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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실증주의는 종교를 어떻게 철학으로 만들었을까?

에밀브레이너_서양철학사_19세기 유럽의 종교철학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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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브레이너의 서양철학사를 돌아보고 있다. 지난시간에는 진화론에서 시작한 계몽주의가 어떻게 실증주의로 바뀌게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종교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19세기 영국의 종교철학은 신앙의 합리화와 인간화, 그리고 과학과 역사 속에서 신의 자리를 재정립하려는 지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신은 더 이상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인간 정신과 도덕적 질서의 심층 구조로 이해되었고, 신학은 형이상학적 교의에서 경험적·윤리적 신학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훗날 프랑스와 독일의 종교철학, 특히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과 폴 틸리히(P. Tillich), 그리고 현대 종교현상학의 전개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오늘은 이러한 흐름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에 대한 관점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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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철학에서 나타난 실증주의


19세기 종교철학 역시 진화론이 기반이 된 과학주의와 실증정신의 영향 아래에서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였다. 전통적 신학이 계시와 교리의 권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이 시기의 사유는 이성, 역사, 경험의 빛 속에서 신앙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전환되었다. 특히 영국에서 이러한 흐름은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뉴먼은 원래 영국 성공회의 신부였으나, 점차 로마 가톨릭의 교의와 전통에 깊이 매료되어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추기경이 되었다. 그의 신학은 계몽주의나 이신론에 맞서서 신앙을 방어하는 교의학이 아니라, 근대 이성주의 속에서 신앙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기독교의 변호론’(Apologia pro vita sua)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이성이 완전한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고, 신앙은 불완전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내적 확신의 작용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신앙은 합리적 논증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서 형성되는 ‘이해의 통합적 행위’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콜러리지(S. T. Coleridge, 1772–1834)와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낭만주의적 직관론,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의 비합리주의적 자유론의 영향을 받았다. 뉴먼에게서 이성은 신앙의 길을 닦는 도구이지, 신의 진리를 대신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뉴먼과 함께 여러 사상가들이 신앙의 현대적 의미를 탐구하였다. 에드워드 퍼지(Edward Pusey, 1800–1882)는 전통적 교회의 권위를 수호한 대표적 신학자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의 중심 인물로서 권위적 신앙과 전례의 회복을 주장했다. 반면, 윌리엄 조지 와드(William George Ward, 1812–1882)는 '크리스트교회의 이상(Ideal of a Christian Church, 1844)'에서 이상적 교회를 이성적 논증보다 도덕적·사회적 실천을 통해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레더릭 마우리스(F. D. Maurice, 1805–1872)는 '신학적 시론들(1853)'과 '사회도덕성 강독(1870)'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사회적 정의와 공동선의 원리로 재해석하며, 신학을 사회윤리와 결합한 초기 기독교 사회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시론과 논평(Essays and Reviews, 1860)'에 참여한 벤자민 조비트(Benjamin Jowett, 1817–1893), 베이든 포웰(Baden Powell, 1796–1860), 파티슨(Mark Pattison, 1813–1884) 등은 성경을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 역사적 문헌과 인간정신의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실증주의적 성서비평은 신학을 역사·언어학·도덕철학의 틀 속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영국 종교사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시인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종교를 초월적 믿음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도덕적 감수성과 문화적 이상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종교는 사랑과 정의의 감정이 문화적 형태로 표출된 것”이라 보며, 신앙을 사회적 윤리와 미적 교양의 통합적 행위로 재해석했다.


토마스 칼라일


2. 19세기 프랑스의 종교철학자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종교철학은 과학적 실증정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인간 내면의 자유와 인류적 연대, 그리고 신앙의 철학적 의미를 새롭게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삐에르 르루(Pierre-Henri Leroux, 1797–1871)는 철학을 절충주의로 규정하며, 사유는 시대정신과 인류성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철학이 종교적 교의에서 벗어나 인간 정신의 심리적·사회적 실재성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르루에게 철학은 고립된 사변이 아니라 인류의 삶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발전하는 살아 있는 실천적 사유였다. 그의 사회주의는 재산과 자비를 특정 계층의 특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할 공동 선의 수단으로 이해했으며, 인류애와 연대(solidarité humaine)를 중심 가치로 삼았다. 그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와 사상적으로 인접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도덕적 감수성과 사회적 사랑을 강조한 도덕적 실증주의자였다.


