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_19세기 유럽의 패러다임 변화
매주 화요일 저녁, 철학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를 베르그송 전공자이신 류종열 선생님께 배운다. 유럽의 현대철학이 나오는 과정에서 어떤 기원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다.
19세기 후반은 오랜시간 유지된 '합리성' 기반의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붕괴되고, 감성적이고 관계적인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이행하는 사유의 대전환이 일어난 시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세계를 고정된 형상과 목적, 즉 ‘본질(essence)’과 ‘텔로스(telos)’의 질서로 파악하며, 사물과 인간의 존재를 불변하는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전반에서 이 ‘본질 중심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고 관찰자와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곧 이전에 존재했던 형이상학적 공간 개념을 해체했다. 열역학과 확률론은 자연의 과정이 필연적 인과가 아니라 확률과 통계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 결과 세계를 불변의 질서가 아닌 우연과 가능성의 장으로 전환시켰다. 정치경제학과 인민주권의 등장 역시 '사회질서'를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과 인간의 집합적 실천 속에서 '구성'되는 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의학과 생리학의 발전은 생명을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기능과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과정적 관점이라는 해석을 열었다. 진화론과 인류학, 역사학은 생명과 인간 문화를 우연적 변이와 시간적 축적의 결과로 해석하며 '본질론적 인간관'을 해체했다. 언어학과 실험심리학 역시 인간의 내면과 의식을 더 이상 자명한 실체로 보지 않고, 구조와 기능, 그리고 기호의 체계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세계는 더 이상 ‘무엇인가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석되는 ‘사건(event)’과 ‘기호(sign)’의 관계망으로 인식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바로 이때 등장한 심층론은 표면 너머의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어떻게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가를 탐구하는 새로운 인식 패러다임이었다.
이러한 심층론적, 기호론적 전환 위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은 탄생했다.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의미의 발생과 흐름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사유는 이후 구조주의, 현상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는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상과 목적의 철학은 사건과 기호의 철학으로 대체되었으며, 세계는 이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고 의미를 산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현대철학은 실체보다 관계, 결정보다 생성, 본질보다 해석을 중심으로 한 사유의 지평을 열었다. 인간과 세계를 본질의 질서가 아닌 기호와 사건의 심층적 관계망 속에서 이해하는 새로운 철학적 시야를 마련하게 되었다. 오늘부터 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서 후반부로 들어간다. 프랑스적 사유가 시작된 19세기 후반 세상은 어떻게 바뀌고 있었을까? 한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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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사유의 중요한 전환기에서 우리는 ‘변형론(Transformisme), 진화론(Evolutionisme), 실증주의(Positivisme)’이 서로 얽히며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유는 더 이상 고정된 본질을 전제하지 않고, 변화, 생성, 경험적 검증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려 했다. 뷔퐁(Buffon)은 생명의 다양성을 ‘계열’로 파악하며, 생물들이 정태적 존재가 아니라 연속적 변형의 사슬 속에 있음을 보여주었고, 라마르크(Lamarck)는 이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켜 생명의 변화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노력(les efforts)과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내적 원동력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는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 단계에서 생명을 ‘점진적이고 불규칙적인 상승’, 즉 완전하지 않은 연속적 발달 과정으로 보았다. 이때 라마르크가 제시한 변형주의(Transformisme)는 후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진화론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도 생물학 용어의 중심에 있었다. 라마르크의 핵심 개념은 생물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환경에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고, 그것이 후대에 전달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변종(la variante)’ 혹은 ‘별종(l’anomalie)’은 낮은수준의 예외가 아니라, 변화의 계기이자 창조적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변형은 축복이자 재앙일 수 있었지만, 그 자체로 생명의 역동성과 불가예측성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라마르크에게서 생명은 더 이상 외부의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적 운동을 통해 발전하는 자율적 체계였다. 이는 생명과 의식,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상호작용적 변화’로 이해하게 만든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변종은 별종으로,
별종은 진화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라마르크의 사유는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Evolutionisme)으로 이어졌다. 다윈은 라마르크의 ‘노력’ 개념을 자연의 경쟁과 선택의 법칙으로 재해석하였다. 그는 '종의 기원(1859)'에서 맬더스(Malthus)의 인구론을 받아들여 생존투쟁의 원리를 발전시켰고, 그 속에서 자연선택과 최적자 생존의 원리를 제시했다. 이로써 생명의 변화는 더 이상 개체의 의지나 목적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비의도적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다윈은 생명의 역사 속에서 우연과 법칙이 결합되는 새로운 질서, 즉 비결정적 필연성의 세계를 열어젖혔다.이 과정에서 사유의 흐름은 생물학의 혁명만 이야기한게 아니라, 근대적 인식론의 대전환이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와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학 대계(1543)'가 물질적 세계와 인간 신체의 인식 구조를 뒤흔들었다면, 19세기에는 라마르크의 '동물철학(1809)',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해부학적 철학(1818)',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1830)'가 ‘지상의 변화’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자연은 더 이상 신적 설계의 완성된 창조물이 아니라, 변형과 적응, 시간 속의 생성으로 이해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실증주의(Positivisme)는 철학의 방법론적 혁신을 시도했다. 콩트(Auguste Comte)가 주도한 실증주의는 물리과학의 실험과 검증을 문명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며, 인간 지식의 확실성을 재정립하려 했다. 실증주의는 경험적 사실과 과학적 법칙만을 참된 지식의 근거로 인정하며, 형이상학적 설명을 배제했다.
