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와 포용_미로슬라브 볼프_3장 포용
배제와 포용을 읽으면서 볼프의 마음이 조금 더 이해가 간다. 죽이고 싶은 가해자를 어떻게 처단할까를 생각하는 과정이 사실 ‘지옥’이라는 것, 복수를 다짐하고 그 복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 사실은 ‘아직도 가해자에게 가해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더 나아가 가해자에게 똑같이 가해를 하는 사람은 이제는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 이렇게 말하는 볼프는 얄밑고 또는 이상주의자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품고 살아가다보면 여전히 가해자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순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래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제는 분노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가해자를 용서하고 잊어 버리자고 단순히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영향력을 벗어나는 것은 ’자유주의’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나는 포용하고 더 나아가서 포옹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그리스도인은 꼭 용서를 해야하는 걸까? 이런 고민들을 가지고 볼프의 고민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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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로슬로브볼프의 ‘배재와 포용‘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철학적 주체의 문제를 다루어보자. 동일성, 타자성, 그리고 근대성이라는 단어들이 자주 언급되는데, 볼프가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단어들을 썼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동일성 철학의 본질과 주체 중심 사유의 폭력성에 대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동일성 철학은 서구 사상의 깊은 뿌리이며, 볼프의 포용 신학이 비판하는 철학적 기반이다. 이 철학은 서양의 존재론이 전체성과 동일성의 사유에 근거하여 수립된 것으로 간주된다. 즉,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 등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폐쇄적인 순환의 특성을 가지며, 동일성의 체계는 외부를 허용하지 않고 자신 안에 갇혀있는 자기 완결적 구조이다.
이러한 동일성 철학은 곧 주체 중심의 철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고대 철학의 실체(substance)를 대신하여 근대적 사유의 모든 중심에 주체(subject), 즉 나/자아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적 주체는 "사유하는 나"를 확실하고 명증한 인식의 주체로 설정하여 모든 사유 작용을 자아로 수렴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자아는 자신의 외부를 임의로 지배하고 점유하는 고립되고 홀로 있는 인간이 되었으며,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유의 근간이 되었다. 이 주체 철학은 정치적, 국가적, 역사적으로 식민주의, 인종주의, 성차별 등의 타자 억압의 결과물을 낳았으며, 자연을 객체로서 정복하고 처분하는 인간 중심적 주체성으로 인해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타자성의 철학이르는 주제로 넘어가보자. 볼프는 배제를 실행하는 주체는 고립된 주체라고 말하면서 닫힌 주체를 넘어 무한으로 넘어가는 것이 바로 ’포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자성의 철학은 자아 중심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동일성 철학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시도이다. 닫혀있는 동일성의 체계와 달리 타자성은 '외부'를 향해 열려 있으며, 그 외부가 바로 '타자'(other) 또는 '타자성'(otherness)이다. 타자는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타인'만을 의미하는 인간학적 개념을 넘어서, 주체 밖의 대상, 인간 밖의 자연, 혹은 행성과 같은 존재론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타자철학은 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비극의 근본 원인을 자아 중심적 주체성에 기반한 전체주의적 사고에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타자성의 철학은 타자를 주체의 틀 안으로 흡수하고 동일화하는 전체주의적 사유에 대항하여, 타자가 타자로서의 고유성(이타성, alterity)을 상실하지 않고 출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주체에게 저항할 수 없는 자명한 현현으로 다가와 무한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타자를 인식과 노동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기존 철학의 폭력성을 깨뜨리고 책임성을 요청하는 사유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근대적 주체의 '포함'(Inclusion)과 그 비판적 의미
근대적 주체는 자기와 다른 것, 이질적인 대상을 주체라는 동일자로 환원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다. 근대는 자기와 다른 것을 자기 안으로 포섭하며, 자신의 개념 체계에 포섭되지 못한 미지의 것을 자신 바깥에 남겨두는 것을 참지 못하는 특성을 지닌다.