장 에르네스트 헤노(Jean-Ernest Reynaud, 1806–1863)는 '땅과 하늘(Terre et ciel, 1854)'에서 인류 전체의 숙명보다는 각 영혼의 개별적 운명과 자유의 여정에 주목했다. 그는 생시몽주의나 푸리에주의와 같은 사회유토피아를 신봉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구원은 집단적 개혁이 아니라 개인의 영적 성찰과 도덕적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샤를 스끄레땅(Charles Secrétan, 1815–1895)은 '자유의 철학(Philosophie de la liberté, 1848)'에서 셸링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과 자유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결합한 철학적 복음서를 제시했다. 그는 형이상학이 현실로부터 초연한 태도, 곧 ‘해탈(détachement)’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으며, 자유를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초월을 통해 신적 근원과 결합하는 생성의 운동으로 해석했다.


마지막으로 쥘 르끼에(Jules Lequier, 1814–1862)는 르누비에(Renouvier)의 친구로서, 내적 경험 속에서만 자유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자유의 철학자였다. 그는 자유를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성찰(méditation) 그 자체의 행위로 이해했고, 인간이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는 후일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실용주의적 자유 개념과도 통한다. 결국 르루, 헤노, 스끄레땅, 르끼에로 이어지는 이 사상적 흐름은 19세기 프랑스 종교철학이 실증주의적 이성의 엄밀함과 기독교적 내면성, 그리고 자유와 인류애의 윤리적 요청을 통합하려 한 시도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신앙을 교리나 제도 속의 신적 계시로 보지 않고, 인간 정신이 역사와 사회, 실존의 깊이 속에서 경험하는 초월의 체험으로 이해했다. 이로써 종교는 신의 객관적 증명이 아니라, 인간 자유와 도덕적 자각의 내면적 표현이 되었고, 프랑스 종교철학은 실증정신과 신앙적 인간주의가 공존하는 사유의 장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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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판주의 운동과 샤를 르누비에의 철학


19세기 후반, 유럽 사상은 실증주의가 낳은 과학주의의 한계를 인식하며 다시금 칸트의 비판철학으로 회귀하는 ‘비판주의 운동(Le mouvement criticiste)’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프랑스에서는 샤를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로, 독일에서는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와 신칸트학파(Neo-Kantianism)의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실증주의가 경험적 사실을 통해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했다면, 비판주의는 지식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시 묻는 사유였다. 즉, 세계를 그저 ‘경험 가능한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인식·도덕·자유의 내적 근거를 새롭게 확립하려는 철학적 복귀 운동이었다. 르누비에는 실증주의적 경험과 칸트적 비판정신을 결합해, 인간을 도덕적 자유의 주체로 복원한 철학자였다. 그는 무한 대신 유한, 필연 대신 자유, 초월 대신 도덕을 택했으며, 철학을 다시금 인간의 행위와 책임의 철학으로 되돌렸다. 그의 비판주의는 단순한 인식론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을 통한 인류의 자기구원이라는 윤리적 형이상학이었으며, 19세기 말 프랑스 철학이 존재의 문제로 이행하는 사상적 가교가 되었다.


르누비에의 철학적 배경과 비판주의의 성격

샤를 르누비에는 프랑스 비판철학의 핵심 인물로, 실증주의와 칸트 철학을 비판적으로 통합한 사상가였다. 그는 에콜 노르말이 아닌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으로, 철저한 수학적·논리적 훈련을 바탕으로 철학을 과학적 정밀성 위에 세우려 했다.

그의 초기 저작인 '고대철학 지침서(Manuel de philosophie ancienne, 1842)'와 '근대철학 지침서(Manuel de philosophie moderne, 1844)'에서 이미 비판주의적 합리정신이 드러나며, 이후 그의 철학은 세 가지 주제인 ‘수의 법칙’, ‘자유’, ‘상대주의’로 요약된다.

