를 두고 해석하는 것이다. 한스큉은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원형이 투영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원형이다. 이것을 원그리스도 패러다임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스큉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삶인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고 관료화되며 위계화된 종교 질서로 발전했다고 본다.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단절과 긴장관계로 해석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이것이 한스큉의 그레이영역이다. 가톨릭에서 반대하고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한스큉의 논의는 바로 여기서 첨예한 도전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러한 이해를 기반으로 헬레니즘 문화에서 어떻게 패러다임이 변해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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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스큉과 패러다임의 전환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역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6가지의 패러다임을 소개한다. 한스 큉이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신학에 도입한 주된 이유는 기독교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현재의 신학적, 교회적 상황을 진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가 단순히 일직선상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지배적인 세계관과 신학적 틀, 즉 '패러다임'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패러다임들이 변화하고 충돌하면서 기독교가 진화해왔다고 보았다. 그럼 의미에서, 유대-그리스도교적 시기, 헬레니즘적 패러다임,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 종교개혁 패러다임, 그리고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 등으로 기독교 역사를 구분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분석을 통해 큉은 과거의 신학적 논쟁이나 교회의 분열이 단순히 교리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패러다임 간의 충돌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는 과거를 이해하여 현재의 교착 상태를 넘어서고 미래를 향한 길을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이것은 신학적 정체성 재정립과 교회 일치 운동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 큉은 패러다임 개념을 통해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시대적 패파러다임의 변화 속에서도 어떻게 일관성을 유지하며 전달되어왔는지 탐구했다. 동시에 그는 특정 시대에 고착된 패러다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여, 현대 사회의 도전과 문제에 교회가 적절히 응답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비판했다.


특히 교황 무류성 교리가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의 산물로서 현대적 맥락에서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의 패러다임 신학은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기독교가 현대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고, 나아가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 간의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가 공유할 수 있는 '세계 윤리(Global Ethic)'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종교 간 평화가 곧 인류 평화의 전제 조건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스큉은 패러다임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결국 한스 큉은 패러다임을 도입하여 신학 연구에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관점을 도입하였고, 신학이 단순히 교리적 명제의 나열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해왔음을 보여주었다.


한스큉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학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재해석하고 갱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독려했다.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다원주의 사회가 보편화되면서, 큉의 패러다임 신학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공동선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의 신학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를 이어가는 신학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런의미에서 다른 패러다임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보수적인 기독교에서는 종교다원주의로 오해받는 일도 생긴다. 어찌되었든 이런 방식으로 큉을 이해하면 6개의 패러다임으로 그리스도교를 볼 수 있게 된다.



2. 고대 그리스도교 헬레니즘 패러다임의 형성


한스큉이 제시한 첫번째 패러다임은 원시그리스도교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이었다. 지난시간에 알아본 것처럼 묵시문학적인 특징이 초대교회에 팽배했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오심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번에는 두 번째 패러다임으로 로마제국-헬레니즘 문화에서 만들어진 고개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이다. 여기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자는 '사도바울'이다. 바울은 유대인 기도교인이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모두 가진 인물이다. 바울의 관젬에서 보면 이방인에 대해서 '준비-성숙-이행'의 순서로 변화되고 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인 교회로 확장된다. 여기서 영어로는 ecumenical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이 확산되던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 즉 지혜와 철학의 시대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의 운동에서 거점의 이동이다. 초대교회는 갈리리와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패러다임을 만들고 확산했다. 이때의 주된 인물은 유대그리스도인들로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였다. 그러나 헬라 유대인 그리스도교인이 있는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패러다임의 주도자가 되는데 이것이 주도한 사람은 사도 바나바이다. 그러니깐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교회로 패러다임의 진원지가 이동한 것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했던 복음이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진다. 그러니 당연히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삶의 방식과 문화에도 그리스도교의 예전과 세계관이 전해졌고 적응이 되어져 간다.



