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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올리버 오도노반의 정치신학

올리버 오도노반의 '국가들의 소망'읽기 스터디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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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앞으로 네번, 올리버 오도너번이라는 학자의 책을 공부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지만 유명한 신학자와 신학에 대한 고수들과 함께 GPT의 힘을 얻어 번역을 해 가면서 공부를 하게 된다. 앞으로 정치를 하려고 하면 내가 갖게된 기독교가 어떻게 현실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인생의 사명처럼 느껴진다. 지금까지 몰트만의 정치신학이나 윌리엄 캐버너의 책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배웠지만 조금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을 느끼던 차에 능력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정치신학에 대한 고민은 '성서적 실재론'과 '기독교 현실주의'이다. 성서적 실재론은 성경의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라는 관점이라면, 기독교 현실주의는 현실적으로는 성경의 내용이 정확하게 이루지지 않지만 현실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도너번을 넘어서보자.


올리버 오도너번을 들어봤을까. 한국에서는 이제야 막 '부활과 도덕질서'라는 책으로 소개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매우 유명한 학자이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도덕 신학'으로 이름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올리버 오도너번은 194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마이클 프랜시스 오도너번과 조앤 네이프 사이에서 태어난 오도너번은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고전학을 전공했다. 이어서 위클리프 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오도너번의 관점이 투영되는 이유이기도 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자기애의 문제'로 박사논문을 쓰게 된다. 옥스포드에서 헨리 채드윅에게서 교회사를 배우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는 폴램지에게 역사와 윤리에 관한 사유하는 훈련을 받는다. 이러한 과정이 오도너번이 윤리학과 정치신학을 연결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국가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오도노반은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여러가지 이야기 전통 속에서 하나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좋은 모멘텀이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끌어내는 것은 반대한다. 또한 개인의 구원에 대한 윤리로 끌어내는 것과 사회적 복음으로 끌어내 버리는 것 역시도 비판한다. 정치신학적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방법에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 이후에 서구 사회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타부시되었지만 오히려 정치에서는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오도너번은 하나님나라나 정의, 사랑을 베푸는 일들은 일상의 생활이 아니라 정치적 움직임이라고 본다. 법이 결정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게 된다. 이런 고민들을 기반으로 번역한 것과 스터디하면서 나눈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1. 올리버 오도너번은 누구인가


오도노반은 자신의 기독교윤리학의 3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자신의 신학을 실천해간다. 그것은 다름아닌 실재론 원칙(the realistic principle), 복음적 원칙(the evangelical principle), 부활절 원칙(the Easter principle)이 바로 그것이다. 실재론 원칙은 보통 '리얼리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요더와 라인홀트 니버의 견해 차이를 통해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무슨말이냐하면, 현실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이다. 성서적 리얼리즘 혹은 성서적 현실주의는 이게 가능하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부분은 오도너번이 '부활과 도덕질서'에서 주관적 실재론과 객관적 실재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오도너번에게 성서적 실재론이란 죄, 구원, 해방, 하나님나라 등 성서의 개념들은 정치적인 으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윤리적 실재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본다. 라인홀트 니버에게는 하나님나라의 가치들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사랑이나 정의라는 가치는 추구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도달하기 어렵더라도 지향성에 있어서 수사적인 방식으로 제안했다. 이렇게 보면 니버는 진실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도노반은 '부활'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고 여전히 현실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부활 뿐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이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진다라고 믿는 것이다.



복음적 윤리

오도노반은 '부활과 도덕질서'에서 자신의 기독교윤리학을 ‘복음적 윤리학’(evangelical ethics)으로 규정하면서 시작한다.(오도너번은 자신의 기독교윤리학의 3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복음적 원칙”(evangelical principle)을 제시한다(부활과 도덕질서, 22, Resurrection and Moral Order: An Outline for Evangelical Ethics, xii). 그 그가 표명한 복음적 윤리학이란 ‘복음주의적’이란 의미보다 “복음에 토대를 둔 윤리학”을 말한다.

오도노반은 복음적 윤리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윤리는 복음적 토대여야 한다. 더 간단히 말해 기독교 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기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기독교 윤리일 수 없을 것이다.