자연의 진화의 원리가 사회에도 동일할까?
그러나 동시에, 실증주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 사회의 발전을 연속적 진화로 이해함으로써, 라마르크와 다윈의 사유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했다. 즉, 생명에서 사회로, 자연에서 문명으로의 연속적 변형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결국, 변형론·진화론·실증주의는 서로 다른 학문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모두 ‘세계는 변화와 생성의 과정이며, 진리는 사건 속에서 경험적으로 드러난다’는 새로운 인식 원리를 공유했다. 라마르크가 강조한 내적 노력, 다윈이 제시한 자연선택, 그리고 콩트가 확립한 실증적 검증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론을 넘어서는 사유의 흐름이었다. 이로써 19세기 사유는 ‘존재의 본질’에서 ‘존재의 변형’으로, ‘형이상학적 목적’에서 ‘경험적 과정’으로 이행하였으며, 프랑스 현대철학이 나아갈 진화적·관계적·생성적 존재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19세기 영국 사상가로서, 흔히 진화론적 세계관을 철학·사회·윤리 전반으로 확장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는 종종 콩트(Auguste Comte)의 영향을 받은 실증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스스로는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현상을 수용하고 그 속의 질서를 통합하려는 이론가”로 표현한다. 즉 관찰된 사실들을 통해 우주의 통일적 원리를 탐구한 철학자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요청한다. 그는 과학적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 경험적 사실의 축적 속에서 ‘보편적 진화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한 체계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스펜서는 스물두 살이던 1842년에 발표한 '정부의 고유한 영역에 관하여(On the Proper Sphere of Government)'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원리를 설명했다.
스펜서는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인간의 자율적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교리적 통일령(Act of Uniformity, 1662)에 저항한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 혹은 청교도·장로파·재세례파·칼빈파 등)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스펜서는 사회를 강제적 질서로 보는 대신, 개체들이 자율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질서를 형성해가는 자생적 진화의 체계로 이해하였다. 자유로운 경쟁과 선택의 결과로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었으며, 국가의 개입은 이러한 자연적 진화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오랜시간 동안 성공회가 국교회가 되면서 '보수화'되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스펜서와 같은 사상들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펜서의 철학적 체계는 '제1원리들(First Principles, 1862)'을 시작으로 '생물학의 원리들(Principles of Biology, 1864–1867)', '심리학의 원리들(Principles of Psychology, 1870–1872)' 등으로 이어진 방대한 ‘종합철학(Synthetic Philosophy)’에서 정리되었다. 이 체계의 중심에는 ‘진화(evolution)’가 있다. 그는 진화를 “동질한 상태에서 이질한 상태로의 변화이며, 동시에 통합과 분화가 진행되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즉, 모든 존재는 단순에서 복잡으로, 미분화에서 분화로 나아가는 보편적 과정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펜서의 진화론은 생물학적 범위를 넘어 우주론적·심리학적·사회적 진화의 원리로 확장되었다. 그는 물리적 힘, 생명체의 적응, 인간의 의식, 사회의 제도all of these를 동일한 진화의 법칙 아래 통합하려 했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
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도 말이다
흥미롭게도, 스펜서의 형이상학은 그의 진화론과는 독립적인 불가지론(agnosticism)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궁극적 존재를 “무한정한 의식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이성은 그것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우주의 궁극적 근원은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며, 과학은 단지 그 현상적 질서와 법칙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진화론은 신학적 목적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인간 인식의 한계를 자각한 철저한 경험주의적 불가지론 위에 서 있다. 이러한 불가지론의 원리는 사실 계몽주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신론'에 있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이론적 공간은 계산할 수 없는 아니 계산하지 않는 공간으로 놓는 것이다. 