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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부활로 만들어진 권위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확장된다

The triumph of the Kingdom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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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오도노반 스터디에서 배운 내용을 정리했다. 개인적으로 학교를 수료하고 보니 과학으로 새로워진 두뇌가 다시 신학으로 채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국내에는 단 1권 소개된 올리버 오도노반의 책을 번역하면서 스터디하는 모임에 참여한지도 벌써 3번째이다. 어렵고 힘들고 그리고 잘 모르겠다. 신학자들의 진짜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폴리매스'를 생각하면서 더 낮은 자세로 신학에 접근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장에서 오도노반은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대표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대표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 뿐 아니라 온 인류 전체로 퍼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장을 썼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위가 점진적으로 열방으로 확장되는 공간적인 서사를 표현하고 있다. 오도노반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권위의 회복이고 더욱이 '부활'을 통한 권위의 확장이다. 오늘은 권위가 어떻게 다시 전세계의 회복의 길로 넘어가는지를 알아보자.


시작하기 전에 오도노반의 다른 책 '부활과 도덕질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올리버 오도노반의 '부활과 도덕 질서'는 기독교 윤리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존재론적 토대 위에 재정립하려는 획기적인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한국에는 이 책만 번역이 되어 있다. 여기서 오도노반은 윤리적 성찰의 기반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부분으로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는 부활을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부활 이후에 실재가 다르게 연결되고 확장되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


객관적 실재 (Objective Reality)

정의: 객관적 실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증하시며 구속하신 도덕 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의지나 사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외적인 규범적 질서이다.

핵심: 오도노반은 도덕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의지에 따른 자의적인 규칙(자발주의)이거나, 인간 이성만의 추상적 산물(합리주의)이 아니라고 본다. 도덕은 창조된 질서 그 자체에 내재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창조 질서의 선함과 지속성을 종말론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세부 내용: 이 부분에서는 창조된 질서, 종말론과 역사, 그리스도 안의 지식 등을 다루며, 도덕적 삶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주관적 자유와 권위 (Subjective Freedom and Authority)

정의: 주관적 실재는 객관적인 도덕 질서에 직면한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을 다룬다. 특히 자유와 권위의 관계를 탐구하며, 인간이 이 질서에 어떻게 반응하고 참여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유와 권위의 관계: 오도노반은 권위를 자유의 억압이 아닌, 자유의 객관적 상관물로 본다. 즉, 창조 질서가 주는 권위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깨닫게 하여 자유로운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진정한 자유는 이 실재(권위)에 순종하며 그 안에서 행동할 때 얻어진다.

그리스도의 권위와 참여: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권위가 어떻게 신자의 주관적인 삶을 형성하는지 다룬다. 성령 안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참여)을 통해 새로운 인간됨을 회복하고, 도덕적 질서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삶의 형식 (Form of the Moral Life)

정의: 도덕적 삶의 형식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주관적 반응이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구조화되고 표현되는지를 다룬다. 이는 도덕적 행동이 발생하는 도덕 장(Moral Field), 행동하는 주체인 도덕적 주체, 그리고 도덕적 삶의 최종 목표인 목적을 포괄한다.

구조화된 삶: 도덕적 삶은 단순히 개별적인 행위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중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며 사랑(Love)이라는 형태로 구조화된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계명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재해석하여 도덕적 삶의 양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목적: 도덕적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다스림의 위치를 회복하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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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representative_대표성과 대표행위


오도노반은 대표 행위를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는 공동체의 상징적 구현이다. 대표자는 단순히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정체성과 전통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대표자가 된다는 것은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다시 정체성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심판 행위 대행는 대표자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정의로운 심판을 내린다는 점에서 '심판'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합의된 도덕적 판단을 집행하는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연속성의 확보이다. 대표자는 현재의 공동체와 과거의 역사를 연결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는 존재이다. 그는 공동체의 과거가 남긴 유산에 근거하여 현재를 심판하고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금 더 대표성과 대표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러한 과정에서 보면 국가론과 신학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선포와 사도의 선포: 단절과 연속성 논의

사도교회의 주장과 논쟁: 사도교회는 자신들의 선포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와 내용적으로는 다르지만, 연속성 상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단절 강조: 슈바이처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선포를 단순한 위로로 보았으며, 부활 이후 성령이 성도들에게 내주하심이 진정한 것이라며 단절을 강조하였다.

