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프랑스에서 사회학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_19세기 프랑스철학

by 낭만민네이션

0. 들어가기


오늘은 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에서 19세기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들을 알아보려고 한다. 푸리에, 생시몽, 콩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활동한 19세기 초 프랑스는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변혁과 혼란이 뒤섞인 시기였다. 이들이 등장한 사회적 분위기는 크게 두 가지 주요 사건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산업혁명에 등장과 그에 따른 사회문제였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여 글을 남기듯이, 철학은 현실을 반영하여 분석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의미의 집을 만들며, 미래에 대안을 고민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한다. 19세기 러시아의 문학의 시대의 고민들을 제안했다면, 19세기 프랑스철학은 오히려 새로운 변화에 관한 대안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은 푸리에, 생시몽, 콩트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는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자들의 대응을 알아보자.


정치적, 사회적 혼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의 오랜 봉건 체제와 왕정, 그리고 종교적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혁명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대신,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정,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전쟁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기존 사회의 규범과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명확한 대안이 없자,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졌다. 생시몽과 콩트는 바로 이러한 혼란을 목격하며 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이들은 단순한 정치적 혁명으로는 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회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원리로 재조직할 방법을 모색했다.


산업 혁명과 새로운 문제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산업 혁명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했다. 공업화와 기술 발전은 막대한 부를 창출했지만, 그 이면에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 자리 잡았다.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생활 조건에 시달렸고, 전통적인 공동체와 가족의 유대는 약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열과 인간 소외 현상은 푸리에와 같은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푸리에는 산업 문명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불행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며, 산업화의 문제점을 해결할 이상적인 공동체 모델을 제시하였다.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갈망

따라서 이 세 사상가가 활동한 시대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붕괴되고, 과학과 이성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던 과도기였다.

그들은 단순히 철학적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생시몽은 과학과 산업이 이끄는 새로운 사회를, 푸리에는 인간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콩트는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통해 인류를 이끌고자 했다.

이들의 사상은 모두 혼란스러운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조화'를 찾으려는 열망의 산물이었다.



1. 푸리에와 푸리에주의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는 유토피아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를 대표하는 19세기 프랑스 사상가이다. 그는 자본주의 문명을 통렬히 비판하며,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지 않고 모든 욕망을 해방시켜 사회적 조화(Harmony)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 개혁 운동을 푸리에주의(Fourierism)라고 부른다.


푸리에주의의 핵심: '정념론'과 문명 비판

푸리에 철학의 근간은 '정념론(Theory of Passions)'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정념(욕망, 감정)이 신성한 선물이며, 본래 선하고 조화로운 것이라고 믿었다.

푸리에는 인간의 정념을 다섯 가지 감각적 정념, 네 가지 친화적 정념(우정, 사랑, 가족애, 야망), 그리고 세 가지 분배적 정념(음모, 다양성, 합병) 등 총 12가지로 분류했다.

그는 이 정념들이 억압받을 때 사회적 불화와 갈등이 발생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당시의 자본주의 문명이 인간의 정념을 억누르고 개인을 소외시켜 불행과 불평등을 낳는다고 비판했다.

푸리에에게 진정한 사회는 인간의 모든 정념을 자유롭게 발현시키고 조화롭게 만드는 곳이었다.


이상 공동체: 팔랑스테르(Phalanstère)

푸리에가 제시한 정념론의 실질적인 적용 모델이 바로 팔랑스테르(Phalanstère)라는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팔랑스테르는 약 1,620명으로 구성된 자급자족적인 공동 거주 및 노동 단위를 일컫는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단순히 주거 공간을 넘어, 모든 생산과 소비가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였다.

팔랑스테르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능력과 욕구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교육, 문화, 오락 시설 등이 함께 갖추어져 있었다.


이상적인 노동: '매력적인 노동'의 원리

팔랑스테르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매력적인 노동(Attractive Labor)'의 원리이다. 푸리에는 산업 사회의 강제적이고 지루한 노동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팔랑스테르에서는 노동을 의무가 아닌 즐거움으로 바꾸기 위해 다음 원칙들을 적용했다.