오도너번의 기독교윤리학의 토대와 중심으로서 부활 : 여기서 오도너번은 복음적 윤리학의 결정적 토대이자, 중심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한다. 그런데 왜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인가? 그것은 낮아지신 그리스도보다 높아지신 그리스도가 윤리의 기초라는 것 아닌가? 또한 이것은 “십자가의 신학”보다 부활과 승천이라는 “영광의 신학”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도노번은 왜 기독교윤리의 출발점을 예수의 인격과 삶, 특히 신상수훈의 평화주의에 기초하지 않는가? 이는 그의 기독교윤리가 평화교회 전통보다 어거스틴 전통의 기독교 현실주의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오도너번은 성공회, 즉 국교회 전통에 서 있으며, 프린스톤에서 카이퍼 상(Abraham Kuyper Prize)을 수상한 이력에서 보여지듯 루터신학보다 개혁신학과의 친근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도너번의 부활에 대한 강조는 교파적 배경보다 그 자신의 신학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본다).


성서적 실재론: 요더의 예수론과 오도너번의 그리스도론

마찬가지로 오도너번은 정치신학의 근거를 히브리성서와 신약에 나타난 “성서적” 개념들(죄, 구원, 하나님나라)에서 찾고 있다. 나는 그의 기독교윤리학을 '성서적 실재의 윤리학' 혹은 '윤리적 실재론'이라 명명하고 싶다. 이것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예수론(Jesuslogy)에 근거한 '성서적 실재론 biblical realism'을 제시한 요더의 방법론과 매우 유사하지만, 오도너번은 자신의 성서적 실재론을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 근거하고 전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더와 오도너번 둘 다 '성서적 실재론'에 서 있다. 오도너번은 ‘부활과 도덕질서’ 2판 서문에서 '실재론이라는 원칙'을 각별히 언급한다. 다만 요더의 성서적 실재론은 '교회 정치학'을 말하는 바, 성서속의 예수 정치가 "교회론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라면, 오도노번의 성서적 실재론은 '국가 정치학'으로, 성서적 실재가 국가들안에서 객관적으로 현실화된다는데 차이가 있다(!).


성서와 국가의 정치적 일치: 그 위험성과 비판점

이처럼 성서적 실재론에 근거한 오도너번의 정치신학은 성서 계시와 국가의 진보를 긴밀하게 일치시킨다. 심지어 오도너번은 서구 자유 민주주의를 '복음의 분화구'라고 말한다. 서구사회의 역사의 진보가 복음의 구현이요, 결과라는 것이다. 희안한게도 북미 공공신학자들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사회(liberal democracy society)를 복음의 공공성의 실현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이 점이 오도너번의 정치신학과 일부 공공신학자들 사이에 형성된 정치체제의 공유 지점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복음의 분화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 너무 편협한 정치적 시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아닐 수 없으며, 더구나 힌국정치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수구 보수주의자들의 체제수호 논리로 악용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언급은 우리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공공신학자들의 정치신학적 관여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오도너번의 정치신학에는 복음적 원리에 따라 국가의 악한 구조를 비판.혁파하거나 (종교사회주의와 사회복음주의처럼) 혹은 국가질서에 대립.대항하거나 (요더-하우어워스처럼), 아니면 국가를 재구성.재형성하려는 (월터스토프의 세계형성론처럼), 그런 기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정치신학은 다분히 서구 유럽의 크리스텐덤 시각에서 생성된 것으로 국가교회나 기독교세계에서 적합한 정치신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성서와 국가를 결합하는 '일치와 동맹의 정치신학'은 다분히 콘스탄틴주의적 국가신학의 혐의를 강렬하게 풍긴다. (반면 제임스 스미스는 오도너번의 정치신학을 공공신학의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끌어 오는데('왕을 기다리며'), 요더-하우어워스가 제기하는 국가신학적 문제 제기를 협소한 시각으로 일축해 버린다).


오도너번의 정치신학의 기여

이제 오도너번의 정치신학의 신학적 기여와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오도너번의 '국가들의 욕망'은 기독교정치신학을 위한 성서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위에, 모든 열방속에 정치적으로 실재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치적 다스림'이 국가안에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엄연한 “실재로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적 입장은 카이퍼 전통의 신칼빈주의 정치사상과 어느 정도 친근성을 갖는다.