볼프가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포함'(inclusion)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파괴적 전략을 지칭한다. 포함의 실체란 단순히 배제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배제된 대상을 동일자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흡수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타자를 배제하기 위한 근대성의 은폐된 전략이며, 사실상 배제의 동전의 양면이다. 이러한 포함은 결국 지배와 복속을 만들어 낸다. 포함은 타자에 대해 주체에게로의 동일화를 꾀함으로써 (타자의 발전과 진보를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지배와 복속을 꾀하는 식민지배를 위한 제국주의적 전략인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 엔리케 뒤셀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이 "나는 정복한다(ego conquiro),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근대성의 탄생을 알린 사건이며, 근대성의 진보 신화가 비유럽 타자를 야만적으로 정복하고 식민화한 역사를 '빛의 확산'이라는 신화로 정당화한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
볼프의 대안
볼프는 나와 타자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흡수하거나 동일화해서도 안 되며, 분리하거나 배척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며 진정한 포용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포용이라는 단어는 포함이랑 다르다.
포용은 두 팔을 벌려서 타자를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먼저 ’타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된 다음에서야 가능한 행위이다. 타자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질려면 그 안에 미리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리고 나서, 타자를 용서하는 데 까지 넘어간다.
그러면 타자에 대한 용서는 곧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두 팔을 벌려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포용‘이라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것이 볼프가 볼 때는 하나님이 미움과 분노를 끝내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보여주셨고 우리가 그의 제자라면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볼프가 보는 근대성의 문제
근대적 주체 중심의 동일성 사유 : 근대화의 근간이 되는 동일성 철학과 주체 중심 사유는 자아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자신과 다른 타자(The Other)를 지배하고 통일(환원)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폐쇄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낳아, 외부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주체의 개념 체계 안에 모든 것을 포섭하려 하는 오만함의 근원인 것이다.
'포함(Inclusion)'이라는 은폐된 배제 전략 : 근대화의 가장 기만적인 문제는 '포함'(Inclusion)을 배제를 위한 교묘한 전략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근대적 주체는 비유럽 세계의 타자를 물리적으로 배제하는 대신,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유럽의 가치와 종교(문화) 안으로 흡수하고 동일화함으로써 타자성을 파괴하였다. 이는 타자의 발전과 진보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지배와 복속을 꾀하는 제국주의적 전략에 불과하며, 배제의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폭력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논리 : 근대적 주체 중심의 사고는 타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정치적으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낳아 비유럽 세계의 타자를 정복하고 억압했으며, 자연을 객체로서 정복하고 처분하는 태도로 이어져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볼프는 근대화의 진보 신화 자체가 타자의 희생과 배제를 바탕으로 구축되었음을 비판하며, 타자의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 근대화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의 개념이자 나와 타인의 차이와 구별의 문제이다. 우리는 미국 시민권자, 기독교인, 여성, 교사 등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는 다원적(plural) 정체성으로 살아가며, 이 정체성들은 우리에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belonging)과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아마르티아 센은 인간은 이성적 추론과 선택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에 상대적인 우선순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정체성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을 관용적으로 만든다고 역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순기능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체성 의식은 연대감, 동료 의식, 자기 중심성을 뛰어넘는 사회적 자본이 될 수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통해 타인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정체성에 관련된 역기능과 폭력의 문제도 있다. 정체성은 동시에 폭력과 테러의 원인이 된다. 배타적 소속감과 특정 집단에 대한 강한 배타적 자기 규정은 다른 집단과의 불화와 분리됨의 느낌을 제공하며, 배타적 정체성에 의한 연대의식은 집단 간의 살인, 폭력, 광기 어린 행동을 초래하는 메커니즘이다. 특히 종교 정체성이 절대적인 것으로 지각될 때, 인간의 다른 모든 범주를 넘어서는 특권을 가지게 되면서 국가와 문화 간의 치명적인 충돌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는데, 볼프는 초대교회의 정체성이 이방 세계와 구별하는 부정적인 행위와 독특한 것에 충성하는 긍정적인 과정을 통해 확립되었다고 본다. 베드로전서의 권면처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도 문화 적응을 모색하는 이 정체성은 결국 타인에 대한 배척이 아닌 온건한 차별성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정체성에 관련된 다른 이론들
심리사회적 정체성 이론 (에릭 에릭슨) : 이 이론은 개인의 생애 발달 과정에서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관점이다. 특히 청소년기를 개인이 다양한 역할과 가치를 탐색하며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겪는 중요한 시기로 본다. 에릭슨에 이어 마샤(James Marcia)는 위기(탐색)와 전념(헌신)의 유무에 따라 정체성 성취, 유예, 유실, 혼란의 네 가지 정체성 지위를 구분하였으며, 성공적인 정체성 확립은 자아의 연속성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확신을 통합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사회 정체성 이론 (앙리 테쉬펠 & 존 터너) : 이 이론은 정체성이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회 심리학적 관점이다. 개인은 '개인 정체성' 외에 '사회 정체성'을 가지며, 자신이 특정 내집단(In-group)의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그 집단에 정서적으로 소속감을 느낄 때 정체성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집단을 외집단(Out-group)과 비교하여 긍정적인 사회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며, 이 과정이 집단 간의 차별과 편견을 설명하는 핵심 기제가 되는 것이다.