사도행전을 지나서 로마서와 같이 사도바울의 편지로 넘어가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패러다임의 거점이 된다. 이제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예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하여 패러다임을 이끌어가고 여기서의 핵시믄 사도바울이다. 그러니깐 초기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서 과도기에 바나바로 넘어갔고, 마지막에는 사도바울에 와서 패러다임의 확장이 꽃을 피운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보자. 먼저 팔레스틴의 예수 운동은 시골환경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 운동의 집결지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성전, 율법사와 충돌, 십자가 처형, 오순절 성령강림, 예루살렘교회의 태동)에서 그러다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는 '도시적 현상'으로 확장 되었다. 언어는 민중언어인 아람어였다가 이방인 그리스도교는 도시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럼 사도바울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도 바울

유대교적 토양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헬레니즘 정신에 물들어 있는 인물

유대 그리스도교에서 이방인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을 준비한 인물

바리새적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의 전향: 다메섹 회심 사건

이스라엘의 메시야 예수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온 세상의 메시야로 선포됨

의롭게 됨(justification)의 새로운 이해: 유대교 율법준수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신뢰(pistis)


조금 더 들어가보자. 그럼 어떻게 바울의 종교는 그리스도교를 세계종교로 전환할 수 있었을까? 바울선교의 초점은 처음부터 이방인을 위한 선교였다. 물론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세계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한스큉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도자요, 그분의 말씀이 그리스도교의 바탕이다”라고 말한다. 혹자는 바울이 교회의 시작이라고도 하지만 한스큉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교 창설자가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패러다임에 대해서 한스큉은 사도바울이 아니라 진리이시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말한다.


성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이러한 바울이 전파한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울은 먼저 헬레니즘 교육을 받은 로마시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또한 랍비교육과 성서주석, 주변의 헬레니즘 세계의 관념과 표상들을 바울이 사용했고 이것이 세계종교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바울의 신학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예수의 선포와 연속성과 함께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와 세계종교와 구별해 주는 요소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서이해의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다. 성서를 읽으면서 그전의 해석과 이후의 해석이 달라지면서 율범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게 된다. 또한 사도바울의 편지에는 다양한 직분들이 나오면서 교회 안에서도 조직가, 이론가, 실천가와 설립자 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결과의 원인이 바로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다.



3. 교계 제도를 갖춘 교회의 형성


사도바울을 지나서 로마라는 맥락을 만나면 직무적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사실 사도바울이 서신서에서 이미 어느정도 역할과 직무를 제안한 적이 있다. 복음선포의 기능에서 보면 사도와 예언자, 교사와 설교자, 권고자가 있다고 했고 다들 은사 중심적으로 직분이 나누어져 있었다. 자선과 구호의 관점에서 보면 봉사자와 구호담당자, 간병자, 공동체 봉사 과부로도 나눌 수 있었다. 공동체에서 지도의 관점에서 보면 첫회심자 이후 감독이나 지도자들이라고도 쓴다. 이렇게 보면 사도적 공동체조직과 카리스마적 공동체조직이 형성되고 있었고 로마시대를 지나면 '주교'에게 권력이 집중된다. 여기서 질문은 왜 공동체적 그리스도교 교회는 사제-주교 중심의 감독형 교회제도가 되었을까?


사도적 공동체 교회_예루살렘 유대인 기독교 원시공동체(48년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원시 기독교공동체는 그 중심 지도력은 12사도(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 다음으로 예언자, 복음선포자, 협력자들, 장로들 가장 바깥에 형제, 자매들(공동체의 지체들)로 구성되었다.

사도들에 의한 초대교회에도 직분별 역할과 기능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직계급 조직에 따른 교회구조는 아니었다.

복음선포의 기능: 사도, 예언자, 교사, 설교자, 권고자들

자선, 구호 기능: 집사(deacon, 디아코노스/봉사자), 구호담당자, 간병인, 과부들

공동체 지도 기능: 첫 회심자, 공동체 책임자, 감독.


카리스마적 공동체 교회: 바울의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55년경)

사도(바울)은 예언자였고 교사였으며, 모든 신자에게 카리스마적 리더였다. 협력과 지도를 하면서 개종자, 대표자, 감독자, 봉사자였다.

바울서신의 (고린도)교회는 카리스마적 교회(charismatic church)였다.