연속성 주장: 반면에 부활 이전과 이후가 여전히 연속선 상에 있다는 다른 주장도 공존하는 것이다.

예수론과 기독론: '나사렛 예수로 시작해 부활로 이어가는 예수론'과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신론의 관점에서 함께 아우르는 기독론'은 각각 예수의 선포와 사도의 선포, 즉 예수와 부활의 단절과 연속을 보여주는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의 관점: 메시지를 기준으로 공관복음서와 사도의 서신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데, 공관복음서 역시 사도의 입장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선포와 부활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한 반면,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와 부활의 예수를 구분하며 기록하고 있다.


부활과 정치신학의 함의

정치신학적 영감과 환멸: 예수론은 다양한 정치신학적 영감을 제공하였으나, 18세기 삼위일체론자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 등은 사회에 대한 불가지론적 태도 등에 환멸을 느끼고 예수론의 정치신학적 요소에 등을 돌리기도 하였다.

변화의 연관성: 전통을 무시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선포한 것과 세상이 변화의 기회를 맞이해온 것" 사이의 연관성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치 활동의 동력 부족: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신념을 주고, 성령의 내주하심은 심령의 충만함과 스스로 만족함을 가져다준다. 이렇듯 스스로 만족한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문제에 헌신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것은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의 오랜 지적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치 활동의 동력으로 삼기에는 일견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자기 완성과의 양립: 하지만 인간의 자기 완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정치 행위는 양립할 수 있다.

정치신학의 재정의: 정치신학은 오히려 인간의 자기 완성을 함축하며, 이로써 정치는 다르게 정의된다. 저마다 성령이 부여하는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행위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원리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해내지 못하는 부분들을 보완하는 것이다.


부활과 교회론적 권위: 그리스도론으로의 전환

교회론적 성격: 정치신학은 또한 교회론적이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복음으로 발생한 것이며, 이 권위는 공화주의자들이 지적했던 사회적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교회 공동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회적 희망: 교회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권위는 사회적 공동체에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줄 것이다.

그리스도론의 필요성: 사회적 공동체에 신비적 복음이 들려지려면 권위의 토대가 예수론을 넘어 그리스도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모습: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매개하는 역할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표하는 대표자의 모습이 있다. 대표자의 모습은 예레미야와 제이 이사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여호와의 종은 왕의 모습이기도 하고 백성을 위해 고통을 받는 그의 백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임재: 왕과 백성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면 이는 "명확한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 백성의 임재"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임재'라는 중요한 요소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표성: 이중적 지위와 종말론적 임재

대표성의 이중적 지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임재를 고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표성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리스도의 대표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기능적 측면의 한계: 이중성은 그리스도가 사람인가 신인가 하는 등의 존재론적 물음을 묻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기능적 측면에서만 논의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기에 하나님나라의 임박함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백성을 동시에 대표해 내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통치의 투명성: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임재는 그리스도 통치의 매개들을 벗어버리고 투명한 것으로 격상시킨다. 이제까지는 천사들과 왕의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매개돼 왔다면,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면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뚜렷해진 것이다.

신성한 권위: 예수님의 신성한 권위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으로 대체할 수 없이" 드러난다.

대표성의 두 가지 역할: 대표자만이 대표되는 자의 현존을 구성할 수 있다. 대표되는 자는 대표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행하고 경험하는 일 속에 진정으로 현존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원칙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상호 필수적이면서도 보완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정형적 대표성과 확장

비정형적 대표: 그리스도는 속죄에 있어서 무죄했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을 대표하는 데 정형적일 수는 없다. 온전히 인간을 대표해 내기 위해서는 죄인과 동일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초월적 지위: 그리스도의 대표는 비정형적일 수 밖에 없으며, 대표자로서 그리스도는 대표되는 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월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백성을 아우르는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현존의 구성: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할 경우 그리스도의 현존은 하나님의 백성의 현존을 구성하며 함께 그들의 생활에 함께한다. 이는 대표자와 대표되는 자를 제로섬 게임으로 상정하는 정치적 사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백성을 대표하기도 하고 함께 계시기도 한다.

