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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7. 2017

혁명과 시간

한나아렌트+김만권 교수님

혁명은 언제 일어나는가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혁명의 시간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할까


폭력없는 혁명이 가능할까

지속적인 변화는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이런 고민들로 밤을 세다가

불현듯, 과거에 배운 것들이 떠오른 아침


한나아렌트의 혁명론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20140929_철학아카데미
김만권 교수님_한나아렌트 "혁명론"  


일반적인 혁명이론


1. 응집이론

aggregate-psychological

정치폭력이나 정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행위를 사람들의 심리적 동기로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Ted Gurr ; why men rebel에서 사회에서 주어진 가치와 실제로 얻는 것의 차이가 클 때 사람들의 분로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2. 체제 가치 합의론

system value consensus

혁명을 사회체계 내에서 심한 불균형을 초래하는 이데올로기적 운동에 대한 폭력적 반응으로 설명하는 것

chalmers johnson ; Revolutionary Change 혁명은 사회가치체계구조를 바꾸기 위해 전략적으로 폭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가치의 불협화음을 내는 체계를 재구조화하는 활동이라고 본다.


3. 정치 갈등 이론

political-conflict

집단폭력과 혁명을 설명하는데 있어 정부와 다양한 집단의 권력 경쟁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는 것

charles tilly ; from Mobilization oto revolution이라고는 책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분노해도 최소한 조직적인 차원에서 일부 자원에 접근 가능성이 없다면 혁명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분노 이론에 대한 반박이다.

political movement ; 정치학을 할 때 정치적인 변화의 동인은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변동은 흔히 이익의 변동과 연동된다고 할 수 있다.


4. 계급갈등이론

베빙톤 무어 ; 혁명론을 이야기할 떄 무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매우 급진적인 혁명이론을 만들어냈다. 무어는 근대화가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방식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 발전은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로 세분화 된다.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의 주체가 부르주아가 되었을 때이다. 무산자들이 경제발전을 만들어낼 때 공산주의로 가게 된다.

맑시즘에 입각한 이론으로 사회구조변동을 계급 간의 갈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다. 성공한 혁명만이 혁명이다.

Theda Skocpol은 무어의 하버드 제자였다. 그리고 그는 states and social revolution을 쓰면서 무어의 이론을 뒤집는다. 혁명은 계급적 관계인 사회적 관계에 따라서 변화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서 혁명의 주체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조직으로서의 community의 존재방식에 따라서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이론을 내 놓았다.

혁명을 분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계급간의 관계이며 그 계급 간의 관계에 따라 혁명의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historical institutionalism이라고 할 수 있는 폴의 이론은 혁명이론의 완성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제도주의라고 할수 있다.


폭력과 혁명

이 처럼 대부분의 혁명 이론은 기본적으로 폭력을 이미 상정해 놓고 그 폭력이 왜 일어나는가에 분석하는데 집중한다.

이 가정을 지니고 아렌트는 혁명론을 보면 아렌트의 혁명론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정치 이론적 발상이다.

violence와 revolution의 관계가 혁명론의 기본적인 전제인데 아렌트는 이 고리를 끊어 놓는다.

존 던이 쓴 violence democracy에서 심지어 민주주의자들조차도 그 민주제도를 실천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해다고 주장한다.


아렌트의 기획

아렌트는 폭력과 혁명을 브리지시키지 앟고 행위action과 혁명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onstitutional building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making과 다르다.

헌법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헌법적인 상황을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누구라도 이 공간에 들어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위의 장소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
1. 혁명론의 배경

1952년 아렌트는 구겐하임 재단 연구비를 받아 맑스와   전체주의에 관한 연구를 시행한다.

인간의 조건, 과거와 미래 사이, 혁명론이 이 연구비 수혜의 결과이다.

혁명론은 1960년 완성단계에서 록펠러 재단으로 부터 연구비를 받았다.


2. 혁명론과 인간의 조건

정치의 행위가 불가능해진 근대적 조건 하에 가능한 행위의 공간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의 문제였다.

사적인 영역이 확대되면서 공적인 영역이 사라지는 일상의 속박들을 깰 수 있는 것은 바로 행위의 증폭이 일어나는 혁명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폭력과 단절된 행위를 통한 혁명은 가능한 것일까?

