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스탱게르스_느린과학 선언
과학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기존이 과학적 접근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해보고 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서 과학과 사회의 연결방식은 각각 다르다. 2년동안 행위자네트워크에서부터 시작해서 바스학파와 에든버러학파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도나헤러웨이까지 넘어오면서 사이보그 선언까지 살펴보았다. 지금은 수료를 했지만 여전히 과학사회학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은 스탱게르스의 '느린 과학은 가능하다'라는 책으로 스터디를 했다. 기존의 빠른 과학이 원하는 논문인용수와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한 연구목표와 프로세스에 대항애서 윤리적인 방향성 검토와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느린과학을 선언한 것이다. 특히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듯한 라투르와 스탱게르스의 비교도 볼 만하다. 나의 기준으로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록해놓고 아래 계보에 추가해봐야 겠다.
오늘 알아볼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벨기에의 과학철학자이다. 현대 과학이 '지식 경제'의 논리에 포획되어 과학 본연의 가치와 사회적 책임을 상실하고 있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느린 과학 선언'을 주장한 걸로 유명하다. 그녀는 과학이 오로지 효율, 경쟁, 속도만을 추구하는 '빠른 과학(Fast Science)' 체제에 갇혀, 인류가 직면한 복잡하고 거대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녀의 철학적 작업은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윤리적 맥락에서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스탱게르스의 비판은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유럽 과학계의 방향전환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2004년 한국의 과학기술 부총리 체제 출범이나 유럽연합(EU)의 리스본 전략 가속화와 같이 과학이 국가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공식화되며 경쟁 중심의 R&D 시스템이 전 세계적으로 공고화되던 시기를 문제시삼는다. 그녀는 이러한 재편이 과학의 비판적 성찰과 '주저함'의 시간을 빼앗아, 과학을 윤리적, 민주적 논의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느린 과학 (Slow Science)
배경 및 개념: 스탱게르스는 현대 과학이 '빠른 과학(Fast Science)'의 관행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빠른 과학'은 시장의 요구, 경쟁적인 평가 시스템, 빠른 연구 결과 도출 등에 의해 속도를 강요받고, 이로 인해 연구의 질적 측면이나 윤리적 고려가 소홀해질 수 있다.
주요 주장: '느린 과학'은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연구의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과학적 질문과 현상에 대한 충분하고 신중한 사유와 탐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연구자들에게 성찰할 시간을 주고, 과학 지식 생산에 시민들이 대화자로서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운동이다.
코스모폴리틱스 (Cosmopolitics)
배경 및 개념: 이는 과학기술과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는 개념으로, '코스모스(cosmos, 세계/질서)'와 '폴리스(polis, 정치)'를 결합한 용어이다. 이는 단순히 인간 중심의 정치(politics)를 넘어 **비인간 행위자(예: 과학적 사실, 기술, 자연 등)**를 포함한 세계(cosmos)의 질서를 숙고하는 확장된 정치를 의미한다.
주요 주장: 스탱게르스는 과학적 진리가 중립적이지 않으며, 과학적 실천은 항상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고 본다. 따라서 과학기술적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가 참여하여 공동의 관심사를 만들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는 민주적인 숙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의 생태학 (Ecology of Practices)
배경 및 개념: 스탱게르스는 다양한 과학적/비과학적 '실천(practices)'들, 즉 지식이나 사물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들을 하나의 생태계로 간주한다. 각 실천은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며, 다른 실천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다.
주요 주장: 이 이론은 모든 실천을 상호 존중하며, 특정 실천(예: 주류 과학)이 다른 실천(예: 전통 지식)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거나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녀는 다양한 실천들이 공존하고 서로 간에 의미 있는 교란을 일으킬 때, 새로운 질문과 가능성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히 과학적 지식 생산에서 다원성과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스탱게르스는 현대 과학계가 '출판하지 않으면 사라진다(Publish or Perish)'는 강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연구자들은 논문의 양과 영향력 지수(Impact Factor)에 의해 평가받으며, 이는 깊이 있는 사유나 성찰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속도 중심주의를 낳았다. 이러한 체제는 과학적 발견의 질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성과와 즉각적인 효율만을 최우선 가치로 두도록 강요함으로써, 과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해치고 있다.지식 경제는 과학을 '상품'을 빠르게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연구기관들은 대학의 상업화를 통해 산업적,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히며, 그들의 연구가 특허와 기술 상업화로 이어지는 선형 모델(Linear Model)에 복종하게 되었다.