또한 오도너번이 강조하는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의 진보에 대한 신학적 설명 역시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다. 이 주제에 대해 해방신학을 비롯한 여러 정치신학(종교사회주의와 사회복음주의) 역시 하나님나라와 사회의 진보를 상관적으로 해석한다.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분도, 레온하르트 라가츠, '예수의 비유', 다산글방, 월터 라우셴부시,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 명동).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도래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하나님나라와 국가의 진보를 신학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87체제의 변혁의 역사를 영구혁명인양 읇조리면서 예언자적 에토스만을 절대선의 정치로 간주하면서 <대항의 정치신학>이나 <변혁의 정치신학>만을 반복해야 하는지 반문해 볼 때다.

그동안 우리의 지배담론은 "변혁"이었다(!). 기독교세계관은 문화'변혁'의 기치를 내세웠고, 기독교사회운동은 구조 '변혁'을 외쳤다. 돌아보면 변혁 담론은 너무 과포장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변혁했단 말인가? 문화변혁을 표방했던 세계관적 기독교는 도리어 수구 보수 정치이념으로 둔갑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동안 '변혁적 하나님나라!'를 주구장창 외쳤지만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반드시 변혁의 방식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분의 왕국은 '현존'의 방식으로도,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인 '공존'속에서도 성장하는 나라이지 않는가?

지금은 변혁보다 '형성의 담론'이 필요한 시대이다. 지금은 복음의 원리가 선과 악이 교차하는 사회속에 스며들어, 그 속에 착근하면서 복음적 원리를 점진적으로 구현하는 '형성의 정치신학'이 적실한 관점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오도너번의 정치신학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기독교 정치신학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를 통해 <기독교적 관점의 정치이론>을 새롭게 정리할 기회가 될 것이다.



2. the Desire of the Nations 프롤로그


자 그럼 들어가기에 앞어서 이 책의 프롤로그부터 살펴보자. 프롤로그에서는 제목의 이야기처럼 정말로 국가들이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국가들은 윌리엄 캐버너의 해석처럼 '사이비 킹덤'이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성을 지상의 도성이 열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읽기로는 이것이 핵심이다. 열방들이 소망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이 두 사이의 간극을 읽는 것들이 바로 '정치신학'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발제자료이고, 1장까지 발제를 발췌하고 마지막에 내 생각을 써보려고 한다. 이제부터는


Tu rex gloriae, Christe.
당신은 영광의 왕,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영광의 왕이십니다.

오,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영광의 왕이시나이다.

당신은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시나이다.

사람을 구원하시려 사람이 되실 때에 동정녀의 태를 마다하지 않으셨나이다.

죽음의 고통을 이기시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하늘나라)을 여셨나

이다.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의 심판주로 오시리라 믿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종들을 도우소서 기도하오니,

당신의 귀한 피로 구속하신 종들이니이다.

그들을 영원한 영광 속에서 당신의 성인들과 함께하게 하소서.


곡해를 피하고자 분명히 밝히자면, 정치신학은 구원의 정치적 어휘와 동일한 정치 용어들의 세속적 사용이 문자 그대로 동의어 관계에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정치신학이 상정하는 것은 유비(analogy)이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은유나 시적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에 기초한 유비, 즉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유비이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목적과 인류의 사회적 기획이 펼쳐지는 극장인 단일한 공적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오도너반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것이 일어나는 인간 사회의 역사는유비적으로 일치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곧 인간사회의 정치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세속 정치의 일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왕국이 아니다. 그것은 (엄연히 a real) 실재하는(현실의) 왕국이다(The Kingdom of God is not a mere kingdom, but it is a real kingdom). 핵심은 하나님 행위에 관한 언어의 의미 범위를 우리가 흔히 쓰는 정치 토론의 한계 안으로 축소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환원주의일 것이다!-이 아니라, 오히려 통상적인 정치의 지평을 뒤로 밀어내어 그것을 하나님의 활동에 개방하는 것이다. 해방(liberation), 통치(rule), 공동체 설립(community-foundation)이라는 지상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지시들/지시점(partial indications)을 제공한다