바울의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목회서신에 나타난 교회는 매우 직임적 교회, 직무형 교회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

교회내의 봉사자들의 역할과 기능은 각자 받은 성령의 은사에 따라 분담되었다. 물론 무질서와 혼란이 엿보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질서를 획일화, 위계화, 중앙집권화를 통해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사제직이 없었다. 신약의 공동체는 교회 지도자에게 “사제”(제사장 priest, sacerdo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구원의 중재자로서 “사제직”을 내세운 적이 없다. 사제직(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한 단번의, 영원한 중보자로서 제시되었을 뿐, 이것을 어떤 인간에게 결부시키지 않았다.

어떤 경우라도 초대교회는 사도직의 직무를 종교 예식(예전)과 연관된 사제직을 말한 바 없다. 그 대신 초대교회는 장로, 목사, 감독 등의 직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도바울의 초기 서신서를 보면 사도적 교회의 기능을 강조한다. 봉사와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고 공동체에 봉사하는 과부가 있었다. 추후에 제도화가 이루어지면 카리스마적 리더가 주교가 되고, 그 주교를 따르는 사람이 원래는 구호담당자였다. 흔히 집사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도 초기에는 디아코니아와 같은 봉사적 기능만 강조되다가 나중에는 감독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후 로마주교가 부상한다. 군주제적 주교직을 옹호하면서도 로마주교는 언급되지 않는다. 로마의 군주제적 주교직은 추후에 확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있었을까? 한스큉으로 보면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간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로마에 정착을 하면서 운영하는 시스템을 '로마의 시스템'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가설이 있다.


왜 로마 교회일까? 칼케돈 공의회 당시 7대 주교좌 도시가 있었다. 로마(Rome),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안디옥(Antioch), 예루살렘(Jerusalem), 에페소(Ephesus), 카르타고(Carthage)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수석 주교가 로마주교이다. 그리고 1대 주교는 바로 '베드로'이다. 로마교회가 자부심이 있는 이유는 제국의 수도에 있고 바울과 베드로의 묘지가 있었으며 사실상 주도권을 가진 교회였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이방인으로 변환되는 시기에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에서 로마의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다. 추후에는 이방인들만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된다. 따라서 제국 로마의 형식에 따라서 사제와 주교 중심의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다.




4.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이러한 맥락에서 제도화된 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최초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호교론자 혹은 변증가라고 해서 apologist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최초로 그리스도교 저술가인면서도 최초로 신학에 철학적 개념을 넣었다. 이들은 일반 사회에 그리스도교를 믿을만한 종교로 제시하기 위해서 헬레니즘의 개념과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석을 한다. 성서만이 아니라 철학적 논증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요한 학자로는 데오빌루스, 타티아누스, 터툴리아누스, 아테나고라스, 유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가 있다. 특히 유스티누스(Justinus)는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신학을 발전, 완성시켰다. 유스티누스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이성이 합치된 지혜로 인정받게 되고 여기에서 로고스(logos) 개념도 등장하게 된다.


로마 교회는 혼합이냐 구분이냐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을 수용하여 <복음의 헬레니즘화>를 이룬 것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인가? 아니면 <헬레니즘의 기독교화>인가?

예수에 대한 실존적인 추종(제자도)은 형이상학적 관념화를 초래한 것은 아닌가?

역사의 예수는 뒷전으로 밀어내 버리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같은 성육신 교리로 전환되지 않았는가?

묵시문학적 종말 임박 대망은 망각되어 가고, 대신 기독교는 로마 제족이라는 세계속에 항구적으로 자리잡은 것 아닌가?

하나님나라의 임박한 도래가 아닌 시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이하면서, 구원의 역사는 교회의 시대로 이동했다(교회가 구원사의 통로가 되었다)

큉의 질문 : 혼합되어서는 안되는가? 종교들의 융합으로서의 혼합주의는 안되는가? 단호히 경계설정을 해야 하는가?


이 시기를 지나면서 그리스도교 패러다임은 세 가지의 원칙이 정해진다. 그 세 원칙은 바로 '신앙고백-정경-주교직'이다.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으로 정해졌고,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정경화 작업을 거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성경이 정해졌다. 또한 군주제적 주교직은 교도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도권(Magisterium)이란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를 말한다.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교회는 교리에 관한 진리를 해석하고 선포하는 권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완전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에 대한 태도는 복종적이었고, 빌레몬과 같은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잘 대해주어야 한다는 식의 노예제도도 인정되었다. 병역, 결혼, 도덕적 순결성들도 인정되었다.



