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와 시대
오늘은 아침에 시간을 내서 잠시 책을 읽고 글을 쓰러 왔다. 최근들어서 내 삶에 몰아닥친 일들은 이전까지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10년전만해도 나는 미래가 불안해서 안달났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밤바다 악몽처럼 찾아왔다. 고민으로 끝나지 않기 결국은 생각의 끝에 디스토피아로 끝나버리는 파국이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한 환경 자체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처버릴 것 같았다. 개천에서 용나는 건 불가능하고, 이제는 개천 물도 다 말라버리는 상황이라서 80년대 대한민국에서 저소득층 집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몇 가지의 제약사항 정도를 가지고 태어난게 아니라 아예 미래를 꿈꾸는 게 금지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연희동의 산동네에서 보낸 어린시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고, 자라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고착화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단 속에서 속해 있으면서 시대정신을 공유하면 대부분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 집단에서는 용서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자신만의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삶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일정한 시대가 안겨준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이런 사람들이 속한 집단과 그 집단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정체성은 이런 부분에서 보이지 않으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의 테두리가 정해지는 청소년기를 지나면 대부분 자신의 세계관을 스스로 돌아볼 수 없고, 돌아보더라도 다른 세계관과 경쟁하게 된다. 아주 간혹 자신이 마주친 새로운 사람과 배울만한 멘토들이 있다면 모를까. 나에게는 그것이 80년대생, 저소득층, 아이큐108의 무난한 성격이라는 요소였고, 17세가 되었을 때 외환위기가 왔다. 곧 이어서 911테러가 발생해서 세계가 경직되었다. 더욱이 2002년에는 노무현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주의를 처음 마주했고, 2008년이 되니깐 경제가 폭삭 주저 앉는 느낌이었다. 그 가운데 대학을 가까스로 가서 졸업은 했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 사람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나,
김종욱 찾기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저항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으로. 그렇게 시대가 주는 매일매일의 양식을 받아 먹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 일하고 있는 곳까지 왔다. 10년전. 그리고 그 때의 그 발버둥은 오늘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아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헛발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욕망들을 잠재우는 것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체제가 되어서 계속해서 재생산을 해 나가는 체제 속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삶에 나의 삶이 투사되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더 이상 가난과 아픔을 겪지 않은 시스템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깐 자연스럽게 방향은 정해졌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도움을 줄려면‘ 나는 어떻게 공부해야할까? 무엇을 공부해야할까? 그래서 시작한게 ‘청소년 멘토링’이었고, 그래서 시작한게 ‘정치제도‘ 공부였다. 머지 않아서 멘토링은 자리를 잡아갔고 사람들을 만나서 진실로 친구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정치공부는 아직도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 대학원도 나오고 박사과정도 수료를 하게 되었다.
시대가 주는 메시지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인데, 오히려 이 시대를 나가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라, 배워서 남주라‘라는 것이었다.
비밀이라면 비밀인데, 잘 말하지 않은 비밀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다보면 인색해지게 되고 속이 좁아져서 보이는 것이 한정적이 된다. 세계는 계속해서 가상과 우주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데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관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곧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자신을 위해서 그어 놓은 관계의 선 안에는 이제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뭐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배워서 남주자라고 하는 나의 세계관 속에서는 지금이라도 이 글을 혹시나 보고 있는 사람이 ‘고민‘하는 중이라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고 해서 시작한게 브런치였다. 내가 배우고 있는 것들은 엄청난 것들이 ’나 이렇게 잘해’가 아니라 시간이 없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내가 이것을 배우고 있다면 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그럼 브런치에다 다 적어서 공유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글이 이미 2000개가 넘게 되었다. 앞으로도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겠지만 어떻게든 공유해서 다른 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이제 출근을 해야해서 더 쓰고 싶지만 마무리를 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미래의 불안을 해결하는 것은 ‘태도‘이다. 하나하나 꾸준히 조금씩 하는 태도에 더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하는 공부는 적어도 10년은 걸리지만 분명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고, 그 도움을 함께 만들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가운데 시작하게 된 일이 전부이다. 앞으로 할 새로운 박사과정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오늘도 출근하면 전쟁과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지금까지 배운걸 다 써도 잘 해결하지 못할 만큼. 그러나 다른 이들을 돕고 더 좋은 시대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다짐을 생각한 이 아침.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10년전 그 자리로 돌아가서 정말로 내가 원했던 미래는 ’모두가 함께 즐거운 삶을 사는 미래‘라는 것. 그러니 내 욕망을 좀 내려 놓고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 아무도 관심없는 삶을 ’나좀 봐 주세요’가 아니라 ’우리 같은 곳을 볼까요’라고 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처음 마음 그대로. (만약 10년 후 내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길. 그 처음 마음이 무엇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