그에 상응하여, 우리 눈앞을 스쳐 가는 정치적 사건들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라는 지평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학은 흩어져 있는 정치적 이미지들, 이상을, 즉 온전한 정치적 개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정치 또한 그 나름으로 신학적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목표, 즉 ‘국가들의 열망’(열방의 소망’ Desire of the Nations)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발견하는 단일한 역사(one history)에 관계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신학의 대안(이를 지칭할 편리한 명칭은 없지만, 우리가 전문용어로서 ‘근대적’이라 부를 수 있는) 역시 (내가 알기로 견지된 적이 없는 어떤 이상형의 경건주의를 제외하면) 인간의 담론에서 정치를 추방하려 의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담론의 유형들을 구별된 채로 유지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치는 종교적 심상의 원천으로 기능할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그것은 영혼이 신적 영광을 향해 나아가고 또 그것을 넘어설 때 비추는, 저 깨진 유리 조각의 일부이다. 그리고 종교는 신중하게 지켜지는 영향력의 통로들을 통해 정치를 형성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며, 그 통로들은 위생 격리선(cordon sanitaire)을 유지한다. 윤리, 특히 내적 동기의 윤리는 신정정치적(theocratic) 오해에 대비하여 격리된 안전한 매개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종교가 정치를 더 신적인 것으로 만들려 넘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더 정직하게 만들 수있게 한다.


'정치신학'이라는 용어의 근대적 사용은 일반적으로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 1922)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책은 독일 국가사회주의에서 어떤 희망을 찾는 것이 가능해 보였던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며, 자유주의적 근대인들의 최악의 두려움을 확인시켜 주는 듯 보였고, 그 제목을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 제목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약간의 해명을 요구한다. 그것은 대다수 현대의 논문들처럼 신정치적(theologico-political) 담론을 다른 정치 담론들에 대해 비판적, 심지어 전복적인 것으로 구상하는 프로그램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 종교 역시, 그리고 이 책과 같이 비판적 요소와 건설적 요소를 결합하려는 시도들 역시 이 장르의 일부로 간주된다. 또한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제한적으로 차용한 것처럼, 다른 비판적 정치 담론들과 공동 전선을 펴는 프로그램에만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재세례파적’ 경향의 프로그램들, 예컨대 교회의 고유한 토착적 교회론을 적절히 전개하면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정치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프로그램(After Christendom)도 여기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정치적 문제 자체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단지 신학이 어떤 담론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상투적인 점을 상기시키는 데 정치적 내용을 환원시키는 교회론적 반(反)토대주의를 표방할 뿐인 신학적 접근법에 의해 수용될 때 과도하게 확장된다. 오늘날 정치신학이 마주한 과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전통과 접속해야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즉, 무엇이 그 빛을 가렸는지 그 원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원인들은 살아남아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무너뜨리고 전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와 신학의 근대적 분리, 그리고 그 분리를 낳은 의심들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3. Beyond suspicion_1장


발제를 듣고 옮기면서 쓰고 있다. 오도노반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이번 장의 발제를 들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변증법으로 핵심을 비껴갔던 부분을 오도너번은 정면승부한다. 이제부터 1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자. 1장은 근대국가의 형성에 따른 정치신학의 종말에 대해서 다룬다. 정치신학은 정치영역 특히 국가운영에 있어서 신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속적인 국가개념이 만들어지면서 사회계약 이후 정치는 윤리적인 특징에서도, 신학적인 접근에 대해서도 손절을 단행한다. 그리고 나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것이 확대되면서 모든 개인의 삶 속에서 자유롭게 퍼져 나간다. 어떻게 보면 알랭드보통이 이야기한 '불안'의 개념이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남부학파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에서 인사이트를 얻는다.


서론: 정치와 신학을 가르는 두 가지 ‘의심’

정치와 신학을 분리시키는 근대 전통에는 두 가지 지속적인 의심이 있다.

첫째 의심은 정치가가 도덕을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한다는 불신이다. 칸트는 “정치적 도덕가” 를 비판하면서, 참된 도덕은 정치 위에 있으며 정치가의 이익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권력을 위한 ‘조작된 도덕’은 거부되어 왔다. 정치 권력의 외양을 폭로하는 일은 종말론적 관점과 연결되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모든 권력이 무장 해제됨을 전제한다.

둘째 의심은 신학이 정치 권위를 압도하여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이다. 중세와 근대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정치 질서가 억압되는 사례가 존재하였다. 근대 철학은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목적론 대신 계약과 효율 원인을 중심으로 정치 공동체를 설명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덕은 점점 내면화되며 정치와 윤리의 분리가 심화되었다.