5. 기독론의 패러다임 전환


이제 기독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자. 첫번째 다루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오리게누스(Origenus)이다. 보통 오리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리겐은 문화적 중재자로서 헬레니즘 문화 안에서 기독교가 이해될 수 있도록 학문적 신학의 첫 번째 모델을 만들어 낸다. 헬레니즘의 그리스 문화를 그리스도교 안으로 가지고 오기 위해 신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헬레니즘의 그리스도교화(Christianization of Hellenism),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Hellenization of Christianity)라는 주제에서 헬레니즘의 그리스도교화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리겐은 바울이 창시한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 패러다임의 신학적 완성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원래 교부들에게는 교리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연구는 교부들의 설교나 성경해석이 있다는 것이 공유되었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시민종교'로 발전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 '종합'을 하거나 '해설'을 하지만 깊이있고 부피감이 있는 신학이 붕괴하고 단편적이고 일률적인 해석만 가능한 '원리'만 남게 되었다. 로마시대의 철학은 보통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피스트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초기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이해가 헬레니즘의 방식으로 바뀌면서 이해와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신화화' 교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해하기가 쉬워졌지만 그리스로마신화와 연결되는 관점들이 생겨버렸다.


한스 큉의 관점에서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 형이상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오리게네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그리스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고 체계화하려 했다. 그는 플라톤주의적 이원론과 영혼의 선재설, 만물회복설 등의 개념을 기독교 교리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다. 큉은 오리게네스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기독교가 비로소 헬레니즘 세계의 지성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오리게네스의 일부 사상이 후대에 이단으로 정죄된 것은 헬레니즘 사상과의 융합이 항상 순조롭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할 위험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본다.


기독교의 헬레니즘인가?
헬레니즘의 기독교화인가?


오리게네스를 포함한 초기 교부들(교부철학)은 그리스도교가 이교 세계와 대화하고 스스로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 형이상학을 광범위하게 수용했다. 한스 큉은 이러한 수용이 단순히 철학적 개념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그리스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고 체계화하려는 **'변혁적 수용'**이었다고 설명한다. 교부들은 플라톤주의의 로고스 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고, 신플라톤주의의 유출론을 창조론에 접목하는 등 적극적으로 철학적 도구를 활용했다. 이로써 기독교는 사변적 깊이를 얻고 당시 지식인들에게 더 큰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큉은 이 시기의 패러다임 전환이 기독교를 지역적 종교에서 보편적인 세계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삶과 메시지보다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게 되는 경향도 낳았다고 분석한다. 이는 이후 서구 신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대해서 알아보자.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헬레니즘의 학문과 과학이 꽃피웠던 지역이다. 이 학파는 그리스도-로마를 대표하는 헬레니즘과 기독교를 종합을 꾀했던 학파로 신플라톤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결합하려고 했던 흐름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유대인 학자 필론(Philon B.C.20-A.D.42)에서 태동하였고,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수용하려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 뒤이어 이를 가장 활발하게 꽃을 피우게 한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가 대표적이다.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은 인성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치우침으로써 가현설적이거나 영지주의적 경향이 보인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of Alexandria 150-215)1)

헬라철학과 기독교의 조화를 이룬 교부이다. 신앙과 헬라철학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학문은 신학에 도움을 주고, 기독교는 이교학문의 영광이며 꽃이다. 철학과 신학을 배타적으로 말했던 터툴리안과 다르게 클레멘스는 철학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므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이성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이교철학과 기독교 신앙사이의 조화가 가능하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라, 그렇다면 그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인가" 하고 반문한다.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5)2): 헬레니즘적 기독교의 전형(典型)

하나님은 로고스 또는 지혜를 낳는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그러나 이 로고스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제2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에게 종속되는 존재이다.

아들은 신성을 가지기는 했으나 그 신성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므로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신이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간적 존재 또는 제2의 신이다: 헬라철학적 중보자적 로고스 개념에 영향을 입음.

오리겐의 기독론에는 단성론적 경향과 가현설적이고 영지주의적 경향이 함축되어 있다.