이 때가지만 해도 아렌트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각은 혁명에 어떻게 하면 이성의 행위를 통해서 비폭력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3. 혁명론의 요지

혁명의 목적은 자유다

사회적인 것과 행복추구는 이런 자유의 구성에 방해가 된다

건국의 목적은 이런 자유의 법(권위)과 권력을 분할하는 세속적 정치질서 속에 이런 자유를 확립시켜야 한다

이런 자유의 제도화에 실패해 혁명의 정신을 후대에게 전달하지 못할 때 혁명의 전통이 상실된다.

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나 생존을 위해서 가난이라는 개입변수를 인정하는 체제에서는 자유를 논할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한나아렌트는 심각한 딜레마를 가지고 있었다.


서독과 동독

혁명론의 입장에서 새로운 헌법적 상황을 만드는데 있어서 새로운 헌법을 쓰는 개념으로서의 통일인가? 혹은 이전에 있던 헌법을 합치함으로써 얻어지는 공간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들 것인가?

여기에서 근본적인 서독의 고민은 재정 문제였다. 혁명을 위해서 만들어낸 공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자유에 방해가 되는 빈곤의 문제가 개입되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건국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분배의 문제에(권력의 분배, 생산수단의 분배, 이익의 분배) 그 목적을 두게 되면 반드시 그 혁명은 타락한다고 주장했다.

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공리주의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루소가 이야기하는 동정심이라는 것 때문에 사회는 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하게 된다. 최근에는 이러한 비통한자들을 위한 정치의 개념들이 나오는데, 사실 이런식으로 나가면 사회는 폭력적인 방식을 허물게 된다.

권위와 권력은 동시에 집중되면 안된다. 아렌트는 권력은 지도자에게 주어질 수 있지만, 권위는 suprem court에게 주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한 대법원에게 권위를 주는 것은 self-binding으로써의 자기 위임의 형식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아렌트는 constitutional promise라고 한다.

홉스가 이야기하는 리바이어던은 권력과 권위를 리바이어던이 동시에, 국가가 동시에 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국가는 전체주의가 된다.

권력과 권위를 분리 시키는 방식은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추구하는 방법이다.

권위를 분리시켜서 자발적으로 헌법의 공간에 스스로를 복종시킬 수 있는 혁명의 정신이 탄생한다면, 모든 혁명은 피를 흘리지 않고 스스로 성공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다음세대에게 전해주지 못하면 혁명은 다시 폭력과 손잡게 된다. 혹은 국가가 권위와 권력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의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절반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전통이 헌법적 약속을 자기구속의 개념으로 개인들에게 전해진다

재퍼슨과 메디슨의 논쟁을 통해서 법철학적인 논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 만들어진 그러니깐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권위로써 헌법을 다음세대가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이다. 메디슨에게는 다음세대가 다시 야만적인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험을 법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재퍼슨은 다음세대가 스스로 선택하여 수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국의 헌법은 amandment로서 추가되는 수정헌법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100년동안 한번도 헌법에 손을 댄 적이 없다. 이것은 권위와 권력의 분리가 제대로 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사법화 현상, 권력이 권위에 종송되는 현상도 만들어진다. 이런 식으로 볼 때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정치적 영역을 가지고 들어 가는 것이다.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를 인정하는 것은 권위의 문제로 상황을 가지고 갔는데, 사실은 이것은권력의 문제이다. 권력을 가진 국민들이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정치인들이 멍청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반대해야 하는 한나라당은 이익을 뒤로 감추고 권위를 권력보다 우선적으로 전략적 공천을 하면 자신들은 타격을 입지 않으면서 정치인들의 무지로 공격을 돌릴 수 있고, 이미 당에 속박된 권위의 주체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자신들의 이익이 포함된 후였다.

브루스 애커먼의 we the people 이라는 책에서 the people은 higher law making을 할 때만 권위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런 공간은 혁명의 공간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한나아렌트의 혁명론이다.

애커먼은 한나아렌트의 논의를 약간 반박하면서 higher law making할 때 사실은 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했다라고 하면서 분배의 문제를 껴 넣고 싶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fact finding에서 아렌트는 애커먼과의 비중이 달랐다.

