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_그리스도교 읽기 5번째 시간_중세 가톨릭 패러다임
오래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움베르토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시작부터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사제들의 표정으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중세의 수도원에서 한 두명씩 사제들이 죽어간다. 독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가보면 반전이 있다. 스포일러라서 더 이상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중세는 확실하게 신플라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관에서 한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둔스 스코투스나 아비센나와 같이 의지를 강조하거나 이교도들의 신앙에 대한 침투는 중세의 패러다임을 지키는데 심각한 방해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는 그렇게 많은 마녀사냥이 있었고, 매일매일 화형에 처해지는 사람들의 절규가 넘처났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중세시대의 패러다임으로 더 깊게 들어간다. 중세의 문을 연 사람은 다른 아닌 아우구스티누스 즉 어거스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회록을 바탕으로 ‘은총론‘을 강조했고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신앙과 이성을 종합했다. 말년에 쓴 신국론은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을 구분하면서 ’유비’로써 지상의 도상은 하나님의 도상을 갈망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한스큉이 정리한 ‘그리스도교‘에서는 중세패러다임의 시작을 아우구스티누스로 본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토마스아퀴나스가 주장한 토미즘은 이성을 기반으로 다른 존재들을 포섭하려고 하는 전략을 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는 이렇게 두 사람이 펼쳐놓은 패러다임의 그물 안에서 둔스스코투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윌리엄 오캄 등등 다양한 신학자들이 신플라톤주의를 사용해서 중세시대를 이끌어 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서로 연결했다. 그러나 한 가지로 연결하지 않고 4가지 정도의 관계로 연결했다. 대립관계, 종합관계, 일치관계, 역설관계가 그것이다. 대립관계는 신앙주의이고 신앙은 이성에 대립한다는 개념이다. 종합관계는 상호보완으로써 신앙과 이성이 보완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일치관계는 이성과 신앙이 서로 일치한다고 보는 이성주의이다. 마지막으로 역설관계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별개라고 생각하며 역설적 분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결유형은 시계의 분침처럼 역사라는 시간선 위에서는 엄청난 간극을 만들어 낸다. 중세카톨릭을 이해하게 되면 지금의 구분값과 분절의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다시 종합할 수도 있다.
대립관계
신앙은 이성에 대립한다.
신앙주의로써 터툴리안이 이러한 전통을 이어간다.
기본입장 : 신앙은 그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므로 이성과 충돌한다.
대표명제 : 불합리하므로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터툴리안이 말한다.
주요질문 :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카데미(철학)는 교회와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종합관계
신앙과 이성은 보완적이다.
상보적 종합의 논리로 가톨릭적 종합주의가 실행된다.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융합되어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Hellenization)가 진행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유산인 이성과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만남
유스티누스(Justinus): 인간 이성(Logos)은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 정신은 본래부터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자연법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관념은 이미 인간 정신을 그리스도교로 향하게 한다.
‘이성을 따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소크라테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 들이었다.’
클레멘스: ‘율법이 히브리인을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교육하듯이 철학은 헬라세계를 그리 스도에게 이르도록 교육한다.’
오리게누스: 그리스도교신앙과 헬레니즘의 종합의 대표적 패러다임
초기 그리스도교사상은 플라톤주의와 만났고 이를 기독교적 사유로 사용하였다.
초기 교부들은 계시된 진리나 지식과 인간의 자연적 이해 능력은 서로 다른 것이나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고이다.
신앙과 이성, 그리스도교 신학과 그리스도 철학은 분리되지 않았고 결합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과 이성: 신앙과 이성의 중세적 연결의 관문 :어거스틴은 그리스철학을 그리스도교와 융합하여 서방라틴신학을 확립한 신학자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종합을 이끌어 낸 최초의 신학자이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신앙은 이성에 선행한다’ ‘신앙을 전제로 이성을 추구한다’.
신앙을 모든 사유의 출발점으로 하지만 그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성적)이라는 것.
계시된 지식인 신앙과 자연 이성에 따른 지식인 이성이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계시된 지식 이 더 중요하지만, 이성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적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
신앙과 이성의 관계 : 신앙이 이성에 선행한다. 그 말은 신앙이 이성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성적인 지식 도 신앙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이다. 신앙이 먼저이나, 그 신앙도 이성이 없이는 믿을 수 없다. 이성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으로 얻은 지식의 확실성을 이성의 빛으로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다. 즉 신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이성의 작용에 따라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신앙우선주의에 입각한 이성의 역할을 긍정한다.