첫째, 각자의 정념에 맞는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모든 구성원들이 여러 종류의 일을 단시간씩 순환하며 지루함을 없애고 다양성을 추구했다.

셋째, 모든 노동은 공동체의 이익과 직결되어, 개인의 만족이 공동의 행복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푸리에에 따르면,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노동의 효율성과 생산성은 자연스럽게 극대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푸리에주의의 유산과 한계

푸리에의 사상은 19세기 중반 미국과 유럽에서 실제로 여러 팔랑스테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동체는 자금 부족, 내부 갈등, 그리고 비현실적인 운영 방식 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그의 사상은 종종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리에는 인간의 심리와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사상은 이후 협동조합 운동, 여성 해방 운동, 그리고 생태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끼쳤으며, 사회 조직에 있어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을 넘어 인간의 정서적, 심리적 만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선구적인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시몽과 생시몽주의 그리고 생시몽주의자들


앙리 드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은 19세기 프랑스 사상가이자 사회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적 사회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사상은 '생시몽주의(Saint-Simonianism)'라는 강력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이후의 사회학, 사회 계획, 그리고 기술 관료제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생시몽 철학의 핵심: '산업주의'와 사회 재편

생시몽의 철학은 '산업주의(Industrialism)'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한다. 그는 기존의 봉건적이고 군사적인 사회가 몰락하고 새로운 산업 사회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시몽은 사회를 두 계급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봉건 귀족, 군인, 성직자 등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기생하는 계급'이고, 둘째는 생산적이고 유용한 활동을 하는 '산업가(industriels)' 계급이었다.

여기서 '산업가'는 단순히 공장주를 넘어 과학자, 기술자, 예술가, 은행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노동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는 이 '산업가'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생산력을 극대화하여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러한 엘리트 집단이 과학적 원리에 따라 사회를 관리하는 것을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라고 부른다.


'새로운 기독교'와 도덕적 기반

생시몽은 초기에는 과학과 합리성을 강조했지만, 말년에는 사회를 통합할 새로운 도덕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새로운 기독교(New Christianity)‘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

이 새로운 종교는 기존의 교리나 의식을 거부하고, "모든 사회 제도는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의 도덕적, 물리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간단명료한 도덕률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는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빈곤층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최고의 도덕적 사명으로 간주했으며, 과학적 산업주의에 도덕적 목표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생시몽주의자들: 사상의 급진화와 실험

생시몽이 사망한 후, 그의 추종자들인 생시몽주의자들은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급진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바르텔레미 앙팡탱(Barthélemy Enfantin)과 생타망 바자르(Saint-Amand Bazard)는 생시몽주의를 하나의 조직적인 운동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상속 제도를 폐지하여 개인의 부가 대를 이어 세습되는 것을 막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며,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와 역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실제로 여러 실험 공동체를 운영하며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내부 갈등과 외부의 비판으로 인해 결국 해체되었다.


생시몽주의의 유산과 영향

생시몽주의는 비록 운동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서구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셍시몽의 사상은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과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기술 관료제와 사회 계획의 개념은 현대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정책 수립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비록 일부 추종자들의 과격한 행동과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사회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하여 모든 사람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선구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3. 어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푸리에와 생시몽의 시대를 지나가면 드디어 사회학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어귀스트 콩트에 이르게 된다. 콩트 철학의 핵심은 ‘실증주의’를 사회적 영역에서 확대하는 과정이다.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19세기 프랑스 철학 이전까지 주로 ‘개인의 의미와 생각, 사유의 방식’을 넘어선다. 콩트는 개인의 사유를 넘어 근대 사회과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부분에서 철학과 사회학에서 주요한 현대의 철학자이다. 콩트의 철학은 흔히 알려진대로 실증주의(Positivism)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모든 지식이 초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설명 대신, 관찰, 실험,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콩트 이전의 철학이 주로 '무엇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본질적 질문에 초점을 맞췄다면, 실증주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현상적 질문에 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콩트는 이러한 실증적 접근법을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콩트는 당시의 혁명과 혼란으로 인해 무질서해진 서구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학문이 바로 사회학(Sociology)이며, 콩트는 이 학문의 창시자로 불린다. 더 정확히는 ‘사회과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콩트 시대에는 자연과학의 발달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는나 콩트처럼 바로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콩트의 방식은 말그대로 양 쪽 진영의 이단아였다. 콩트는 오늘날로 치면 ’시스템 사고‘와 같이 사회를 유기체로 보았고, 사회의 정태적 질서와 동태적 진보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콩트는 사회학을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이라고 부르며, 자연과학처럼 사회도 엄밀한 법칙을 통해 연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전까지 존재를 움직이던 뉴턴의 물리학과 새롭게 등장하는 과학적인 발전들을 사회에 적용하려고 했다.