상징적 상호작용론 (찰스 쿨리 & 조지 허버트 미드) : 이 이론은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협상된다고 본다. 쿨리의 '거울 속의 자아(Looking-glass self)' 개념처럼, 개인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지각하고 그에 따라 형성된 자신에 대한 판단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미드는 자아가 타인의 역할을 수용하고 사회 전체의 기대를 내면화한 '일반화된 타자'를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으며, 정체성은 이러한 상징적 소통과 역할 수행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서사 정체성 이론 (폴 리쾨르) : 서사 정체성 이론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Narrative)' 형식으로 구성하고 통합함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리쾨르는 정체성을 변하지 않는 속성(동일성, Idem Identity)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되는 일관성(자기성, Ipse Identity)으로 구분하였다. 개인은 자신의 과거 사건들 중 의미 있는 것들을 선택하여 일관성 있는 자서전적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 '자기 서사(self-narrative)'가 곧 자신의 정체성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교차성 이론 및 다중 정체성 관점 (킴벌리 크렌쇼) : 이 관점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인은 성별, 인종, 계층, 성적 지향 등 여러 다양한 정체성 범주를 동시에 지니는 다중 정체성의 주체인 것이다. 특히 크렌쇼가 주창한 교차성(Intersectionality) 이론은 이러한 정체성 범주들이 단순히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교차하는 지점에서 차별과 억압이 새롭고 독특한 양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볼프가 보는 타자성의 철학이 기반된 정체성
닫힌 주체성의 극복과 '공간 마련' : 타자성의 철학은 자아 중심적인 폐쇄적인 동일성 체계를 비판하며, 타자(The Other)를 '외부'로서 인정하고 주체에게 무한한 요구를 던지는 존재로 설정하는 것이다. 볼프는 이를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자신 안에 타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이는 타자를 나의 개념 체계나 가치 안에 동일화하거나 포섭(inclusion)하려는 근대적 주체의 폭력성을 거부하고, 타자가 타자로서의 고유성을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도록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간 마련의 궁극적인 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내주(Perichoresis) 개념이며, 하나님이 자신 안에 원수가 된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신 것처럼 우리도 타자를 위해 자기 공간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용서와 포옹을 통한 '관계의 우선성' : 타자성의 철학은 도덕적 규칙이나 행위보다 관계를 우선시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볼프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이를 설명하는데,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고백이나 도덕적 공적을 요구하기 이전에 달려가 끌어안은 행위는 규칙보다 관계가 우선한다는 신학적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타자성의 철학이 요구하는 이타성(alterity)은 주체가 타자에게 책임을 지고 응답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이어지며, 볼프에게 이는 '용서(Forgiveness)'와 '포옹(Embrace)'의 행위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용서는 복수의 회오리에서 벗어나 타자를 '함께 죄인된 인간 공동체'로 다시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포옹은 그 타자를 나의 적이 아닌 사귐의 대상으로 회복하려는 의지적인 행동인 것이다.