위로부터 합리적으로 사고한 신앙과 이성을 추구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앙과 이성 - “믿기 위해 이해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근거한 신학 : 인간 이성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없이도 진리를 이식할 수 있다. 즉 반드시 신앙으로 계시된 진리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성을 통해 알게 된 진리가 신적 진리로 보충될 수 없지만, 결코 후자가 전자에 모순되는 일이 없다. 아퀴나스도 어거스틴처럼 신앙우선주의가 있지만, 오히려 신앙과 이성은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성과 신앙을 분리한다.
이성의 영역은 철학의 영역이다. 철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여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철학은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존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면, 신앙은 초자연적 빛에 의존하여 계시된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에 따른 신앙의 영역과 자연적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적 영역을 구분한다. 이성으로는 초자연적 진리(삼위일체, 구원)를 알 수 없으며, 신앙에 의해 계시된 진리를 알 수 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는 계시의 도움이 없이 이성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리와 오직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주어진 신적 권위로만 증명할 수 있는 진리를 분명히 구분한다.
이성과 신앙에 공동의 영역이 있다: 계시된 이성의 진리
초자연적 계시로 아는 영역: 삼위일체, 성육신 - 계시신학
계시와 이성으로 아는 영역: 신 존재증명 - 자연신학
계시없이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아는 영역: 수학적 진리 - 이성(철학)
‘자연적 이성’으로 논증된 ‘과학적 진리’는 ‘계시된 진리’인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이슬람과 유대교도를 개종을 위한 도구로서).
철학은 이성에 근거해 ‘아래로부터’ 만물과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 신학은 신앙에 근거해 ‘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에 관한 두가지 진리인식은 방법론적으로 구분되지만 상충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 이성을 긍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이성의 빛(이성의 자연적 빛)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은혜의 도움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신앙의 빛 혹은 예언의 빛과 같은 강력한 빛에 의해 온전하게 되지 않는 한 고차원적 질서에 속한 것들을 알 수 없다. 이 강력한 빛은 일명 ‘영광의 빛’이라 불리는데, 자연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은총 없이도 자연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자연적인 성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나 계시의 빛에 의해 앙양되고 완성되지 않으면 인간은 더 고등한 질서들을 알 수 없다. 자연은 은총에 의해 더 초월적 방향으로 이끌려진다.
인간에게 최고선(최고의 목표)는 인간 자신의 완전성인데, 그것은 인간의 자연본성 안에 깃든 잠재성이 신적인 접촉과 결합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자연 본성안에 주어진 잠재성은 파괴될 것이 아니라 초자연을 향해 나가기 위한 예비적인 것이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전제하며 그것을 완성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토미즘이라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인간 내면의 잠재성과 하나님으로 향하는 초월성과 만나서 자연이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법과 자연적 성향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퀴나스가 말하는 자연법이란 물리적 법칙이 아니라 이성의 명령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성(이성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자연법의 요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목적론적 개념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연적 성향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영원한 법칙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선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도덕적 직관은 인간의 본성안에 확립된 자연적 성향의 결과이다).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안에 존재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영원한 법칙을 ‘자연법’이라 하는데, 자연법은 이성의 명령이며, 신의 마음으로부터 발산된 것이며, 우리의 자연적 성향에 반영된 것이며,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비교해 보자. 어거스틴은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한 것이지만, 어거스틴의 신앙의 우위는 신앙의 우월성이 아니라 진리 인식할 때, 신앙이 먼저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에게도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결합한다. 어거스틴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하여 ‘신앙에 토대한 이성’ 혹은 ‘이성보다 우선하는 신앙’을 말했다면, 아퀴나스는 이 문제를 ‘믿기 위해 이해한다’라고 뒤집어 표현했고, ‘이성에 토대한 신앙’ 혹은 ‘신앙에서 자율적인 이성’으로 전환시켰다. 아퀴나스는 자연적 이성을 통해 믿음으로 나갈 수 있다는 합리적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성을 통해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학적 대종합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원하는 아퀴나스 신학
알베르투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교신앙을 결합하는 과업을 아퀴나스에게 전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결합 문제 : 반기독교적 철학 / 철학의 독자성의 대두 / 아우구스티누스적 교설의 위기: 성서, 교부, 공의회, 교황 의존적인 것의 붕괴 / 이성적 개념의 필요: 철학적 신학의 요청, 혹은 철학과 신학의 종합
합리적 대학신학으로서 토미즘 신학
어거스틴과 시대배경의 차이: 수도원적 신학과 대학신학(uni-theology).