콩트는 인류의 지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콩트가 말하는 역사의 삼단계의 법칙(Law of three stages)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칙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개인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사회 전체의 조직 문화를 연결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략적으로 콩트는 3단계로 나누었다.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콩트의 삼단계 법칙은 단순히 역사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종의 사회 개혁론이기도 하다. 그는 법칙을 통해 사회의 무질서를 극복하고, 과학적 합리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신학적 단계(Theological Stage):

특징: 이 단계는 인류 지성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모든 현상, 심지어 자연 현상까지도 신, 정령, 또는 초자연적 존재의 의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번개는 신의 분노이고, 풍작은 신의 축복으로 해석된다.

이 단계는 페티시즘(Fetishism), 다신교(Polytheism), 일신교(Monotheism)의 순서로 발전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초자연적 힘에 의존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사회 조직: 이 시기에는 물리적 힘과 종교적 권위를 가진 군인과 성직자가 사회를 지배한다. 모든 사회 질서와 도덕률은 신의 명령에 의해 정당화된다.


형이상학적 단계(Metaphysical Stage):

특징: 이 단계는 신학적 단계에서 실증적 단계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추상적인 힘이나 본질, 원리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자연의 본성', '이성', '생명력'과 같은 개념들이 사용되지만, 이는 여전히 관찰 가능한 현상 너머의 비물질적 실체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와는 다르다. 이는 일종의 '세속화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조직: 이 시기에는 신학적 권위가 약해지고 법률가와 철학자가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그들은 추상적인 권리와 정의의 개념을 통해 사회 질서를 재편하려 노력한다.


실증적 단계(Positive Stage):

특징: 콩트는 이 단계를 인류 지성 발전의 최종이자 가장 완전한 형태라고 보았다. 이 단계에서는 초자연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설명이 완전히 배제된다. 모든 지식은 엄격한 관찰, 실험, 그리고 논리적 분석을 통해 얻어지며, 이를 바탕으로 현상 간의 불변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과학적 지식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며, '왜'라는 본질적 질문 대신 '어떻게'라는 현상적 질문에 답하는 데 집중한다.

사회 조직: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갖춘 과학자와 산업가가 사회를 이끌게 된다. 콩트는 이들이 사회의 문제점을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해결함으로써 인류의 진보와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콩트의 주제 feat. 에밀브레이너

사회과학 없는 과학적 정신의 무용성, 심지어 유해성

과학의 완전한 위계질서 없는 사회과학의 불가능성

사회의 자연에 관한 두 이론 : 하나는 사회를 개체들의 부스러기로 환원하고, 다른 하나는 개체들을 초월하는 사회적 실제성들을 인정한다.

진보의 주제 : 정태적 자격을 정당화한다.



4. 지적개혁과 실증과학들


콩트에게는 새로운 과학으로서 ‘사회학‘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특히 지적개혁의 작업으로 기존의 학문들을 ’사회학’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하고 실증적 과정을 통해서 통합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증과학들의 내용과 형성과학들, 수학, 천문학, 생물학에서 콩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콩트가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푸리에는 ‘열에 대한 수학적 이론‘을, 뀌뷔에는 생명의 자연에 관하여, 쉬브뢸은 유기화학의 영역에서 실증주의의 발판을 만들었다. 과학의 개념작업을 그가 지적 개혁을 생각하는 방식에 연결하여 “인간의 두뇌를 외적 질서의 정확한 거울”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보면 지성은 외부에서 스스로 모델을 삼으면서 실재성들을 분류하는 근본과학들을 정리한다. 순서대로 그리고 역사적인 발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실재성의 6가지 과학들

수학들은 양을 연구하며, 가장 비규정적인 실재성을 연구한다.