전체적인 대표성 인정: 그리스도의 대표에 있어서 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강림, 죽음, 부활의 모든 것에 대표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그의 탄생, 십자가 수난, 부활과 승천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구분: 강림, 사망, 부활 가운데 사망과 부활은 좀 더 긴밀한 인과를 가져 서로 친숙하다. 이 둘은 옛 권위(죽음)와 새 권위(부활)로 나뉘며 권위에 있어서 더 분명하게 구분된다.

변증법적 관계 오인 경계: 죽음과 부활, 즉 옛 권위와 새 권위의 연속성은 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오인 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권위로 들어왔기 때문에 옛 권위의 범죄와 단절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유대 당국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의 부활은 예수와 대항했던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기도 하다.

부활에 더 중점: 따라서 죽음과 부활의 무게를 둔다면 부활에 더 중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모두 대표했으며, 양방향의 저항(세상의 반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을 이겨내야 했던 것이다.


대표성의 인류로의 확장

이스라엘에서 인류로: 그리스도의 이스라엘 대표는 인류를 향한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로마서에 따르면, 유대인은 잠시 이방인들보다 믿음이 못하지만, 나중에 돌아오도록 더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 유대인의 뿌리가 되셨고 이방인은 그 뿌리에 접붙여진 자들이므로 "할례 공동체와 세례 공동체는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론적 한계 극복: 대표성을 인류로 확장시키기 어렵게 하는 것은 그 대표성을 교회의 것으로만 인정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공적 전통을 위해 노력하며 신앙의 회복은 공적 질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교회는 부단히 사회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통치 범위와의 일치: 대표성의 확장은 하나님의 통치를 알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확장의 범위는 통치의 범위와 상당히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통치의 요소와 그리스도 이야기: 하나님 통치의 요소에는 "권능의 행위, 심판의 행위 그리고 소유의 은혜"가 있다. 통치가 나타는 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개입 그 이상을 뜻하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넘어 민족의 복종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올리버오도노반


2. The moments of the representative act


오도노반은 대표성에 대한 총체성을 다룬 후에 대표성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는지를 살펴본다. 이전 장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권능, 심판, 소유로 파악하는 것은 전통적인 해석방법을 통해서 알아보았다면 이번 장에서는 강림, 수난, 회복, 승천으로 네 가지를 중점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정치적 권위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도와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도노반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두 가지의 국가를 기반으로 추구해야할 하나님의 도성에 대해서 지상의 도성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본다.


강림 (Incarnation)

세례 요한의 역할: 예수님의 강림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은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복음서의 기술 차이: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만난 사건에 대한 기술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신적 권능을 부여하는 장면에 힘을 기울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대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중적 대표성: 이로써 예수는 인류 앞에 하나님을, 하나님 앞에 인류를 대표하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이중적 대표성은 요단강 사건(세례와 상관없음)과 관련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나다나엘의 말에서 잘 표현된다.

강림에 대한 해석: 강림에 대한 표현은 신약성서 안에서 각자 다른 해석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성육신을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는 경향들 때문에 강림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빌립보서의 겸손: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강림은 "겸손"을 나타낸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말은 노예의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강제성을 가지고 인간의 형상을 입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했고 겸손으로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이다.

수난의 전 단계: 종의 형체를 입은 이 "강림"은 "수난"의 전 단계이며, 강림의 겸손은 수난의 겸손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 모두를 말하고 있는 빌립보서의 서술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류 모두를 대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체적 사실: 빌립보서의 형체에 대한 논의는 실체를 가리는 추상화 작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다. 성육신 이야기는 신적 강림의 사변적 서술로 치부하는 것이 빌립보서 2장 주해의 경향이었다. 하늘-땅-하늘이라는 공간적 이동에 있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실재적 서술로 모두 담을 수는 없기에 상징을 사용하거나 일부의 내용은 신화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육신은 사건으로서 실재적, 사실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예수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전하게 중재해 냈으며, 그 나라 안에 창조부터 계획됐던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었다.