후기 근대 자유주의와 의심의 내면화

후기 근대 자유주의는 의심을 확대하여 정치 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개인을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 모든 사람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도덕 원칙은 이상(ideal) 수준으로 격하되어 보편적 이해관계보다 우위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문화적 습관으로 내면화되었다. 공적 담론에서 종교적 언어는 스스로 삭제 되었으며, 이는 정치 연설에서 성경적 표현을 의식적으로 지운 해럴드 윌슨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네이션 해석 : 이 부분에서는 오도너번이 '부활과 도덕질서'에서 이야기한 계몽주의 이후 발전한 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한다. 자유의 증가는 '고정된 개념'들의 용해로 인한 불안과 의심의 증가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관념들 중에서 특히 도덕관념을 용해 시켜 버리고, 자연스럽게 정치에서도 윤리의 개념을 사라지게 만든다.


남부 학파(Southern school)의 도전과 한계

남부 학파는 성경을 통해 정치적 해석학을 회복하려 하였으며, 후기 근대의 정치·신학 분리에 맞서 도전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었다.

북반구 민주주의 사회의 권위 구조와 정치 제도에 대한 구체적 분석 부족

사회과학 개념 차용의 편향성(예: 계급 갈등 중심)

정치·윤리를 결합하는 데 필요한 권위 개념 부재

이로 인해 남부 학파의 정치 신학은 현실 정치의 작동 원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민네이션 해석 : 남부학파는 구티에레즈와 같은 해방신학자들이나 요더와 같은 성경적 실재론자들이다. 이들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의심들을 넘어서 성경의 내용을 실제로 가져오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젠다는 영향력을 제대로 끼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민주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당위'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권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권위를 어떻게 회복해서 국가를 운영할 지에 대한 대안도 없었던 것이다.


정치 신학의 재정립 방향

정치 신학은 ‘하나님의 통치(Reign of God)’를 출발점으로 하여 권위 개념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방향이 제시된다.

창조 질서 보존과 구속 :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며 완성하는 질서 있는 권능이다. 정치 판단은 인간과 세상의 선함을 긍정하는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 행위 중심 : 정치 제도보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대리적 행동인 정치 행위를 주목해야 한다. 정치 제도는 변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는 본질적이다.

이스라엘 역사로부터의 통찰 : 하나님의 통치 역사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계시되었다. 이 역사를 보편 역사 이해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민네이션 해석 : 다른 신학자들과 다르게 오노도반은 창조질서의 회복 뿐 아니라 정치행위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본다. 창세기 1장에서만 파생된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한계가 있고, 계시의 입장에서도 성경전체가 부각되어야 한다.


정치 개념 형성과 성경 읽기

정치 개념은 성경 해석과 신학적 이론 사이를 매개하는 요소이다. 참된 정치-신학적 개념은 성경 본문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이론은 성경에서 발견된 개념에 응답해야 한다.

남부 학파는 성경적 개념을 발견하는 데는 성과가 있었으나, 이를 사회과학 개념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편향이 발생하였다. 정치 신학은 성경의 구원사 전체 속에서 정치 주제를 통합해야 하며, 단편적인 구절 인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민네이션 해석 : 정치개념을 오히려 성경적 실재론에 근거해서 성경에서 가져와야 한다. 성경을 편파적으로 보지 않고 성경전체를 해석하여 정치와 신학의 연결성을 만들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범주와 복음

구약의 정치 개념(하나님의 나라, 정의, 평화 등)은 신약에서도 변형·발전되어 나타난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학이 있다.

부정적 해석학: 구약 제도와 땅의 약속을 영원한 실재의 예표로 해석

긍정적 해석학: 예수의 행위 속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기대를 새롭게 수용

이 두 해석은 약속과 성취의 신학에서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한다. 구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그림자이며, 실체는 그림자의 의미를 무시하지 않는다.


북반구 정치 신학의 과제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구체적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응답이 부족하다. 다루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대중매체와 권력 부패 방지 가능성• 금융·기술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

약자 보호(장애인, 노인, 태아 등)

환경과 자원 소비의 절제 가능성

정치 신학은 이러한 현실 문제에 맞닿아야 한다.


1장의 결론: 예언자적 신학의 소명

정치 신학은 단순한 폭로나 비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를 선포해야 한다. 정치와 윤리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재통합하고, 비판만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는 자이며, 정치적 권위와 제도를 그 빛 아래에서 재정립하도록 부름받은 자이다.