오리게네스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인간 육신을 입고 육화하셨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하나님과 닮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유스티누스(Justinus)3)의 로고스 기독론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100-165)은 변증가로서, 그리스철학을 기독교 복음과 대화하여 헬레니즘세계에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철학의 핵심개념인 로고스 개념을 기독교에 접목시킨 최초의 신학자는 유스티누스이다.

로고스(Logos): 이성 혹은 이법(理法)으로, 우주적 원리로서, 만물(우주)안에 내재하는 신적 이성이다. 로고스는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신적 이성이다. 모든 인간은 이 신적 이성인 로고스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로고스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로고스는 씨앗(spermatikos)이다. 신적 로고스는 인류 전체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따라서 모든 인류안에는 로고스의 씨앗이 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를 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헤라클레토스처럼 로고스의 원리에 따라 살았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도 오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니까 구약의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라 이교 철학자들도 로고스의 씨앗을 자기 영혼안에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이성적 본성이 분여(分與)되어 있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로고스의 씨앗 덕택에 어느 정도 진리를 볼 수 있지만 흐릿하게만 본다. 각자 고유한 기능에 따라 배분되어 있는 씨앗 또는 유사함은 로고스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로고스에게서 오는 은총의 덕택으로 그분께 참여하고 합치되는 것이다”(유스티누스, 제2호교론).

유티누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이교 철학자이지만 로고스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안에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로고스이기 때문이다”. 유스티누스는 이교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영혼의 불멸성, 사후의 형벌, 천상의 것들에 대한 관상을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진리를 말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진리의 씨앗들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일반계시 혹은 포용적 계시론의 근거가 된다.


유스티누스_로고스 그리스도론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계시된 로고스: 그런데 로고스는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안에 충만한 로고스를 품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로고스는 만물속에 내재되어 있고, 모든 사람에게 분여되어 있었으나 이제 계시 자체이신 로고스가 직접 성육신하여 나타난 분이 그리스도이다. 신약의 그리스도교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진리의 게시를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출생한 유일한 아들로서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로고스이며, 하나님에게서 첫 번째 난 말씀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 만물의 우주적 원리인 신적 이성인 로고스는 만물안에 내재되었고, 모든 인간안에 활동하였는데, 육체를 입고 세계속에 계시됨으로, 즉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충만하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선재하셨는데, 성육신을 통해 로고스는 육화되심으로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선재적 로고스의 성육신이다.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온전한 로고스였다’.

로고스가 처녀 마리에게 태어남으로써 인간이 되었다.

“이전에는 불 모양으로, 다른 때는 무형(無形)의 모양으로 나타났던 그가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를 위해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선재하였는데, 처녀의 몸에서육체를 입어 인간이 되셨다“. 로고스는 몸과 혼과 영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

신적 이성으로서 로고스는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고, 통치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JX는 로고스로서 존재했는데, 하나님의 본성과 활동에 대한 완전한 표현이었다.

성육신이란 예수님이 실제적인 몸과 피를 취하고, 실제적인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두 본성을 말한다.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 속에 있는 로고스와 같은 종류이지만, 예수는 가장 충만한 로고스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자 로고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거나 발출했기 때문에 성자는 하나님보다 열등하다. 말하자면 로고스는 하나님과 피조물 중간자이다. 즉, 이로고스는 첫째 신이 아니라 파생적이며 출생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로고스는 한 분이신하나님보다는 열등한 신이며, 피조물보다는 우월한 신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중재하는 중간적 존재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사이는 동일성과 차별성이 동시에 있다. 로고스는 선재적 신적 존재이지만, 성부 하나님에 종속적인 존재이다.