신의 영향력으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고하기 위한 초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펜서의 진화론은 그 유명한 '라플라스의 정리'를 쓴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의 기계론적 우주발생론의 영향을 받았다. 스펜서는 우주의 진화 또한 기계적 법칙에 따라 에너지의 보존과 변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화는 “영속적 힘(force permanente)”의 작용이며, 이 힘은 만물의 근저에 작동하는 우주적 원리로 이해되었다. 즉, 우주는 무한한 힘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 과정이며, 생명과 사회는 그 에너지의 복잡한 조직화의 결과이다. 또한 스펜서는 ‘최적자 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개념을 다윈보다 먼저 명확히 제시했다. 다윈은 이 표현을 이후 자신의 이론 속으로 수용했지만, 원래 이 용어는 스펜서의 사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펜서는 경쟁과 선택의 원리를 사회 진화에도 적용하여, 개인과 집단이 환경에 더 잘 적응할수록 존속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신의 존재가 보장하여 우주의 원리를
인간 스스로 찾아나서다
그러나 스펜서에게서 최적자 생존이라는 원리는 부정적인 사회적 냉혹함의 논리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율적 조화가 이루어지는 신념적 원리였다. 그는 “자연을 신앙으로 믿는 첫 번째 철학자”라 불릴 만큼, 자연의 자기조직적 질서와 필연성을 거의 종교적 확신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스펜서의 진화론은 단순한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하나의 진화적 과정으로 통합하려는 총체적 사유 체계였다. 그는 인간과 사회, 자연과 우주를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통합을 결합시켰다. 스펜서의 사유는 이후 프랑스 현대철학, 특히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philosophie de la vie)’과 뒤르켐의 사회적 실증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실증주의와 형이상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상 속에서 질서와 의미를 발견하려 한 ‘진화적 사유의 선구자’였다고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의 관점에서보자면 스펜서가 던진 새로운 패러다임이 점차 서양의 사유의 정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1850년에서 1880년 사이의 영국은 실증주의(positivisme)와 진화론(évolutionisme)이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과학적 정신과 철학적 사유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지적 흐름은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실증정신을 영국적 경험론과 결합시켜 ‘과학적 세계관’을 사회·윤리·종교의 영역으로 확장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사회의 정신은 과학의 방법론이 인간 이해의 중심이 되었고, 철학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체계의 탐구가 아니라 현상을 설명하고 검증하는 실험적 사유의 실천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시기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조지 헨리 르위스(George Henry Lewes, 1817–1878)는 영국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로서, 콩트의 실증주의를 영국 사상에 소개한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경험과 관찰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사회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정신철학의 생리학적 기초(The Physiology of Common Life, 1859–1860)'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생리학적·경험적 현상으로 분석하는 ‘심리학적 실증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철학을 ‘과학적 탐구의 확장된 형태’로 간주하며, 정신과 사회의 법칙을 자연법칙처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넘어,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자연적 과정으로 환원하는 새로운 인식틀을 마련했다.
한편, 토머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는 다윈의 ‘불편한 친구’로 불리며, 진화론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과학의 대변자’로 활동했다. 헉슬리는 ‘과학적 회의주의’의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경험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 과학의 자율성을 적극 옹호했다. 헉슬리는 진화론을 생물학에 국한시키지 않고, 도덕·종교·교육의 문제로까지 확장하여 실증주의적 진화윤리를 제시했다. 그는 인간의 도덕성이 자연선택의 연장선에서 형성된 사회적 본능이라고 보았으며, 도덕과 종교의 기초를 초월적 권위가 아니라 경험적 사실과 사회적 생존의 조건에서 찾으려 했다. 그의 사고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고, 근대적 ‘세속적 지식인’의 형상을 대표했다.