천문학은 그 힘에 질을 첨가하고, 질적으로 다른 힘들이다. (갈릴레이)

물리학은 그 힘에 질을 첨가하고, 질적으로 다른 힘들이다. (갈릴레이)

화학은 질적으로 구별된 물질들에게로 깊이 들어간다. (라브와지에)

생물학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조직화로부터, 존재들 일체를 다시 연결하는 사회를 연구했다.

사회학은 정태론과 사회적 역동론으로 구분된다.


콩트에게 사회학(Sociology)은 단순히 새로운 학문 분야를 넘어, 인류 지성 발전의 최종 단계인 실증주의를 사회 현상에 적용하여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 진보를 이끌어낼 궁극적인 과학이었다. 그는 사회학을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이라고 부르며, 자연과학처럼 엄격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사회 현상의 불변하는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깐 사회학은 실증주의의 정점이었다. 콩트는 앞서 살펴본 대로 인류의 지성이 신학적,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실증적 단계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지식의 발전을 '과학의 위계(hierarchy of sciences)'로 체계화했는데,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수학을 시작으로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과학적 지식의 총합이자 정점에 있는 학문이 바로 사회학이었다. 그는 사회학이 인류 사회의 가장 복잡한 현상을 다루므로, 다른 모든 과학의 지식을 종합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콩트에게 사회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인류 지성의 완성이자 실증주의 철학의 최종 목표 그 자체였다. 오늘날과 다른 사회학의 시작점을 볼 수 있다. 사회학은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를 총합하고 국가와 개인의 사이에서 이 둘을 종합하는 완전한 학문이었던 것이다.


사회학의 목적_사회적 혼란의 치유

콩트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극심한 사회적, 정치적 혼란기였다. 그는 기존의 종교적, 왕권적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 사회가 무질서와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이성' 또한 파괴와 비판만을 남겼을 뿐, 새로운 사회 질서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았다. 콩트는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정신적 토대가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학이 탄생한다. 콩트에게 사회학은 비판과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 통합과 건설의 도구였다. 그는 과학적 지식을 통해 사회 현상의 객관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이는 단순히 '알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행하기 위한' 지식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과학자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사회가 구체제와는 다른,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도덕과 질서를 확립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회 정학과 사회 동학: 사회 분석의 두 축

사회 정학(Social Statics):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는 마치 유기체의 해부학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기관들(가족, 종교, 국가 등)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상호 의존하며 전체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지를 탐구한다. 콩트는 가족을 모든 사회의 기본 단위로 보았으며, 언어와 종교를 사회적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로 간주했다. 그는 사회 정학이 없으면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며, 질서가 진보의 전제 조건임을 강조했다.

사회 동학(Social Dynamics):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는 유기체의 생리학처럼, 사회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탐구한다. 콩트에게 사회적 진보는 곧 삼단계의 법칙을 따르는 지성적 진보와 동일했다. 군인과 성직자가 지배하는 신학적 단계에서 법률가와 철학자가 주도하는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과학자와 산업가가 이끄는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사회 동학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 두 분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사회 정학이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설명한다면, 사회 동학은 그 구조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준다. 콩트는 사회학을 통해 인류가 단순한 지성적 진보를 넘어,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인류애(altruism)'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5. 푸르동과 아나키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아나키즘(Anarchism)의 아버지라 불리는 19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1809년 프랑스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소 견습생으로 일하며 노동 계급의 삶을 직접 경험했다. 이는 그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모든 형태의 권위, 특히 국가와 자본주의적 소유를 맹렬히 비판하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아나키즘)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프루동의 아나키즘과 핵심 명제: '소유는 도둑질이다!'

프루동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명제는 바로 "'소유는 도둑질이다(La propriété, c'est le vol!)"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개인의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소유(Propriété)'와 '점유(Possession)'를 명확히 구분했다. 소유는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여 얻는 이자, 지대(rent), 이윤과 같은 불로소득을 발생시키는 거대 자본이나 생산수단에 대한 독점을 의미한다.