수난 (Passion)

하나님의 심판: 그리스도께서는 수난을 당하셨으며, 그의 수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무호한 죄와 무죄의 경계를 가르고 명확하게 규정하는 기능이 있다.

심판의 시작: 십자가와 부활은 심판과 그의 결과로 볼 수 있지만, 더 깊은 생각은 갈등을 심판으로 보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 그때가 심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무죄할 때 갈등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것은 그가 심판을 당한 것이다.

인류의 대표자: 그 고통은 그를 인류의 대표자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예수가 속죄 제물로 바쳐졌다는 왜곡된 주장이 나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두 권위의 상충: 그의 수난을 권위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심판을 받기 시작한 때, 즉 서기관과 제사장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 때 예수는 기존의 권위들을 교체할 새로운 권위를 선포하였다.

권위의 구분: 권위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직접 개입한 권위와 인간 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은 권위이다. 예수는 이 둘 권위 가운데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해왔다.

섬김으로 획득된 권위: 누가복음 22장 24-27절에 등장한 하나님의 권위는 섬김으로 획득된다. 이방인의 임금들이 주관하는 집권자들의 권위는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섬겨야만 한다. 이 섬김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시련이 견뎌낸 뒤에 권위로 얻어낼 것이며, 그제서야 그들은 통치하게 된다. 이 권위는 인간의 권위와 충돌하는 것이다.

권위의 원천: 인간의 권위는 인간의 마음을 얻음으로 생겨나며, 빌라도와 헤롯의 권위도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는 '아첨'을 통해 얻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는 스스로 인정하는 경우에만 얻을 수 있지 대중의 인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다.

사회 변화: 요한복음에 나타난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에서 빌라도는 자신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위는 진리를 따르며, 사람들은 진리를 따르기를 원하므로 하나님의 권위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회복 (Resurrection)

하나님의 심판: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회복한 것은 일종의 심판이며, 이 심판은 하나님의 것이다. 또한 이 심판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정체성: 이스라엘은 죄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대표자를 통해 확증한다. 이러한 원리는 이스라엘로부터 인류 전체까지 확장된다.

아담과의 결부: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상황뿐만 아니라 "아담"을 결부시킨다. 한 사람이 모두를 죄에 이르게 했듯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심판의 대상은 모든 인류가 해당되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존재적 격상: 하지만 회복은 부활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가 부활한 몸을 입고 아버지에게로 올라갔듯이 하늘로 올라가야 하며, 존재적 격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승천 (Ascension)

대관식 이미지: 승천은 대관식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공간적 상승을 표현하는 이 단어는 신화적 상징을 가진다.

역사성의 중요성: 승천이 신화로 치부되어 그 역사성을 상실한다면 정치신학적 차원에서 힘을 잃게 된다. 대관식은 확실히 상징 언어이며, 이 언어가 지닌 정치적 함의는 "예수께서 가져오려고 했던 정치적 약속의 성취이자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서의 그분의 권위"였다.

가장 나중에 일어날 일: 승천은 가장 나중에 일어날 일이다.

성령의 임재와 가능성의 시간: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재림의 시기까지 성령이 그리스도의 부재 가운데 임재하고 있으며, 다가올 날까지 "가능성의 시간"들을 예비하고 있다. 가능성은 공동체가 공공의 미래를 함께 구성하는 데 있어서 지평이 되어주는 것이다.



3. 민족들의 복종_The subjection of the nations


하나님의 통치 확장은 인간의 세속 권위와의 끊임없는 갈등과 협력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제국 권위의 심판 역할을 인정하고 성도들에게 조건부 복종을 권고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하지 않는 삶을 통해 세속 권위와 상관없는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요한계시록은 세속 권위(짐승과 창녀로 상징되는 제국)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성도를 핍박할 때, 신적 권위가 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세속 권위가 하나님의 계획에 균형적으로 부합하든, 아니면 첨예한 갈등 끝에 통합되든 모든 유형의 결론이며, 궁극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에서 온 인류로, 교회에서 사회로 확장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확장과 권위의 다툼

권위의 자리 다툼: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는 공간적 비유로 '자리 다툼'을 한다. 때로는 협의로, 때로는 강제로 서로에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조용한 다툼 (로마서 13장): 로마서 13장에 주로 나타나는 태도는 조용한 다툼의 양상이다. 성도는 세속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들과의 싸움을 회피하는 경우이다.