4. 유비의 과정에서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


이번 스터디에서 다른 분들의 발제를 들으면서 나에게는 낯설었던 오도노반의 신학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받았던 것 같다. 그 단서 중에서 한가지가 바로 '유비'이다. 유비의 뜻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유사한 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예시를 들 때,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다가 사람들이 못 알아 들으면 '이거랑 비슷하게 이걸 떠올리면'이러면서 이해를 높여준다. 이처럼 어려운 개념과 쉬운 개념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유비가 진행된다면, 오도노반에게서 유비는 어디에 등장하게 될까? 그것을 바로 '열방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니깐 국가들은 어려운 하나님나라의 쉬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비의 개념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도 새롭게 정의한다. 유비의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 실재주관적 실재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객관적 실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와 본질을 의미하며, 주관적 실재는 이 질서와 본질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인간의 내면적 영역을 뜻한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다루겠지만 '부활과 도덕질서'에서도 자세하게 다룬다. 객관적인 실재에 대해서 인간은 자신이 믿고 따라야할 권위의 무게를 두고 자신의 내면의 질서를 새롭게 정립힌다. 객관적 실재에 대한 개인 내면의 주관적 실재가 형성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오도노반이 아브라함카이퍼에 관련된 상을 받았다는 부분도 연결되는 것 같다.


객관적 실재 (Objective Reality)

객관적 실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본질 그 자체이다. 유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인간의 인식이나 경험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이다. 오도너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이 객관적 실재를 확증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부활은 단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존재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는 객관적인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이 객관적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어야 하며, 인간의 주관적 판단보다 우선한다.


주관적 실재 (Subjective Reality)

주관적 실재는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인간의 내면적 삶이다. 이는 개인의 감정, 의지, 신념 등을 포함한다. 오도너번의 유비적 관점에서 보면, 주관적 실재는 객관적 실재와 괴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를 반영하고 응답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객관적인 창조 질서를 따르는 데서 의미를 찾게 되며, 객관적 실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주관적 실재의 온전한 모습이 된다.


유비적 관계

오도너번에게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는 유비적 관계에 있다. 즉, 주관적 실재는 객관적 실재의 불완전한 반영이자 모형이며, 객관적 실재는 주관적 실재의 원형이자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주관적 경험과 판단은 항상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객관적 실재를 향해 정향되어야 한다. 이러한 유비적 관점은 주관주의나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기독교 윤리가 개인의 신념을 넘어선 객관적인 토대 위에 서 있음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사실 유비의 관계로 엮어서 본 것이기 때문에 오도노반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의심에서 확신으로 연결되는 과정이니깐 이런 방식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유비의 관점에서 '성서적 실재론'자인 오도노반은 실재론 안에서 마음껏 두 가지의 관계들을 서로 엮는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식으로 얼기설기 복잡하게 엮여 있던 국가론과 개인의 관계가 오도노반의 시도 아래서 서로 조화롭게 연결되는 지점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의 관계에서 서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다. 오도노반 자체가 양비론이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합의 길을 추구하다보니 방법론도 그렇게 정리되는 것 같다.



5. 오도노반과 권위의 문제


최근 한나아렌트의 '정신의 삶'을 읽으면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 한나 아렌트 역시 박사논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사랑의 개념'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논리를 확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는 두 가지의 국가가 나온다.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 바로 그것이다. 신의 도성은 '사랑'으로 이루어지지만 지상의 도성은 '자기애'로 운영된다. 한나아렌트가 신의 도성의 운영방식에 대한 논문을 썼다면 오도노반은 자기애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지상의 도성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리고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대로 신의 도성에 대한 비유가 바로 지상의 도성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물론 성서적 실재론의 측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의 '이데아'와 '모방'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실재일 테지만 말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국가론과 권위의 문제를 바탕으로 신국론을 살펴보자. 국가와 정치를 비슷한 개념으로 보고 국가와 신학의 관계를 살펴본다는 측면에서 이것은 일종의 정치신학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오도노반의 정치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와 권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여러 유사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나 오도노반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세속적 권위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후에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오도노반이 비판하고 있는 정치신학에서의 '권위의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권위'를 부활시킬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계몽주의 이후에 목을 날려버린 국가의 권위가 어떻게 지금 현실에서 부활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것 말이다. 일단은 권위와 신국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두 왕국론과 두 도시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 역사를 지상의 도시(Civitas Terrena)와 하나님의 도시(Civitas Dei)라는 두 개의 도시로 나누어 설명한다. 지상의 도시는 '자기애'에 의해 형성되고,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 사랑'에 의해 형성된다.