스탱게르스는 이러한 흐름이 과학을 사회적 우려와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적, 기술 관료적 행위로 만들고, 대중의 정당한 우려를 단순히 '비과학적인 공포'로 치부하는 오만함을 낳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느린 과학 선언'은 단순히 연구 속도를 늦추자는 요청이 아니라, 과학이 사회적 관심사(matters of concern)에 귀 기울이며 윤리적으로 숙고할 시간을 확보하자는 규범적 호소이다. 그녀는 과학이 외부의 '저항이나 주저함'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시민 사회와 함께 복잡한 문제를 협상하고 질문할 줄 아는 '문명화된 과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는 과학을 지식의 일방적인 전달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대화 파트너로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빠른과학의 특징
이자벨 스탱게르스가 비판하는 '빠른 과학(Fast Science)'은 단순히 연구의 속도가 빠르다는 물리적 의미가 아니라, 현대 과학계 내부와 외부의 구조적 압박으로 인해 발생하는 성찰 없는 과학 실천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과학은 시장의 요구, 경쟁적인 연구 평가 시스템, 그리고 짧은 기간 내에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제도적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따라서 빠른 과학의 특징은 연구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명령과 "그렇지 않으면 추락할 것"이라는 경고를 통해 지속적인 속도와 효율성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는 과학적 진리 발견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충분한 숙고, 실험의 반복, 그리고 윤리적 성찰의 시간을 박탈하게 된다.
또한 빠른 과학은 지식 생산을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의 영역으로 한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관행은 지식을 '유능한 동료들'에게만 전달되는 누적적이고 전문적인 것으로 여기며, 일반 시민에게 전달되는 '통속화된 지식'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경시한다. 이러한 배타성은 과학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를 배제하고, 과학 지식이 특정 산업계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쉽게 종속되도록 만든다. 궁극적으로 스탱게르스는 빠른 과학이 과학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고, 과학이 사회적 책임이나 다양한 실천과의 대화 기회를 상실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느린 과학'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럼 스탱게르스는 어떻게
'느린과학'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루드비히 플랙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루드비히 플랙(Ludwik Fleck)은 1935년에 이미 과학 지식이 개별적 합리성의 산물이 아니라 집단적 행위의 결과임을 명확히 한 선구자이다. 그는 '사고 집단'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과학적 사실의 발생은 특정 가치와 관습,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과학자 공동체 내부의 상호작용과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과학의 객관성이 사회적 요소에 의해 구조적으로 형성됨을 밝혀 STS의 지식사회학(SSK)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플랙이 제시한 '사고 양식'은 특정 사고 집단이 세계를 바라보고, 문제를 정의하며, 허용 가능한 질문과 답의 범위를 결정하는 인지적 스타일이다. 플랙은 매독 진단법의 역사를 분석하며, 객관적인 사실이란 이러한 집단적 사고 양식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사회적 구성물임을 입증했다. 이 개념은 지식이 특정 공동체의 관습에 깊이 의존함을 보여주며, 지식의 상대성 논쟁의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플랙의 연구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1960년대에 재조명되면서 과학철학의 지형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토마스 쿤(Thomas Kuhn)은 자신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 서문에서 플랙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음을 명시했다. 플랙의 '사고 양식'은 쿤의 '패러다임(Paradigm)' 개념의 원형으로 간주되며, 이를 통해 플랙은 과학의 발전을 합리적인 축적 과정이 아닌 집단적 전환의 관점에서 보게 한 STS의 정신적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결국 토마스 쿤이 플렉에게서 받은 영향은 과학적 지식의 본질과 발전 과정에 대한 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사고를 하는 집단'이라는 방식의 생각 말이다.
'패러다임' 개념의 토대: '사고양식(Denkstil)'과 '사고집단(Denkkollektiv)'
플렉은 과학적 지식이 개인의 고립된 노력이 아니라 '사고집단'이라고 불리는 과학자 공동체의 집단적 활동을 통해 생성되고 전파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집단은 특정한 방식으로 현상을 보고, 문제를 인식하며, 해결책을 찾는 '사고양식'을 공유하는데, 쿤은 이 플렉의 '사고양식' 개념에서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자신의 핵심 개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성격 인식
플렉은 지식의 수용과 판별에는 논리적 정합성뿐만 아니라 전문가의 관심 분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사회적 요인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쿤은 플렉의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여, 과학의 발전이 단순히 사실의 누적이나 객관적인 논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와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쿤은 특히 플렉의 저서를 위해 쓴 서문에서 자신이 플렉에게 받은 영향 중 하나로 "학술지 과학과 편람 과학의 관계에 대한 플렉의 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점을 확신했다. 이는 과학 지식이 학술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교육 및 전파의 영역으로 확산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였다.