윌리엄 킹던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 1845–1879)는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진화론과 수학적 논리를 결합하여 물리적 세계와 도덕적 세계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그는 ‘신념의 윤리(Ethics of Belief, 1877)’에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란 “충분한 증거가 없는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실증주의의 핵심 정신인 증거에 근거한 사유를 철저히 윤리적 차원으로 확장했다. 또한 그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정신적 에너지’의 연속적 진화로 설명하며,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인식적 진화과정이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사상가인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 또한 이 시기 영국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르낭은 문헌학과 역사학의 방법을 통해 종교를 분석하며, 신앙을 초월적 계시가 아닌 인류정신의 역사적 진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의 사유는 실증주의가 단순히 과학의 논리로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언어적·문화적 진화의 원리를 포괄하는 인문학적 확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윈우드 리드(William Winwood Reade, 1838–1875)는 '인류의 순례(The Martyrdom of Man, 1872)'에서 인간 문명을 진화의 연속적 과정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는 신화·종교·정치·과학의 발전을 모두 ‘지적 진화(intellectual evolution)’의 표현으로 보고, 인류의 역사를 자연적 법칙의 산물로 설명했다. 그의 저작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대중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증주의적 역사철학의 기반을 넓혔다. 스펜서의 진화론은 콩트의 인도주의(l’humanitarisme) 정신과 결합하여, 인간 사회를 ‘도덕적 진화의 장’으로 보았다는 것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 흐름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존 피스크(John Fiske, 1842–1901)는 미국 철학자이자 역사가로서, 다윈과 스펜서의 진화론을 철학적·신학적으로 종합했다. 그는 '우주적 철학(Outlines of Cosmic Philosophy, 1874)'에서 우주의 진화가 신적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필연적 전개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정신의 도덕적 목적성을 해석하려 했다.
진화론적 세계관이 지성의 새로운 문명기를 열다
또한 조지프 르콘트(Joseph LeConte, 1823–1901)는 물리학자이자 지질학자로, 지구의 형성과 생명 진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며, 자연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는 진화론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질서의 ‘과정적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와 달리 벤저민 키드(Benjamin Kidd, 1858–1916)는 '사회진화(Social Evolution, 1894)'에서 인류 사회의 발전을 이성보다는 신앙과 도덕의 진화로 설명하면서, 진화론을 사회윤리적 이론으로 전환시켰다. 결국 1850년에서 1880년까지의 영국은, 실증주의자들과 진화론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철학적 진화론이 통합된 ‘지성의 새로운 문명기’를 열었다. 이 시기 사유의 공통점은 형이상학의 해체, 경험의 우위, 진화의 보편화, 그리고 인간정신의 역사적 진화에 대한 확신이었다. 영국의 실증주의적 진화론은 과학·윤리·사회·종교를 하나의 진화적 연속선 위에 놓았고, 이는 이후 프랑스 현대철학이 존재를 ‘시간 속에서 생성하는 사건’으로 사유하게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실증주의와 진화론이 철학, 과학, 예술, 사회이론 전반으로 확산되며, 근대적 사유가 형이상학에서 경험과 과학으로 전환된 시대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주요 사상가들은 콩트(Auguste Comte)의 실증주의를 계승하거나 비판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과학적 인문주의’를 모색했다. 에밀브레이너는 19세기 유럽의 지성사에서 이러한 사유의 확장을 보여준다. 리트레에서 헤켈, 르낭과 뗀, 그리고 독일 실증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의 유럽 사유는 공통적으로 형이상학적 본질론의 붕괴 이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실증적·진화적 사고의 확산을 보여준다. 철학은 더 이상 초월적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역사·언어·생명·정신·사회 등 모든 현상의 경험적 법칙을 탐구하는 총체적 인식체계로 자리 잡았다. 이 흐름은 20세기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이어져,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생성, 관계, 사건의 연속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현대적 존재론’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리트레와 실증주의 (Littre et le Positivisme)
에밀 리트레(Émile Littré, 1801–1881)는 콩트의 직접적인 후계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인류교(religion de l’humanité)’에는 반대하였다. 리트레는 실증주의를 종교적 신앙이 아닌 과학적 방법의 체계로 한정하며,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경험의 검증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는 '리트레 사전(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의 편찬자이자 언어학자였으며, 언어·역사·사회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관찰 가능한 사실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입장은 실증주의를 과학적 방법론으로 고정시키고, 철학이 신학이나 초월적 관념으로 복귀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반면, 피에르 라피트(Pierre Laffitte, 1823–1903)는 콩트의 인류교를 찬성하며 실증주의를 종교적·도덕적 체계로 발전시키려 했다. 그는 ‘실증적 도덕의 보편화’를 주장하며,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연대를 강화하고 윤리적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한편, 프랑스의 생물학자 펠릭스 르당텍(Félix Le Dantec, 1869–1917)은 라마르크의 변형론과 실증주의를 결합하여, 생명현상을 기계적 과정으로 설명하면서도 의식과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은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모든 존재를 물질과 에너지의 단일체(monisme)로 이해하는 일원론적 진화철학을 제시하였다.