첫째, 수의 법칙(la loi du nombre)에서 그는 수학적 사고의 유한성을 강조했다. 꼬쉬(Augustin Cauchy, 1789–1857)의 영향을 받아 “무한수는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며,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르누비에는 세계를 유한적 질서로 인식하고, 인간의 이성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 개념을 철저히 배제했다.

둘째, 그는 자유의 문제(le libre arbitre)를 철학의 중심에 두었으며,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초월적 명령이 아니라 자유의 자발적 결단 속에서 찾았다. 인간의 자유는 필연성의 일부가 아니라, 도덕적 책임과 의미를 창조하는 능동적 원리였다.

셋째, 그는 관념적 상대주의(relativisme idéel)를 주장하면서, 인간은 절대적 실재를 인식할 수 없고, 오직 현상 속의 관계적 질서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칸트와 콩트 모두의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에게 현상은 단순히 수동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와 의지의 장(場)으로 이해되었다.


자유·유한·도덕의 철학

르누비에는 인간의 자유를 단순한 선택이 아닌, 세계 속에서 도덕적 의미를 창조하는 근원적 행위로 보았다. 그는 “자유작동의 시초는 순수한 아자르(un pur hasard, 우연)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며, 필연적 인과 속에서도 자유의 ‘틈’을 인정했다.

이로써 그는 결정론적 실증주의를 넘어, 우연과 자유의 철학을 제시했다. 그는 유한주의자로서 우주론이나 스콜라적 신학의 무한 개념을 거부했고, 인간의 이성은 유한한 세계 속에서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 데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또한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조화를 지향했다. 세계는 이론적 사유를 만족시키는 질서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실천적 자유를 통해 끊임없이 변형되는 도덕적 체계이기도 하다.

그는 “진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유토피아나 전체주의적 이상에 반대했다. 그의 신학적 입장에서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현존하는 도덕적 질서의 상징이었다.

신은 인간의 실천 속에서, 곧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의 윤리적 결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은 사유는 다신론적 경향을 보인 그의 친구 루이 메나르(Louis Ménard, 1822–1901)의 영향 아래 발전했다. 르누비에는 신을 ‘다수의 도덕적 중심들’의 합으로 이해하며, 인류의 도덕적 연대 속에서 신적 질서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사회적으로 그는 “현실의 상태는 전쟁 상태이며, 공산주의는 자유의 평등이 아닌 보편적 예속”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불평등을 세금과 제도의 문제로 보고, 사회적 조화를 ‘도덕적 책임의 확장’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런 의미에서 르누비에는 도덕적 자유에 근거한 인격주의(le personnalisme)를 프랑스 철학 전통 속에 확립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비판주의의 계승자들

르누비에의 비판주의는 이후 프랑스 철학의 중요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의 제자와 동료들—프랑수아 필롱(François Pillon, 1830–1914), 루이 프라(Louis Prat, 1861–1942), 빅토르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 리오넬 도리악(Lionel Dauriac, 1847–1923), 장자크 구르(Jean-Jacques Gourd, 1850–1909)—은 모두 비판주의의 핵심 주제인 ‘유한성, 자유, 도덕적 질서’를 계승했다.

특히 프라의 '신단자론(Nouvelle Monadologie, 1898)'은 라이프니츠의 단자 개념을 르누비에적 인격주의로 재해석하며, 각 인간을 도덕적 자유를 실현하는 하나의 자율적 중심(monade morale)으로 보았다.

이러한 비판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프랑스 철학을 실증주의의 기계적 세계관에서 해방시켰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새롭게 조명했다.

르누비에의 사유는 이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마르셀의 ‘실존적 인격주의’, 사르트르의 ‘자유의 존재론’으로 이어지며, 프랑스 현대철학의 인격적·도덕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샤를 누르비에