무조건적 복종 지양: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의 수신자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지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속과 세속 권위

이스라엘 공동체 염두: 바울의 언급은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존속해야 한다.

제국 위임자의 역할: 제국의 위임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역할을 부여받았다. 특수한 역할 중 하나는 강자가 약자에게 저지른 횡포에 대한 심판이다.

심판의 필수성: 심판은 공동체를 존속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냈는데, 이는 심판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것을 이행할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은 심판과 상관 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이나 복수를 일삼지 않으며, 되려 소송을 꺼리고 교회 내의 갈등을 세상의 법정에 가져가기를 주저하였다.

안정적인 세속 권위와 심판의 한계

베드로전서의 관점: 베드로전서는(2:13-17) 안정적인 세속 권위를 보여준다. 여기서 유대인은 이방인 혹은 거류민으로 등장하며, 이방인은 터주대감으로 유대인을 받아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 은총: 이들의 토대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며, 은총 가운데 세속 권위와 존속하고 있다.

세속 권력의 한계: 하지만 세속 권력자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중재자가 될 수 없다

심판의 부합: 세속 권력의 심판 같은 국가의 활동이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한다면(예를 들어, 무고한 자를 보호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한다면)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탈정치화 경계: 존 하워드 요더는 이와 견해를 같이하는 듯 보이지만 반대되는 묵인이나 무저항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태도들은 정치신학을 탈정치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투쟁적 권위 획득과 요한계시록의 갈등

갈등의 시작: 이제 투쟁적 권위 획득에 대해서 알아볼 때이다. 세속 권위와 신적 권위가 갈등을 빚기 시작하며, 이는 요한계시록에 자주 등장한다.

묵시와 십자가: 요한의 과제는 당시 묵시적인 설명들을 하나님 목적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연결짓는 것이었다.

역사의 시작: 먼저 봉인된 두루마리가 어린양의 죽음을 계기로 열리기 시작하는데, 이는 역사를 시작하는 열쇠로서 예수를 가리킨다.

재앙과 심판의 시기: 이 역사는 인간의 죄가 가득한 재앙의 시간이며, 역사는 심판의 시기를 맞는다. 정의를 요구하는 기도가 빗발치고 배교자와 성도들의 대결이 절정에 달하며, 이 대결은 결국 도시의 멸망으로 치닫는다.

짐승의 등장 (제국의 상징):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자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며,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자 교회를 핍박하고 무저갱에서 두 짐승을 불러낸다. 이는 제국의 등장을 상징한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 적그리스도이며, 사탄은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땅에서 나온 짐승: 거짓의 영이며, 거짓 선지자이다. 제국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충성하게 만드는데, 우리는 이것을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이는 정치적 교리를 종교적으로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옛 창녀와 심판: 여기에 옛 창녀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타고 등장하는데, 이 역시 적 그리스도이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다.

거룩한 공동체와 권위의 확장

박해를 견딘 도성: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박해를 견뎌낸 큰 도성은 단 하나이며, 이 도성은 사탄의 공동체와 하나이다. 요한은 이 도성이 거룩한 도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공동체: 참된 보좌가 하나이고 거룩한 공동체도 오직 하나이며, 교회는 그 공동체와 다름이 아니다.

권위 유형의 결론: 세속 권위는 신적 권위와 균형을 이루어가는 경우와 첨예한 갈등 끝에 신적 권위로 통합되는 두 유형을 모두 보았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든 유형의 결론이었다.

통치의 확장: 교회의 권위, 그리스도의 승리,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에서 온 인류로, 교회에서 사회로 확장되어지는 것이다.