이 사상적 흐름은 이탈리아에서도 확산되었다. 심리학자 로베르토 아르디고(Roberto Ardigò, 1828–1920)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심리학적 경험주의와 결합해 ‘정신의 과학’을 구축하려 했다. 정치학자 엔리코 페리(Enrico Ferri, 1856–1929)와 인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 1835–1909)는 실증주의를 범죄학과 사회학의 기초이론으로 적용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초월적 윤리로가 아닌 생리적·사회적 조건의 산물로 보았으며, 실증주의를 사회정책의 과학적 근거로 확장하였다.
르낭 (Renan)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은 문헌학자이자 사상가로, 신앙과 역사, 계시와 비판을 결합한 실증적 종교학의 창시자였다.
그의 대표작 '크리스트교 기원의 역사(Histoire des origines du christianisme, 1863–1881, 7권)'는 성경을 초월적 진리의 보고가 아니라, 역사적 문서와 인간정신의 진화 산물로 분석한 작업이었다. 그는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앙을 이성적 비판 위에서 재해석하며 “종교는 진리의 적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인간정신의 한 단계”라고 보았다.
그의 역사적 유연성은 프랑스 문학비평가 피에르 라세르(Pierre Lasserre, 1867–1930)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종교철학과 인문주의의 교차점에서 실증적 신학(positive theology)의 가능성을 열었다.
뗀 (Taine)
이폴리트 뗀(Hippolyte Taine, 1828–1893)은 실증주의를 인문과학과 미학으로 확장한 대표적 철학자였다. 그는 스피노자, 꽁디약, 헤겔을 성찰하면서 예지성(l’intelligibilité)의 개념, 즉 인간의 정신과 사회현상에도 객관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의 방법은 경험적·분석적 접근을 문학, 예술, 정치, 역사 연구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성에 대하여(De l’intelligence, 1870)'에서 병리학과 신경생리학을 참고하여, 인간의 사고를 생리적 과정으로 분석했고, 추상적 사유와 창조적 상상력이 동일한 인식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형이상학적 통찰을 제시했다.
뗀에게 인간 정신은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무한에 대한 공감 속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창조적 원리였다. 그의 실증주의는 과학적 객관성과 예술적 상상력을 결합한 독특한 인간학적 철학으로 평가된다.
고비노 (Gobineau)
아서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 1816–1882)는 프랑스 귀족이자 인종주의 이론의 선구자였다. 그는 토크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철학자였으며, 헤겔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다”고 고백하며, 역사를 인종적 차이에 근거한 문명 발전의 과정으로 해석했다. 그는 지중해 남부 문명보다 게르만 북방 문명을 우월하게 평가하며, 인류사의 불평등을 자연적·생물학적 필연으로 보았다.
그의 사상은 '인종불평등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 1853–1855)'과 '생명의 놀라움(La Renaissance de la Vie, 1904)'로 정리되었고, 훗날 우생학과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실증주의의 경험적 방법을 인종주의적 세계관에 결합함으로써, 과학적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었다.
헤켈 (Haeckel)
에른스트 헤켈(Ernst Heinrich Philipp August Haeckel, 1834–1919)은 독일의 동물학자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생명 전체의 철학으로 확장한 ‘생물학적 일원론자’였다. 그는 인간을 신적 창조의 산물이 아니라, 단지 물질과 에너지의 복합체로 규정했다.
이로써 그는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동일한 연속선 위에 놓고, 의식과 생명을 하나의 진화적 에너지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의 철학은 고대 이오니아 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물질·정신·신의 구분을 해체한 자연철학적 일원론(monisme naturaliste)으로 귀결되었다.
헤켈의 사상은 생물학과 철학을 통합한 ‘세계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며, 이후 독일 생명철학과 프랑스의 생의 철학(베르그송)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의 실증주의 (Le Positivisme en Allemagne)
독일에서는 실증주의가 프랑스와 달리 철학적 체계보다는 과학 대중화와 비판적 역사학의 형태로 수용되었다.