정체성의 재구성: 고정성에서 역동성으로 : 타자성의 철학은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볼프는 타자를 흡수하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맺는 '다시 팔 벌리기'의 포옹 단계를 통해 타자의 '타자성(otherness)'이 보존될 수 있도록 정체성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를 배제하는 배타적 집단 소속감으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작용과 열린 태도를 통해 끊임없이 재조정하며, 타자성이 나의 정체성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열린 정체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볼프는 배제에서 포용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네 가지 핵심 계기가 있다고 제시한다. 첫째,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둘째, 기억의 치유이며, 셋째와 넷째는 회개와 용서이다. 특별히 회개는 억압하는 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으로, 희생자가 원수에 대한 미움과 시기, 적대감에 몰두하는 태도에서 돌이켜야만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희생자의 회개는 압제자들을 모방하거나 비인간화하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그들을 인간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집에 질서에 대한 무기력함이 아닌 변혁의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를 복수의 회오리 속에 가두는 복수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진정한 용서는 기억에 남은 과거의 힘을 깨뜨리고 정의에 대한 확신에 찬 주장을 초월함으로써 복수의 회오리를 멈추게 만든다.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이들에게 분노는 하나님 앞에 꺼내 놓아야 할 자리이며, 하나님 앞에서 불의에 대한 분노는 궁극적으로 용서로 바뀌고, 용서는 다시 모두를 위한 정의를 찾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용서는 우리도 죄인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원수를 비인간성의 영역에서 공통된 죄인들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행위인 것이다.
포용의 신학적 기반과 네 가지 구성 요소
용서가 포옹에 이르는 통로라면, 포옹은 그 절정이다. 볼프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두 팔을 벌리고 계신 모습이며, 자신 안에 가해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자기 개방의 정체성은 삼위일체의 상호 내주(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 개념에 근거하는데,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인류를 만들고 끌어안으신 두 팔로서, 삼위일체의 폐쇄적이지 않은 사랑이 원수가 된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포용의 마지막 행위는 상처와 악행에 대한 기억을 잊게 할 '기억하지 않기'의 은총이며, 지금 기억하는 것은 언젠가 망설임 없이 사랑하기 위해 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소망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포옹의 움직임은 네 가지 핵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순환적이고 끝이 없는 움직임이다. 첫째, 팔 벌리기는 타자에게 손을 내미는 초대의 몸짓이며, 자기 폐쇄적 정체성에 대한 불만족의 표현이다.
둘째, 기다리기는 자아가 욕망을 지연시키고 타자의 전개 선에서 멈추는 행위이다. 폭력은 포옹의 정반대이기에 타자에게 포옹을 강요할 수 없으며, 상호성 없이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신호이다.
셋째, 팔 모으기는 포옹 그 자체이며, 양쪽 모두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인 상호적인 주고받음이 일어난다. 이때 타자를 무너뜨리거나 동화시켜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배제라는 은폐된 권력 행위에 가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넷째, 다시 팔 벌리기는 타자의 참된 역동적 정체성이 보존되도록 타자를 놓아주는 행위인 것이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는 헬라어 peri (주위에, 둘레에)와 chōreō (길을 만들다, 공간을 만들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서로에게 공간을 내어주며 상호 침투하고 내주(相互內住)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본질(Essence)은 하나이되, 각 위격의 독특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고 완전히 조화롭게 공존하는 관계를 설명한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이 개념을 인간 관계와 윤리로 확장하여 적용한다. 볼프에게 페리코레시스는 '포용(Embrace)'의 궁극적인 모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세 위격 간에 완전한 상호 개방성을 통해 서로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었듯이, 인간도 자신의 닫힌 정체성(동일성)을 극복하고 타자(The Other), 심지어 원수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함을 제시한다. 페리코레시스는 타자성의 고유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열린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3가지 견해
자유주의적 자유 (Liberal Freedom) : 자유주의적 자유는 주로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에 중점을 둔다. 이는 외부의 강제나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을 핵심으로 하며, 국가나 타인의 개입 없이 개인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볼프는 이 자유가 개인 중심의 동일성 사유와 결합될 때, 타인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공동체적 책임을 간과하기 쉽다는 문제를 내포한다고 비판한다.