이 두 도시는 종말론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는 서로 뒤섞여 공존한다. 오도너번의 정치신학 역시 세상의 정치적 권위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권위 아래에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오도노반은 세상의 권력이 죄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질서를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을 계승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이제 1장을 했으니 이후 펼쳐지는 다른 장들에서 살펴볼 관전 포인트로 보자.


권위의 근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적 권위는 죄로 인해 혼란해진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이다. 이는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오도노반 역시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영적 권위가 세상의 모든 권위를 압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두 사상가 모두 세속 권위가 독자적인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권위의 회복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결국 권위의 회복을 '도덕질서'의 회복과 연결한다면 부활이라는 실제적인 사건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권위가 부여되어서 삶의 행동까지 인도하는 방식으로 확대될 것이다.


역사와 구원의 관계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를 지상의 도성과 신의 도성이 서로 투쟁하고 공존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신의 도성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도노반의 정치신학은 이 역사적 흐름을 복음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해석한다. 그에게 부활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객관적 실재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로써 만들어지는 국가 속에서의 변화는 이 책의 제목처럼 국가들의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 회복하고 싶은 열망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서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주관적 실재는 점점 더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사상가 모두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해하며,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공통적으로 역설한다.




6. 앞으로 전개될 오도노반의 신학사상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윤리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제야 '부활과 도덕질서'라는 책이 IVP를 통해서 등장했지만 말이다. 그만큼 '크리스찬돔'이 한번 휩쓸고간 후에 남겨진 과제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에서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가?'라고 하는 윤리학의 측면이다. 그리고 오도노반은 그러한 주제와 너무 찰떡인 것이 그가 추구하는 것이 '도덕신학'이라는 것이다. 그의 신학적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독교 윤리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객관적인 토대로 삼는 데 있다. 이 독특한 관점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정교회 전통과 다르게 '아들 신앙'을 중심에 두고 복음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갖는 한국교회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앞으로 전개될 오도노반의 신학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부활 중심의 윤리

오도너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나 신학적 교리를 넘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악과 죽음으로부터 회복되고 확증된 '존재론적 실재'이다. 그는 모든 윤리적 사유와 실천이 바로 이 부활 사건에 대한 올바른 응답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기독교 윤리를 단순히 '성경의 명령'이나 '도덕적 원칙'을 따르는 행위를 넘어, 이미 완성된 새로운 창조의 질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더 나아가면 이러한 참여는 결국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오도노반은 부활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이 부활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참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자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신학적 실재론(Theological Realism)의 핵심이며,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 문화적 가치에 따라 윤리가 상대화되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윤리가 인간의 주관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객관적 진리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신학의 재구성

오도노반의 신학은 정치신학 분야에서도 독특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신학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기존의 기독교 정치 참여 방식과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 정치적 권위는 세속적 권력(power)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영적 권위(authority)에 기초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세상의 모든 권위가 그분께 주어졌다'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세상의 모든 통치와 권력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종속되며, 이 영적 권위 아래에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의미다.

이 관점은 라인홀드 니버로 대표되는 기독교현실주의와는 구별된다. 니버가 인간의 죄성을 전제로 힘의 균형과 차선책을 모색했다면, 오도노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적 권위가 이미 세상의 권력을 압도하고 있음을 선포하며, 교회가 이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세상의 정치 질서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정치신학은 세속 권력과의 타협이나 갈등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복음의 관점에서 정치 문제를 재해석하게 한다.


기독교 윤리의 근본적인 성격

오도너번은 기독교 윤리를 '고백적'이고 '예배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 윤리적 행위는 단순히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과 예배적 응답이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특히 도덕적 행위와 정치적 책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은 이론적 추론이나 철학적 논증에 앞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구원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러한 신학적 실재론은 기독교 윤리가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를 증언하는 존재론적 참여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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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랜만에 수준높은 스터디에 참여했다. 참여한 분들도 모두 교수님 아니면 실력이 어마어마한 신학생들이었다. 이렇게 깊이있고 세부적인 부분들까지 살피다보니 박사과정 수료 후에 너무 쉬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개념을 뭉뚱그리지 않고 하나하나 대응시키고 매칭시켜서 서로 매치가 안되는 부분을 찾아보는 작업은 재미있고 유익했다. 특히 오늘 오도노반이 추구하는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국가들이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를 '유비'의 관점에서 살펴본 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한 측면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확보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스터디하면서 이 그룹에서 번역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누구와 같이 있는가에 따라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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