에른스트 라스(Ernst Laas, 1837–1885)는 ‘통속적 실증주의자’로 불리며, 지식의 근거를 순수한 경험에 두고 모든 초월적 이념을 거부했다. 그는 칸트의 선험주의를 비판하고, 지식의 형성은 오직 경험의 축적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에우젠 뒤링(Eugen Dühring, 1833–1921)은 '철학의 시초에서 현대까지의 철학사 비판(1869)'에서 포이에르바흐와 콩트만을 근대적 철학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하며, 형이상학적 사유를 철저히 비판했다. 그는 과학적 인식의 논리적 구조를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으며, 실증주의를 ‘사유의 자기정화 과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독일 실증주의는 프랑스와 달리 ‘인간 중심의 인도주의적 실증주의’보다는, 논리적 일관성과 과학적 방법론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두 전통 모두 인간 지식의 초월적 근거를 부정하고, 현상과 경험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려는 근대적 이성의 자율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상은 실증주의가 한층 더 정교한 철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때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Richard Avenarius, 1843–1896)와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 1838–1916)였다. 이들은 과학의 방법론을 철학의 근거로 삼고, 인간 인식의 근본 구조를 ‘경험(Erfahrung)’ 자체의 비판적 분석을 통해 재구성하려 했다. 그들의 사상은 이후 경험비판론(Empiriokritizismus) 혹은 경험비판적 실증주의, 더 나아가 신칸트학파(Neo-Kantianism)와 논리실증주의(Logischer Positivismus)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아베나리우스와 ‘순수경험의 비판’
아베나리우스는 철학의 과제를 “경험 개념의 구출”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 인식이 외부 세계와 내부 의식의 이원적 구분 속에서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내성적 투사(l’introjection)’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내성적 투사는 인간이 외적 대상과 내적 지각을 분리함으로써 세계를 이원화시키는 인식 습관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분리를 해체하고,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경험적 장(field of experience) 안에서 파악하려 했다.
그의 대표작 '순수 경험의 비판(Kritik der reinen Erfahrung, 1888–1890)'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칸트가 인식의 선험적 조건을 ‘주관의 구조’에서 찾았다면, 아베나리우스는 그 조건을 ‘경험의 상호연관적 질서’ 속에서 찾으려 했다.
다시 말해, 인식은 자아의 내적 활동이 아니라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철학적 문제를 ‘경험의 순수 형태’로 환원하여 설명하려 했고, 그 결과 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경험의 논리적 분석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아베나리우스의 인식론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아와 세계의 분리를 제거하고, 모든 존재를 경험적 관계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입장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독립성을 부정하게 되었고, 결국 ‘의식의 불가지론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아를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경험적 흐름 속에서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구조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훗날 현상학(후설)과 불교적 무아(無我) 개념을 연상시키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아의 정립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마하와 ‘감각의 분석’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경험비판론의 과학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생물학보다 물리학의 방법론에 더 의지하며, 철학을 ‘과학적 사고의 자기반성’으로 규정했다. 그의 핵심 저작은 '역학의 발전(Die Mechanik in ihrer Entwicklung, 1883)'과 '감각의 분석과 신체와 영혼의 관계(Analyse der Empfindungen, 1886)'이다.
마하는 감각(sensation)을 모든 인식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에게 경험세계란 감각요소들의 결합체이며, 물리적 실재와 심리적 실재의 구분은 단지 관점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는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감각적 사실들의 함수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함수(fonction)’ 개념을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한 현상의 변화가 다른 현상의 변화와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이 바로 ‘법칙’이며 ‘실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실체의 집합이 아니라, 현상 간의 함수적 연관성의 총체, 즉 경험적 관계망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의 생리학적 연구와, 페히너(G. T. Fechner, 1801–1887) 및 분트(W. Wundt, 1832–1920)의 정신물리학(psychophysik)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연구는 감각의 강도와 물리적 자극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심리와 물리의 경계를 허물었다. 마하는 이러한 접근을 철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심리학과 물리학을 통합하는 경험적 통일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의식의 본질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의식적·물리적 현상을 동일한 감각적 자료의 변형으로 보았다. 이는 철저한 반형이상학적 태도였다.
후기 영향과 논리실증주의로의 계승
마하와 아베나리우스의 사유는 자아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거하고, 인식을 경험적 구조로 환원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자아의 해체’로 이어졌다. 경험비판론은 자아를 세계와 분리된 주체로 보지 않고, 경험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형성되는 관계적 구성체로 이해했다. 이 점에서 그들의 철학은 “물아일체적 세계 속에서 자아의 실체를 부정하는 불교적 무아사상”과 유사한 방향을 지닌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에서, 20세기 초 빈(Vienna) 대학을 중심으로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1882–1936)의 세미나가 열리며, 마하의 실증정신을 계승한 빈 학단(Wiener Kreis, Vienna Circle)이 형성되었다.