이성의 힘과 신학의 전환이 중요하다.
이전 신학이 이성의 정당성을 신앙에 기초하여 논증했다면, 아퀴나스는 신앙의 정당성을 이성에기초하여 논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마스의 출발점은 어떤 전환인가 :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것에로의 전환, 합리적 분석에로의 전환, 학문적 탐구로의 전환
이성에 대한(이성과 신앙의 관계) 아퀴나스의 입장 : 인간 이성에게는 이성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에 터해 인식행위를 할 수 있는 영역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조차도 그리고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와 많은 윤리적 통찰 역시, 인간이 계시의 도움없이 오직 이성에 터해 인식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계시의 도움없이도 밝혀 보일 수 있는 자연적 진리들이다.
어거스틴은 우울한 예정론을 말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럼 어디에서 드러날까? 한스큉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지만 특히 삼위일체론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서로 실체로부터 출발했고, 하나님의 위격은 복수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고유성이 등장한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보체론적 동등성, 인간학적이고 심리학적으로 통찰한다. 한스큉이 보기에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이신 성부로부터 전개하지 않고, 단 하나의 신적 본질 혹은 신적 실체에서 출발했다. 그의 삼위일체론의 출발점과 토대는 단 하나의 신적 본성이었다. 이것이 어거스틴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의 원리였다. 어거스틴에게 중요한 것은 단일성이라는 철학적이고 신학적 전제 아래에서 하나님의 3중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밝히는 일이었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심리적 삼위일체( psychological trinity)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상(Vorbild)이다.
여기서 A는 삼중적 하나님과 인간 정신의 3가지 차원사이의 유비를 보았다: 기억, 오성, 의지.
어거스틴의 인간 정신(mens)의 세 가지 차원
memoria: 기억
intelligentia: 지성, 이해
voluntas: 의지
삼위일체론적 적용 : 삼중적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삼중적 자기 전개를 말한다. 성자는 지성에 따라 성부의 본체로부터 낳아진다. 성령은 의지를 따라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온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낳아진다”는 것은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낳아진다”란 출생(generatio, generation)이다.
성령이 성부로부터 “좇아나온다”는 것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좇아나온다”(보통 “나온다”로 번역)는 발출(processio, procession)이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필리오케 논쟁과 어거스틴의 역할
그리스(동방) 교부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의 원리는 세 위격 모두가 단 하나의 신적 본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치의 원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성부이다: 성부는 신성의 원리이고, 성자와 성령은 근원이 원천이며, 성자와 성령에게 신성을 선사하신다.
성부가 원천이다: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당신을 드러내신다.
한스큉의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교회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하고 패러다임으로 그 핵심을 잡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원그리스도교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헬레니즘 패러다임 그리고 이제 중세 패러다임까지 알아보았다. 중세 패러다임의 핵심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설계한 신학체계였고 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이른바 토미즘이라도 하는 종합의 방법으로 중세를 정리했다. 둔스 스코투스와 비교하면 지성의 입장을 더욱 대변했지만 신플라톤주의의 입정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한스큉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한번 들아보자.
한스큉 평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인간학적, 심리학적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단일성을 옹호, 강조했다: 서방신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어거스틴은 성부, 성자, 성령을 서로 다른 세 실체가 아니라 단 하나의 신성안에서 세 가지 다른 관계로 이해했다. 이것을 이른바 관계적 삼위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말하는 “관계”는 관계의 다양성, 다양한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관계적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성(diversity)과 복수성(plurality)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삼위 하나님의 세 가지 실재는 방식은 다르지만, 단 하나인 신성을 공유한다 성부 하나님은 낳으시고, 성자 하나님은 낳아지시고, 성령 하나님은 두 실재에 공속된 신적 사라잉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말하는 “관계”는 관계의 다양성, 다양한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관계적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성(diversity)과 복수성(plurality)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삼위 하나님의 세 가지 실재는 방식은 다르지만, 단 하나인 신성을 공유한다성부 하나님은 낳으시고, 성자 하나님은 낳아지시고, 성령 하나님은 두 실재에 공속된 신적 사랑이다.