4. 오도노반의 권위 개념


올리버 오도노반에게 권위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이끄는 창조 질서의 내재적인 힘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만 자연적 권위와 심판 기능을 수행하는 정치적 권위로 구분된다. 그의 권위 개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인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세상에 입증한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로마 제국의 폭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권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새로운 통치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역설적인 승리이다. 부활은 이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증하며, 세상의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봉사하거나 심판받는 위치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권위의 본질: 자유를 가능케 하는 내재적 질서

창조 질서의 일부: 오도노반에게 권위는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끄는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이다.

내재적 힘: 이는 권위가 외부의 억압적인 힘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내재적인 힘이라는 의미이다.

자유의 조건: 권위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훈육처럼 진정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권위의 원천과 종류: 하나님과 심판의 기능

궁극적 원천: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만, 이는 특정 개인이나 기관에 직접 부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위를 내재시킨 창조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권위의 구분: 오도노반은 권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자연적 권위: 연륜, 지혜, 아름다움, 공동체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권위이다.

정치적 권위: 법과 제도, 정부를 통해 '심판(judgment)'을 수행하는 권위이다.

심판의 기능: 정치적 권위는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이며, 이는 단순한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는 '심판'의 기능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권위: 새로운 통치 질서

부활의 중요성: 오도노반 권위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는 부활을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세상에 입증한 사건으로 본다.

세상 권위의 종속: 이 사건을 통해 모든 세상 권위가 결국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역설적 승리: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폭력적인 권위에 굴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힘과 폭력에 기반한 세상 권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부활을 통해 사랑과 희생의 새로운 통치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역설적인 승리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의미

가장 강력한 저항: 오도노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단순한 패배나 굴복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 권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역설적인 승리였다.

통치 질서의 전복: 예수님은 물리적인 힘으로 맞서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의 통치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이것은 세상의 권위가 더 이상 '폭력'에 기반하지 않고,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새로운 통치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이다.

부활의 확증: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증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부활은 세상의 어떤 권위도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도노반에게 부활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현실 세계에서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다.


세상 권위와 그리스도 통치의 관계

경쟁 상대가 아님: 오도노반에게 세상 권위는 그리스도 통치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심판 아래의 위치: 세상 권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위해 봉사하거나, 그 통치에 의해 심판받는 위치에 놓여 있다.

폭로와 주권: 십자가 사건은 세상 권위의 한계와 오만을 폭로하고, 부활은 그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폭력적인 세상 권위에 무릎 꿇은 것이 아니라, 그 권위의 본질을 드러내고, 새로운 차원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올리버 오도노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세상 권위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0. 나오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와 신학에서 연속성 및 단절이라는 핵심 논쟁을 야기하였다. 사도교회는 자신들의 선포가 예수의 선포와 연속선상에 있다고 주장한 반면, 일부 학자들은 부활 이후 성령의 내주하심을 근거로 단절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예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예수론'과 신론적 관점을 아우르는 '기독론'으로 나뉘며, 복음서 역시 공관복음이 부활과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와 부활의 예수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예수의 강림, 수난, 회복, 승천은 모두 그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는데, 특히 강림의 겸손은 수난의 겸손으로 이어져 하나님과 인류를 동시에 대표하는 이중적 대표성을 확증하였다. 그의 수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승천은 대관식의 이미지로 표현되어 그의 통치적 권위를 상징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에서 온 인류로, 교회에서 사회로 확장되는 것이다.


올리버 오도노반은 권위를
인간의 자유를 이끄는 창조 질서의
내재적 힘으로 정의하며,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는 권위를 연륜 등에서 나오는 자연적 권위와 법과 제도를 통해 '심판'을 수행하는 정치적 권위로 구분하였다. 오도노반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입증된 결정적 사건이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폭력에 대한 패배가 아닌, 힘에 기반한 세상 권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새로운 통치 질서를 선포한 역설적 승리이며, 부활은 이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권위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경쟁하는 상대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위해 봉사하거나 심판받는 위치에 놓여 있으며, 이 통치의 확장은 로마서가 보여주는 세속 권위와의 균형적 협력과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투쟁적 승리의 두 가지 유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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