플렉의 이론은 사고양식 간의 점진적이고 진화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지식의 상대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쿤의 '패러다임 전환'과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이론이 후대 과학철학에서 상대주의로 해석되는 데에는, 플렉의 초기 사상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라투르가 유일하게 인정했던 비판자는 스텡게르스였다. 그럼 라투르와 스텡게르스는 어떻게 다를까? 브뤼노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기술, 사물)가 동일한 평면에서 '준객체(Quasi-Object)'를 형성하며 지식을 구성하는 과정을 기술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분석한다. 반면, 스탱게르스는 라투르의 분석이 갖는 윤리적, 규범적 공백을 문제 삼으며, 지식 구성 과정에서 과학자가 가져야 할 '주저함(Hesitation)'과 타자와의 '마찰(Friction)'을 통한 윤리적 책임을 핵심 분석 단위로 강조한다. 모든 객체를 수평적으로 놓아둔 결과 네트워킹은 가능했지만 실제로 그 네트워킹의 속해서 유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이 가진 '윤리적 기능'을 지나치게 폄훼했다고 본 것이다.
한편 라투르의 목표는 과학과 사회를 구분하는 이분법(Great Divide)을 해체하고, 과학적 사실이 연결망의 안정화를 통해 어떻게 성공적으로 구성되는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다. 그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해체하는 데 집중한다. 이에 반해 스탱게르스는 해체에 머물지 않고, 현대 '빠른 과학' 체제의 비윤리성을 비판하며 '느린 과학'이라는 구체적이고 규범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과학의 실천 방식을 재구성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탱게르스는 라투르에게 '네트워크'로 도망가지 말고 네트워크 이후에 이 사회와 과학자집단이 가진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라고 요청한다. 자신이 주장한 느린과학처럼 네트워크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서 대답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정리하자면, 라투르는 대칭성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여 연결망 내 모든 행위자의 기여를 중립적으로 추적함으로써, 과학의 성공이 단순히 진리 자체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라투르는 일부러 '정치적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네트워크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스탱게르스는 이러한 중립적 태도가 결국 현대 과학의 지배적 지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성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과학계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적 요구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라투르의 분석적 도구를 윤리적 실천의 영역으로 끌어오려 한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라투르의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윤리적인 대안을 이야기하는 스탱게르스의 주장이 나는 더 이해가 가고 끌린다.
스탠게르스의 라투르 비판 정리
스탱게르스는 라투르가 과학적 사실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행위자(인간, 사물)를 동등하게 다루는 대칭성 원칙이 윤리적, 정치적 책임을 간과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과학적 연결망의 '성공'이 타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낳는 경우에도, 라투르의 방법론은 그 과정을 중립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쳐 비판적 개입의 여지를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라투르의 연구는 실험실에서 과학적 사실이 힘들게 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지식의 구성을 곧 연결망의 승리로 해석하게 만든다. 스탱게르스는 이러한 관점이 자본과 효율에 포섭된 '빠른 과학'의 승리를 정당화하거나 최소한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녀는 과학의 '성공'에 도달하기 전, '이 방식이 옳은가'라는 주저하는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스탱게르스는 라투르에게 과학적 사실을 '기술(description)'하는 역할을 넘어, 새로운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방식의 과학을 '발명(invention)'하도록 촉구한다. 라투르의 방법론이 과학적 권위를 해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해체 이후의 윤리적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탱게르스는 비전문가의 우려와 마찰이야말로 과학이 공동의 세계에 책임감 있게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스탱게르스의 '느린 과학 선언'은 20세기 초 플랙이 던졌던 '과학적 지식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존재론적 질문과, 라투르가 그 질문을 '행위자-연결망'을 통해 세밀하게 기술한 분석적 성과를 윤리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중요한 작업이다. 그녀는 과학이 지식 경제의 논리와 경쟁의 속도에 복종하며 '책임감 없이 전진'하는 현상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다. 스탱게르스의 핵심적인 요구는 과학계가 지식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주저함'의 미덕을 되찾고, 환경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복잡한 문제 앞에서 비전문가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진정한 행위자로 인정하는 대화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림의 미학이야말로 과학이 민주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재정립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결국 스탱게르스, 라투르, 플랙의 논의는 과학기술학(STS) 내에서 지식의 본질과 과학자의 역할에 대한 논쟁을 심화시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플랙이 집단적 사고의 불가피성을 보여주었고, 라투르가 인간-비인간 연결망의 동등성을 통해 과학의 권위를 해체했다면, 스탱게르스는 해체된 과학을 '윤리적 책무'라는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려 했다. 그녀는 과학이 단순히 효율적인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공동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숙고적 실천가로서 자리매김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규범적 지향점은 과학 지식이 젠더화된 편향, 경제적 이윤 추구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 진정으로 문명화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모색하게 하는 현대 STS의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느린과학' 선언을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구원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https://sokionchoi.wordpress.com/2021/10/06/kuhn-fleck-bl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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