한스큉의 비판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세 가지 관계성은 증발해 버리고, 하나의 본성안에으로 평준화되와 세 분의 하나님은 한 분의 하나님의 측면 혹은 양상(양태)을 지닌 하나님만 남지 않는가? 큉의 비판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는 양태론(modalism)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양태론이란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독립된 위격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서로 다른 양태(modes)로 본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세 위격이신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의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본다. 양태론은 결과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독립성을 희생시키고, 세 위격을 한 분의 단일성으로 처리한다. 삼위일체의 핵심은 삼위일체(threeness+unity)의 조화인데, 셋을 강조하면 하나됨(oneness)가 사라지고, 하나됨을 강조하면 셋됨(treeness)가 사라진다. 그러나 결코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의미가 ‘한 하나님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의미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이 하나의 행위로 수렴, 종합된다. 창조, 육화,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세 위격 모두의 공동행위가 되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성부는 창조를, 성자는 십자가의 죽음을, 성령은 성령강림을 각가가 특별한 활동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큉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의 독립성과 사역의 독특성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의 영향
라틴 서방교회에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바로 그 가톨릭 교의로>, 거의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의로 간주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어거스틴을 따라 하나님의 삼중성(threefoldness)보다 신적 본성의 단일성(Einheit, unity)을 강조했다.
어거스틴 신학의 개가:“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서방에서 완전하고 배타적으로 관철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세 위격, 혹은 자존적 관계들), 신토마스주의자들, 종교개혁가들, 칼 바르트한 하나님안의 세 존재양식)와 그의 제자들도, 그리고 칼 라너도 ”구별된 자존방식들“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사실상 핵심 교의로 받아들여, 아주 약간씩 다듬고 다른 말로 옮겼다.
큉의 어거스틴 평가와 해석
큉은 어거스틴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플라톤주의적 신학유형이다.(피터 브라운)
어거스틴 신학은 서방신학적 특징으로 그리스 세계와 관계를 맺지 못했다.
삼위일체론은 “지적으로 난해해 진 사변이 되고 말았다”: ‘삼위일체 고등수학’\삼위일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을 믿어야 하지만, 그리스 헬레니즘적 삼위일체 사변이나 서방 라틴적 삼위일체 사변을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앞에서 보았듯이 아버지 하나님께서(성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성자를 통하여) 당신의 영 안에서(성령안에서) 계시하시고, 구원하시며, 해방하시며,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진술이 삼위일체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역사 해석
두 도성론의 핵심: “역사는 이 세상 국가 및 시민들과 신국 및 그 시민들간의 투쟁이다”
두 도성론은 두 나라의 공존과 융합이 아니라 투쟁의 역사이다(U. Duchrow)
하나님의 도시와 악마의 도시 하나님의 도시와 세상 도시(국가)
아벨과 가인, 이스라엘과 이방인, 하나님의 도시인 예루살렘과 세속 도시인 바벨론
두 도성론은 투쟁으로서의 세계 역사에 대한 함축적인 종합적 조망이다. 기독교 최초의 기념비적 역사신학을 창출했다.
어거스틴은 역사는 하나의 목표, 즉 영원한 신국, 평화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향해 하나님에 의해 관장되고 이끌어지는 운동이라는 것을 성찰했다.
역사라는 것은 기록된 것에서 시작된다. 중세의 기록은 이후에 수 많는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전해지고 공유되었다. 그리고 역사는 일정부분 반복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본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발성도 있어서 항상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스큉처럼 패러다임으로 묶어서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요즘들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깊이 몰두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신학에 관심있는게 아니라 인간에 관심있다. 신을 대하는 인간이란 과연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역사의 굴레에서 어떻게 대응했고 어떻게 실패했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다보니 벌써 11시다. 밤이 깊었고 현대기독연구원의 불빛도 꺼져간다. 집으로 가는 길어 멀고 험하다. 그럼에도 퇴근하고 지금까지 1500년전의 역사를 훑어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이런 시간들이 쌓여서 한 올의 흐름을 만들 수 있으리라. 항상 배우고 낮아지고 겸손하고 기뻐하자. 고민하고 대안을 찾고 역사를 공부하자. 사랑을 잃지 말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매일매일 가져보자. 이런 마음으로 몸은 지쳤지만 산듯하게 내일을 맞이해보자. 중세시대에는 이보다 더 했을테니깐. 지루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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