4. 독일의 신칸트주의와 영국의 경험론의 등장


19세기 말 유럽의 철학은 실증주의적 경험주의의 한계를 자각하며, 칸트의 비판철학으로 회귀하는 ‘신칸트주의(Neokantisme)’와 관념론적 재구성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흐름은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 두드러졌으며, 프랑스에서도 꾸르노(Cournot)의 확률철학을 통해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경험과 이성, 사실과 가치의 관계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또한 19세기 후반의 신칸트주의와 관념론, 개연주의는 모두 과학적 실증주의 이후의 사유가 철학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코헨과 리케르트는 과학의 논리적 토대를, 그린과 꾸르노는 도덕과 인식의 개연성을, 헬름홀츠와 랑게는 지각과 경험의 한계를 탐구함으로써, 철학을 경험의 반영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을 성찰하는 비판적 형이상학으로 복원하였다. 이들은 20세기 현상학과 분석철학, 그리고 프랑스 현대철학이 전개한 ‘인식의 자기반성’과 ‘가치의 철학’의 근본적 기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독일과 영국의 사례를 알아보자.


독일의 신칸트주의 (Le néokantisme allemand)

독일의 신칸트주의는 칸트의 “인식의 조건에 대한 비판”을 19세기 과학적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운동으로, 두 주요 학파이다. 마르부르크 학파(école de Marbourg)와 서남(바덴) 학파(école du Sud-Ouest)로 나뉜다.

마르부르크 학파는 헤르만 코헨(Hermann Cohen, 1842–1918), 파울 나토르프(Paul Natorp, 1854–1924),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경험을 감각적 사실의 총합으로 보았던 실증주의를 비판하며, 과학적 인식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적 구성의 산물임을 강조했다. 코헨은 과학의 개념들이 감각에서 유래하지 않고, 사유의 순수한 논리적 기능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나토르프는 인식의 기초를 ‘심리적 경험’이 아니라 ‘논리적 관계망’으로 규정했고, 카시러는 이를 더욱 확장해 인간의 문화 전체를 ‘상징적 형식’의 구성 과정으로 해석했다. 즉, 마르부르크 학파는 과학뿐 아니라 예술, 언어, 종교까지도 이성의 형식적 구성활동(Formgebung)으로 보며, 인간을 세계의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로 재정의했다.

이에 비해 서남(바덴) 학파는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 에밀 라스크(Emil Lask, 1875–1914)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칸트의 인식론을 역사와 가치철학으로 확장시켜, 과학의 객관적 법칙과 역사적 이해의 가치판단을 구분했다. 빈델반트는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n)이 법칙을 일반화하는 ‘보편적 인식’을 다루는 반면, 역사과학(Kulturwissenschaften)은 개별적 사건을 가치와 연관하여 이해하는 학문이라 보았다.

리케르트는 이를 이어받아, “가치(Valeur)가 사실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역사적 이해는 가치 선택을 전제로 한다고 보았다. 라스크는 인식과 가치의 경계를 연결하며, 철학의 중심 문제를 “가치의 형이상학”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신칸트주의적 흐름의 기원을 이끈 인물이 오토 리프만(Otto Liebmann, 1840–1912)이다. 그는 저서 '칸트로 돌아가자!(Zurück zu Kant!, 1865)'에서 칸트로의 회귀를 외치며, 철학이 다시 인식의 조건과 한계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페히너(G. T. Fechner, 1801–1887)와 베버(Ernst Weber, 1804–1891)의 정신물리학(psycho-physique)을 이어받아, 인간의 지각과 물리적 자극 간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타당성을 인정하며, 지식의 선험적 형식이 경험 속에서 어떻게 검증되는가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려 했다. 또한 랑게(Friedrich Albert Lange, 1828–1875)와 릴(Alois Riehl, 1844–1924) 역시 칸트의 인식론을 열렬히 지지하며, 철학이 과학의 성과를 해석하는 비판적 해명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신칸트주의는 경험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되, 그 인식 조건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이성의 자기반성운동’이었다. 이 흐름은 20세기 현상학과 문화철학, 나아가 분석철학의 논리적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 관념론과 꾸르노의 개연주의

한편, 영국에서는 관념론(idéalisme anglais)이 칸트와 헤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J. H. 스터링(James Hutchison Stirling, 1820–1909)은 '헤겔의 비밀(The Secret of Hegel, 1865)'을 통해 독일 관념론을 영국 지성계에 소개했고, 토머스 힐 그린(Thomas Hill Green, 1836–1882)은 칸트적 자아론을 사회적 윤리로 확장했다.