이는 불평등과 착취를 낳는 비도덕적인 소유이며, 바로 이러한 '소유'가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에 비해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그 차액을 자본가가 독식하는 구조를 비판했다.

반면, 점유는 개인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이나, 자신이 직접 거주하고 사용하는 주택, 도구와 같이 타인의 착취와 무관한 소유를 의미한다.

프루동은 이러한 '점유'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모든 개인이 자신의 노동으로 정당하게 얻은 것을 소유할 권리를 인정했다.

결국, 프루동이 비판한 것은 "노동에 기반하지 않은 착취적 소유"였으며, 이는 그의 노동가치론(labor theory of value)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 체제는 본질적으로 도둑질이라고 보았다.


경제적 대안: 상호주의의 원리와 그 작동 방식

프루동은 국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는 국가가 또 다른 형태의 억압적인 권위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상호주의(Mutualism)였다. 상호주의는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자유로운 협동과 교환을 통해 사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생산수단을 소규모로 개인이나 협동조합이 소유하는 비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모델이었다.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물은 그 생산에 들어간 노동 시간에 비례하는 '공정한 가치'에 따라 교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교환 은행(Exchange Bank)'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이자를 받지 않고 노동 증서를 발행하여 화폐의 역할을 대신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로써 자본가가 이자를 통해 불로소득을 얻는 것을 철폐하고, 노동자들에게 온전한 가치가 돌아가도록 한다. 프루동의 상호주의적 모델은 국가와 자본가라는 두 가지 권위를 모두 배제하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가치를 온전히 소유하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정치적 대안: 중앙집권적 국가에 맞선 연방주의

경제적 대안으로 상호주의를 제시했다면, 정치적 대안으로는 연방주의(Federalism)를 내세웠다. 프루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억압"이라고 주장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는 해체되어야 하며, 대신에 다음과 같은 분권화된 공동체들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다.

이 공동체들은 지역 단위의 자치 공동체인 코뮌(Commune)이나 특정 산업 분야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한 작업장 연합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개별 공동체들은 필요에 따라 서로 느슨하게 연방을 형성하지만, 어떤 중앙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고 각자의 자율성을 유지한다.

이 방식은 권위적인 국가의 압제 없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다고 프루동은 주장했다.


프루동의 유산과 마르크스와의 대립

프루동의 사상은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한 축을 형성했다. 그는 처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존경을 받았지만, 마르크스가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사람은 맹렬한 논쟁을 벌였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사상을 '소부르주아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고, 이 대립은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갈래로 나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루동의 사상은 이후의 무정부주의자들(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반권위주의와 분권화에 대한 주장은 오늘날의 협동조합 운동, 리버테리언 사회주의, 그리고 분산 시스템(Decentralized Systems) 논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0. 나오기


19세기 프랑스는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산업혁명이 낳은 다양한 사회문제와 정치적 혼란이 만든 조직과 제도에 대한 고민들이 깊어졌다. 이 때 등장한 푸리에와 생시몽 그리고 콩트는 나름대로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정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했다. 류종렬 선생님의 강의는 언제나 플로티누스가 구분한 상층부로서 이상과 표층부로서 상징세계와 인간세계, 심층부로서 물질과 심리의 세계로 나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프랑스현대철학은 표층부의 이야기이다. 물론 들뢰즈로 가면 심층부로 내려 갔다가 표층부로 올라오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본 푸리에와 생시몽 그리고 콩트에 오면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종합학문으로써 사회학의 등장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사회학은 이후에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져서 아카데믹 사회학이나 비판사회학, 역사사회학 등 정수복 선생님의 책에서 볼 수 있듯이 각자의 길을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을 해야하는 이유는 종합학문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진단과 분석 그리고 그 대안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대안을 만들어보자. 이렇게 해서 류종렬 선생님과 함께하는 ‘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 2번째 시즌이 끝났다. 다음 시즌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 류종렬 선생님 수업을 혼자서 들었는데 그 덕에 아끼는 제자가 된 느낌이다. 뒷풀이도 혼자서 선생님과 하면서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문제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대응을 듣는다. 배운 만큼 대안을 만들어보아야지.



https://brunch.co.kr/@minnation/4380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