슐리크, 카르납(Rudolf Carnap), 노이라트(Otto Neurath), 한스 한(Hans Hahn) 등 다양한 학자들이 모여 형이상학으로부터 과학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논리적·경험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언어·논리·경험’의 통합을 통해, 과학이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슐리크가 1936년 피살되면서 빈 학단은 해체되었고, 그 전통은 영미권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로 계승되었다.
실증주의의 ‘의식 내부로의 회귀’라는 결말
뒤링으로부터 시작된 독일 실증주의는 아베나리우스와 마하에 이르러, 형이상학의 해체를 넘어 의식 자체의 과학화로 나아갔다. 이들은 물리학적 법칙과 경험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인식·자아·의식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 결과 인간주체의 실체는 점차 희미해지고, 세계는 감각의 흐름과 관계의 함수로 환원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실증주의가 외적 세계의 객관성을 탐구하던 시기에서, 의식 내부의 경험적 구조를 탐구하는 ‘내면적 실증주의’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아베나리우스와 마하는 철학을 형이상학에서 해방시키려 했지만, 동시에 인간 인식의 근원을 ‘자아의 부정’ 속에서 찾았다. 그들의 사상은 20세기 현상학, 분석철학, 그리고 논리실증주의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세계와 자아를 ‘관계적 경험의 네트워크’로 보는 현대철학적 인식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1832–1920)는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이자, 실증주의적 사유가 인간의 내면세계에 적용된 결정적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철저히 과학적 방법을 철학과 심리학의 토대에 두며,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실험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도는 철학이 형이상학에서 경험적 과학으로 이행한 19세기 지적 흐름의 절정이었으며, 콩트(Auguste Comte)의 사회법칙, 베르나르(Claude Bernard)의 의학적 실험, 르낭(Ernest Renan)과 뗀(Hippolyte Taine)의 역사적 실증주의, 마하(Ernst Mach)와 슐리크(Moritz Schlick)의 과학철학과 함께 ‘실증주의의 인식영역 확장’을 상징했다.
과학적 심리학의 탄생_'생리학적 심리학 원론'
분트는 원래 물리학을 전공했고,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의 조교로서 생리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신체적·물리적 과정과 분리된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감각·지각·의지 등 생리적 반응과 긴밀히 연관된 경험적 현상임을 확신했다. 이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생리학적 심리학 원론(Grundzüge der physiologischen Psychologie, 1874)'을 출간했고, 이후 1911년까지 여섯 차례 개정판을 냈다.
이 저서는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연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체계화한 ‘실험심리학의 기초 문헌’이었다. 그는 감각의 속도, 자극의 강도, 반응의 시간 등을 측정하며, 의식의 작용을 물리적·생리학적 인과 속에서 탐구했다. 그러나 분트의 의도는 단순히 ‘물리학으로 인간을 환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감각의 자료를 넘어서, 인간이 스스로의 내적 상태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과정을 탐구하며, 이를 ‘능동적 통각론(aktive Apperzeptionstheorie)’으로 발전시켰다.
능동적 통각론_의식의 구조와 창조적 작용
분트의 통각론(Apperzeption)은 개인의 정신이 단순히 외부 자극을 수용하는 수동적 체계가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표상을 구성하는 능동적 과정임을 의미한다. 그는 통각을 “개인적 표상작업을 새로운 표상작업들과 상호관련 짓는 정신의 활동”이라 정의했다. 즉, 감각은 단순한 물리적 반응이 아니라, 주체의 주의·의지·기억·감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의식의 조직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분트는 인간의 심리현상을 자극–반응의 기계적 연쇄로 환원하지 않고, 의식의 창조적 종합력으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끊임없이 내적 요소들을 결합하고 변형시켜, 새로운 인식 구조를 만들어간다고 보았다. 이는 칸트의 인식론적 능동성을 실험적·과학적 방법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분트의 실험실(라이프치히, 1879년 설립)은 세계 최초의 심리학 연구소로, 감각·주의·의지·감정 등 정신 과정의 객관적 측정이 시도된 공간이었다. 이 연구소는 이후 심리학이 철학의 하위 분야를 넘어 독립된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 전역의 심리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논리학과 과학 방법론의 확장
분트는 또한 '논리학(Logik: Eine Untersuchung der Prinzipien der Erkenntnis und der Methoden wissenschaftlicher Forschung, 1880–1883)'에서, 과학적 인식의 원리와 연구 방법을 분석하는 철학적 기초를 제시했다. 그는 모든 과학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인식 구조를 탐구하며, 인간 정신의 작용이 논리적 추론과 과학적 탐색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분석했다.