사회주의적 자유 (Socialist Freedom) : 사회주의적 자유는 주로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에 중점을 둔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자율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구조적 불평등이나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며, 사회적 평등과 연대를 통해 모든 구성원의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볼프의 관점에서는 이 자유가 공동선을 명분으로 개인의 다양성과 자유를 획일화하거나,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볼프가 주장하는 '용서를 통한 자유' : 볼프가 제시하는 자유는 윤리적-신학적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이 자유는 기존의 외부적, 구조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복수심과 증오라는 내적 속박(과거에 대한 포로 상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용서(Forgiveness)를 통해 실현되며, 용서를 통해 피해자가 과거의 상처에 묶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이는 타자를 배제하거나 지배할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까지도 포옹(Embrace)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볼프는 탕자의 비유를 포옹의 신학을 촉발시킨 이야기로 제시하며, 이는 적대감이라는 조건 아래서 우리가 서로를 끌어안는 방식에 대한 사회적 측면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분석한다. 둘째 아들의 떠남은 개별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원수로 만드는 배제 행위였다. 여기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도록 허락한 후에도 아들과의 관계를 놓아 버리지 않았음이 핵심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런 고백도 필요하지 않은 무조건적 용납을 통해 달려가 끌어안았는데, 이는 관계가 도덕적 공적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받을 유산을 다시 돌려주지 않고 가장 좋은 옷, 가락지, 신을 신기며 탕자의 정체성을 재구성했는데, 이는 아버지가 가정의 질서를 전적으로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계속해서 떠받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 질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추구하는 질서는 첫째 아들이 규정한 규칙 준수 여부에 따른 양자택일의 태도를 거부하며,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근본적인 규칙에 지배받는 것이다. 아버지는 질서를 파괴하기보다 끊임없이 재조정함으로써 그 질서가 배제의 질서가 아니라 포옹의 질서가 되도록 지켜나가는 것이다. 포용의 질서가 잡히기 까지 동생이나 형이나 서로 양자 택일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삶의 질서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이들에게는 양 극단의 거리가 멀 수록 더욱 쉽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타자를 악마화하는 것에 더욱 열을 올린다. 성경에서 나오는 아들의 태도는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아버지의 질서에서 멀어진 존재들이다.
첫째 아들의 배제적 태도와 비판
탕자의 귀환에 대한 첫째 아들의 태도는 아버지와 대조되며 내적 배제의 외적 신호를 보여준다. 그는 동생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경멸적인 뜻을 담아 동생과의 관계를 거부했고, 죄에 더럽혀진 동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재교정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더 바르게 행동했음에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모욕감과 함께, 삶을 파괴하지 않는 유익한 기본적인 규칙이 깨졌기 때문에 화를 냈다고 주장한다. 즉, 일하는 사람이 허랑방탕한 사람보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정의의 규칙이 왜곡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이 규칙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악마로 취급하는 태도를 구축했으며, 이는 양극성을 조장한다. 그는 자신이 재산의 3분의 1을 상속받는 사람으로서 일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동생에게 하지 않은 악까지 투사하는 편파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의 고정된 규칙과 안정적인 정체성의 세계는 아버지가 관계의 우선성을 통해 불안정하게 만드는 세계였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규칙과 주어진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고 아들들에게 관심을 집중하며, 두 아들의 복잡한 삶이 고정된 규칙에 의해 규제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사랑으로 포옹의 질서를 지켜 나가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의 정서가 깊다. 우리 부모님만 보아도 한이 많아서 원한까지 간다. 니체가 말하는 르상티망 즉, 원한을 가지고 살아간다. 피해자로 평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에 꽂힌다. 왜 그 때 그 일을 막지 못했을까? 왜 가해자들은 발을 쭉 뻗고 자는데 피해자들은 항상 문제에 갖혀서 살아야하는가? 이런고민이 시들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볼프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다르게 걸어가라는 명령처럼 들린다.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를 넘어서 다른이들을 품고 더 깊고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사실 아직도 쉽지 않다. 머리로는 설득이 되는데 마음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더욱 고민을 해봐야겠다. 마음공부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음주에 다시 들르자. 삼위일체가 초대하는 페리코레시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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