그는 “우리의 자아는 보편적 자아에 참여한다”고 주장하며,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적 이성 속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적 경험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발이자,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인간 이해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프랑스의 앙투안 꾸르노(Antoine-Augustin Cournot, 1801–1877)는 확률론과 수학을 통해 철학을 새롭게 재구성하려 한 독창적 사상가였다. '함수이론과 무한소 계산의 개론(1841)'과 '경우와 개연성의 이론(1843)',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1851)'에서 그는 “확실성과 우연성 사이의 개연성(probabilité)”을 철학적 중심 개념으로 제시했다.

꾸르노는 인간이 절대적 지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확률적 질서 속에서 의미 있는 인식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연(hasard)을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라, 여러 독립적 원인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합리적 불확정성으로 정의했다.

그의 개연주의(probabilisme)는 진리를 단일한 기준이 아니라, 사유가 만들어내는 체계적 연결성과 그 내부의 긴장과 충돌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의 인식은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질서를 구성해가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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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유럽 철학은 실증주의가 보여준 한계(즉 경험의 외적 사실만으로는 인간의 자유, 도덕, 인식의 조건을 설명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칸트의 비판철학으로의 회귀, 곧 ‘비판주의 운동(Le mouvement criticiste)’을 맞이하였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프랑스의 샤를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가 있었다. 그는 실증주의의 과학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무한한 결정론 대신 유한한 인간의 자유를 철학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르누비에는 세계를 인간 이성의 유한한 인식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하며, 자유의지는 도덕적 삶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현존하는 도덕적 질서의 상징으로 이해되었고, 진보는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들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적 유토피아나 기계적 공산주의를 거부하며, 인간의 책임과 자율성을 중시한 도덕적 인격주의(le personnalisme)를 제시했다. 이러한 비판주의는 필롱, 프라, 브로샤르 등에게 이어지며 프랑스 철학의 실증주의를 도덕적·인식론적 자유의 철학으로 변형시켰다.


한편 독일에서는 신칸트주의(Neokantisme allemand)가 등장하여 과학과 인식,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했다. 마르부르크 학파(Cohen, Natorp, Cassirer)는 인식이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이성의 구성 활동임을 강조하며, 과학적 개념들이 사유의 논리적 형식에서 생성된다고 보았다. 반면 서남(바덴) 학파(Windelband, Rickert, Lask)는 인식의 문제를 역사와 가치의 철학으로 확장했다. 자연과학은 법칙을, 역사과학은 의미를 탐구한다는 이들의 구분은 이후 가치철학(Valuephilosophie)의 토대가 되었다. 오토 리프만은 ‘칸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로 철학의 근본 전환을 촉구했고, 헬름홀츠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정신물리학을 통해 경험과 선험의 경계를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랑게와 릴 또한 인식의 조건을 과학적 방법론과 결합시키며, 철학을 형이상학이 아닌 비판적 인식론의 과학으로 재구성하였다. 이로써 신칸트주의는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 이성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철학적 구조를 세우며 20세기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기원을 마련했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독자적 전개를 보였다. 영국의 관념론자들(J. H. Stirling, T. H. Green)은 헤겔의 영향을 받아 개인의 자아가 보편적 자아에 참여한다고 주장하며, 자유를 사회적 윤리의 구현으로 재해석했다. 그린은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공동체적 도덕 속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윤리적 이상주의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앙투안 꾸르노(A. A. Cournot)는 수학과 확률론을 바탕으로 개연주의(probabilisme)를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이 절대적 진리를 가질 수는 없지만, 독립된 원인들의 교차 속에서 ‘확률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유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혼란의 상호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개연적 구조였다. 르누비에의 도덕적 비판주의, 코헨과 리케르트의 인식비판, 그린의 공동체적 관념론, 꾸르노의 개연철학은 모두 실증주의 이후의 철학이 자유, 가치, 인식의 조건을 재정립하려는 자기반성적 이성의 철학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과학의 엄밀함을 계승하면서도, 인간과 세계를 도덕적·관계적·유한한 의미의 구조로 이해함으로써, 20세기 현대철학—현상학, 문화철학, 존재론—의 사상적 토대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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