이 책에서 분트는 인식이 단순한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경험을 조직하고 해석하는 정신의 구조적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과학을 ‘인간 정신의 자기반성적 산물’로 보았으며, 따라서 심리학은 단지 생리적 기초에 머물지 않고, 논리적·형식적 사고의 심리적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1921년에 출간된 4판은, 그가 평생 동안 과학과 철학을 통합하려 한 노력의 완결판으로 평가된다.
실증주의의 내면화와 한계
분트의 연구는 실증주의가 물리적·사회적 세계에서 정신의 세계로 확장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콩트가 사회법칙의 발견을 주장했고, 베르나르가 생리적 실험으로 생명을 분석했으며, 마하와 슐리크가 과학의 논리적 구조를 밝힌 것처럼, 분트는 인간의 의식마저도 경험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이로써 19세기 실증주의는 ‘물질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이동하며, 인간과학(Geisteswissenschaft)의 과학화라는 새로운 이상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시도는 철학의 고유한 반성적 차원을 약화시켰다. 인간의 내면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의식은 스스로를 측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이는 실증주의가 끝내 넘지 못한 경계였다. 분트 이후 심리학은 점차 실험주의와 행동주의로 분화되었고, 인간의 정신적 의미·가치·자유의 문제는 현상학과 해석학으로 이월되었다.
‘빛의 세기’에서 ‘의식의 과학’으로
결국 분트의 사유는 “빛의 세기(Lumières)”가 열었던 계몽의 이성이 ‘인간 정신의 구조’로 향한 과학적 탐구로 진화한 결과였다. 그는 철학이 더 이상 신적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과정 자체를 경험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철학은 자아와 의식의 초월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정신의 과학화’와 ‘자아의 해체’라는 근대 이후 철학의 이중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분트는 “물리학에서 생리학으로, 생리학에서 심리학으로” 이어진 독일적 실증주의의 최정점에 서 있었다. 그의 작업은 인간의 의식마저 과학의 언어로 해명하려는 시도였으며, 동시에 철학이 스스로의 인간적 근거를 다시 묻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20세기 현상학과 해석학, 그리고 인식론적 전환으로 이어지는 근대 철학의 심층적 기반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본질론이 붕괴되며, 세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변화의 과정, 사건과 기호의 네트워크로 이해하는 심층론적 전환을 맞이하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절대공간을 해체하고, 열역학과 확률론은 결정론을 무너뜨렸으며, 라마르크와 다윈의 변형론·진화론은 생명을 내적 노력과 자연선택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스펜서는 이를 우주적 진화의 원리로 확장하여 사회와 도덕의 발전을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했고, 영국의 르위스·헉슬리·클리포드·리드·피스크 등은 실증주의와 진화론을 결합해 경험적 사실, 윤리, 종교, 사회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프랑스에서는 리트레가 콩트의 인류교를 거부하며 실증주의를 순수 과학적 방법론으로 정립했고, 라피트·르당텍·헤켈·아르디고·롬브로소·페리 등이 이를 생명과 사회의 법칙으로 확장했다. 르낭은 신앙을 역사적 진화의 산물로, 뗀은 문학과 예술을 인간 정신의 경험법칙으로 분석했으며, 고비노는 실증주의를 인종주의적 사회철학으로 오용하여 근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진화론에서 시작해서 실증주의로
한편, 독일에서는 라스와 뒤링이 과학적 실증주의를 논리적·비판적 방향으로 전개하고, 아베나리우스와 마하가 이를 경험비판론(empiriocriticisme)으로 심화시켰다. 그들은 세계를 감각과 함수의 관계망으로, 자아를 경험의 일시적 구성으로 이해하며, 의식을 물리적 법칙 속에서 분석하려 했다. 이러한 사유는 자아의 실체를 부정하고 인식을 경험적 연속으로 환원하는 한편, 빈 학단과 논리실증주의로 이어졌다. 빌헬름 분트는 헬름홀츠의 생리학을 계승해 실험심리학을 창시하고, 의식의 능동적 통각 과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실증주의의 내면화를 완성했다. 이로써 19세기 후반의 철학은 “형상에서 사건으로, 본질에서 생성으로, 형이상학에서 과학적 경험으로” 이동하며, 세계를 진화적·관계적·심층적 체계로 이해하는 프랑스 현대철학과 20세기 존재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