0. 나오기


오늘은 큉이 제시한 패러다임에서 2번째의 패러다임인 헬레니즘 패러다임을 알아보았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베드로에서 사도 바나바로, 마지막에는 사도바울로 넘어오게 된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원그리스도교 묵시론을 기반으로 예루살렘의 맥락에서 이해되던 성경이 헬레니즘에 오면서는 오리게네스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서 그리스적 해석을 하게 된다. 헬레니즘에서는 모던한 패러다임을 구추하면서 성경의 해석이 '알레고리'로 이해되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이른바 '종합'을 했던 교부들에 의해서 현재의 그리스도교가 가진 '이성적인 기반'을 만들었다. 물론 중세신학의 경로를 거쳐야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초기에 공동체로 시작한 사도들의 모임이 어떻게 교회의 형식을 갖추고 신학의 내용에 철학이 베어 들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스큉이 카톨릭적인 관점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핵심을 붙잡고서는 이렇게 전 역사를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살펴본 패러다임에서 헬레니즘 철학은 기독교 신학과 연결되어서 이단성이 나오기도 하고, 인본주의적인 경향이 나오기도 한다. 이후에 많은 부분이 논쟁이 시작되는데 일단은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이후에 중세시대까지 가보자. 큉의 패러다임적 접근은 진지하게 살펴보면서 돌아봐야 한다.




루돌프 불트만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거성으로 불리며, 특히 신약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독일 북부 올덴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마르부르크, 튀빙겐, 베를린, 할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헤르만 궁켈과 빌헬름 헤르만 같은 학자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의 학문적 여정은 그를 1921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마르부르크 대학 신약학 교수로 이끌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자신의 독창적인 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의 학문적 배경은 역사비평적 연구와 양식비평(form criticism)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이는 그의 신학적 통찰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비신화화_성서 해석의 새로운 지평 : 불트만의 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이다. 그는 신약 성서가 1세기 세계관에 기반한 신화적 요소들로 가득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기적, 부활, 승천, 그리고 종말론적 이미지들은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적 표현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대인에게 성서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불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성서의 신화적 외피를 벗겨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실존적 의미와 진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성서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특정 시대의 문화적, 과학적 이해에 갇히는 것을 넘어,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실존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실존주의적 해석과 신학적 유산 :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은 단순히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넘어, 실존주의 철학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특히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분석한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에게 신약 성서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실존적 질문을 던지며, 삶의 의미와 죽음, 죄와 용서,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직면하고 결단해야 할 실존적 도전으로 이해된다. 불트만의 신학은 수많은 논쟁을 야기했지만, 현대 신학이 성서를 새롭게 이해하고, 신앙이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유산은 매우 크다. 그의 작업은 신학이 항상 당대의 지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재해석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불트만 신학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 불트만의 신학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불트만 학파'를 형성하며 많은 추종자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반대와 비판 속에서도 기독교 신학이 현대 사상과의 대화를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의 영향은 신약학뿐만 아니라 조직신학, 철학적 신학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그것이 현대인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오늘날에도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종교적 언어와 현대 과학적 세계관의 충돌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시도에서 여전히 중요한 참고점이 되고 있다. 그의 신학적 통찰은 시대와 문화가 변해도 변치 않는 복음의 핵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바르트의 신학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20세기 개신교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스위스 바젤에서 교회사 교수 프리츠 바르트의 아들로 태어나, 베른,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인 아돌프 폰 하르낙, 빌헬름 헤르만 등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당시 자유주의 신학이 현실 문제에 대해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그는 전통적인 신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를 '위기로부터의 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전환점으로 이끌었으며, 이는 1919년 그의 저서 '로마서 주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변증법적 신학의 등장과 '하나님의 말씀' 강조 : 바르트는 당시 지배적이던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계시의 독자성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는 신학이 인간의 종교적 체험이나 문화적 진보에서 시작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핵심이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성이나 도덕적 노력을 통해 파악될 수 없는 '전적으로 타자'이시다.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계시를 절대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서구 사회의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

교회 교의학: 방대한 신학 체계의 구축,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에서 집대성되었다. 1932년에 시작하여 그가 사망할 때까지 미완으로 남은 이 방대한 저작은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들을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체계화하려는 시도였다. '교회 교의학'은 계시론, 하나님론, 창조론, 화해론, 구원론 등 기독교 교의의 핵심 주제들을 다루며, 성서의 메시지를 현대 세계에 선포하려는 바르트의 열정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20세기 신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에서 그의 사상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적 사고가 특징이며, 모든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바르트 신학의 영향과 현대적 의의 : 칼 바르트의 신학은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 기독교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서의 권위와 하나님의 초월성을 재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그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바르멘 선언'을 주도하는 등 정치사회적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신학은 단순히 학문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가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신학적 응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오늘날에도 바르트의 신학은 교의학적 논쟁, 성서 해석,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 신앙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동시에 세상의 문제에 응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토마스 쿤: 과학사의 혁명적 사상가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1996)은 20세기 과학철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꾼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이다. 그는 원래 이론물리학을 전공했으나, 과학사를 연구하면서 과학의 발전 과정이 기존의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방식과는 다르다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통찰은 1962년 그의 대표작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출간으로 이어졌으며, 이 책은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인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쿤은 이 책에서 과학이 특정 패러다임 속에서 '정상 과학' 활동을 하다가, 해결되지 않는 '변칙 사례'들이 축적되면서 '위기'에 직면하고,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과학혁명'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패러다임: 과학 공동체의 공유된 틀,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paradigm)'은 그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패러다임은 단순히 하나의 이론이나 모형을 넘어서, 특정 과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 개념적 틀, 문제 해결 방식, 연구 방법론, 가치관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다. 마치 우리가 특정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듯이, 과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패러다임이라는 틀을 통해 자연 현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며 연구한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은 한 시대를 지배했던 강력한 패러다임이었으며, 이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자들은 만유인력 법칙을 기반으로 다양한 물리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했다. 패러다임이 존재함으로써 과학자들은 불필요한 논쟁 없이 효율적으로 '수수께끼 풀기'와 같은 정상 과학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

패러다임 전환: 과학혁명의 본질, 쿤은 과학의 발전이 항상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변칙 사례(anomalies)'가 계속 나타나 축적될 때 위기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위기가 심화되면, 과학자들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설명 방식을 모색하게 되며, 이는 결국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으로 이어진다. 패러다임 전환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혁명'과 같다. 이는 마치 '개종'과도 같아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기존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은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꼽힌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 갖는 현대적 의미 :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사회학, 경영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론은 과학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과정만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용어는 학문 분야를 넘어 일상생활에서도 급진적인 변화나 새로운 사고의 틀을 지칭하는 데 널리 사용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쿤의 이론은 과학 지식의 상대성과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과학사를 단순히 사실의 연대기가 아닌, 이해의 틀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과학 발전의 역동적인 본질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급변하는 사회와 기술 변화 속에서 기존의 사고방식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리게네스: 초기 기독교 신학의 거성

오리게네스(Origen Adamantius, c. 185 – c. 254)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신플라톤주의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순교한 후, 오리게네스는 어린 나이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를 이끌게 되면서 탁월한 학문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철학적으로 심화하고 성서를 주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신학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특징되며, 후대 동방교회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일부 사상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의 대가 : 오리게네스의 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 방법이다. 그는 성서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더 깊은 영적이고 영지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마치 인간이 몸, 혼, 영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성서도 문자적 의미(몸), 도덕적 의미(혼), 그리고 영적 의미(영)의 세 가지 수준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구약 성서의 난해하거나 부도덕해 보이는 부분들도 기독교적 진리와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율법이나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그리고 개인의 영적 여정을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초기 교회의 성서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학적 사상과 논쟁 : 오리게네스의 방대한 저술에는 창조론, 삼위일체론, 인간론, 구원론 등 기독교 신학의 거의 모든 주제가 담겨 있다. 그는 '영혼의 선재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갇히기 전에 미리 존재했으며, 죄로 인해 타락하여 이 세상에 왔다는 사상이다.

또한 그는 '만물회복설(apocatastasis)'을 주장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영적 존재(인간뿐만 아니라 심지어 악마까지도)가 정화 과정을 거쳐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들은 후대에 논쟁의 불씨가 되었고, 특히 만물회복설은 6세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위일체론적 사유, 특히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은 후대 교리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오리게네스의 신학은 그의 이단 정죄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같은 후대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의 신학적 통찰과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기독교 신학에 철학적 깊이와 체계성을 부여하려는 선구적인 시도를 했으며, 성서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오리게네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복합적이다. 그의 일부 사상은 현대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의 학문적 열정과 탐구 정신, 그리고 성서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높이 평가된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신앙이 당대의 지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표현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사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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