제도를 셋팅할 때, 자유를 기반으로 셋팅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미국의 혁명은 한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퍼트남의 이론으로 사회적 자본에 비례해서 정치 참여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클린턴은 퍼트남을 새벽 5시부터 불러서 bowling alone이라는 의미에서 시민사회가 social capital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투자를 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현장에 나타날 수 있도록, 대중의 개념에서 부터 벗어나서 다중의 개념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는 활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혁명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1. 애초에 자유는 정치영역에 있었다

자유가 하나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사실로서 알려져 있는 장은 정치영역이었다.

우리가 자유의 문제를 언급할 정치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행위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항상 우리의 생각 속에 있다.


2. 정치적 자유는 내적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모든 정치 이론 속에서 당연시 하고, 심지어 전체정을 찬양하는 사람들까지도 여전히 고려해야만 한느 이 자유는 이간이 외부의 강제로부터 도피하여 자유롭게 느끼는 내적 공간인 내적 자유와는 정반대이다.

자아가 세계를 등지고 숨어 있는 내적공간inward space을 양심과 사유의 공간인 마음heart이나 정신mind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3. 자유는 타자, 공적영역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유 또는 그 반대를 우리 자신과의 교류inercourse가 아니라 타자와의 교류 속에서 깨닫게 된다.

자유는 분명 해방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삶의 필요로부터 자시을 해방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자유의 지위는 해방의 행위로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는 단순한 해방 이외에 동일한 지위에 있는 함께하는 타자들의 무리르 필요로 했고, 또한 그들을 만날 공통의 공적 영역을 필요로 했다.


4. 자유는 의지가 아니라 행위에 내제해 있다.

freedom is not identical with the will

진짜 자유로운 사람은 will하는 것을 can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치와 관련된 자유는 의지의 현상이 아니다

의지는 선과 악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띠지만 자유로운 행위는 동기와 의도된 목표로부터 자유로워야만하기 때문이다.


5. 무능력이 의지를 발견했다.   


6. 의지의 대결과 부자유  


7. 의지란 말은 의지의 패배에서 나왔다.   


8. 정치적 자유

정치적 자유는 반드시 의지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몽테스키외의 경우에도 행위자가 역량을 결여했다면 더 이상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자유와 시작할 수 있는 능력
1.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to act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우리가 행위하다 to act라는 두개의 동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어는 동사 archein과 prottein 이 to act의 의미이다

라틴어는 아게레 agere와 게레레 gerere가 to act의 의미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완수하는 일은 혼자시작한다고 할 지라도 주변의 타자의 도움없이 이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시작되면 계속해서 그것이 이끌어져 가는 유인이 있어야 하는데 타자가 등장한다.

따라서 자유는 타자가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행위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존재하고 그 존재하는 타자와 완성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행위가 추구하는 것은 자유이다. 자유는 이렇게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

이것이 한나아렌트가 말하는 탄생성'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주된 정신이 행위라는 것을 말해주고, 행위의 결로으로써 행위의 과정으로써 혁명은 결국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내는 건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적으로 볼 때 extra ordinary dimension에서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새로운 시작을 변화라고 한다면 변화는 새로운 시간과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시간 개념을 가지고 그 개념 안에서 행위할 때 혁명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2. 자유와 시작의 동일성

다른 방식이지만 라틴어에서도 자유롭게 됨과 시작함의 의미는 서로 맞물려 있다.

로마의 자유는 로마의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산이었다.

후손의 자유는 선조들이 도시 건설을 통해 구축했던 시작과 결부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업적을 관리해야 했고 건국의 토대를 증대해야 했다.

로마의 시작은 로마적 자유의 진정한 요소를 담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역사를 정치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도시의 건설로부터, 즉 로마적 자유의 보증인 도시의 건설과 더불어 시작했다.


과거와 미래 사이

아렌트는 자신의 이론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카프카의 히'라는 비유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를 표현하면서 이것을 객관적으로 중립적인 점프가 필요하다.

의지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우리를 끌어당긴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나'가 존재하게 된다.

시간 속으로 틈입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어떠한 사실이나 역사적 이론들 사이에 나라는 현실의 존재가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그래서 미래를 끌어 당기는 사건으로서 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파르헤이트라는 과거의 시간대를 틈입하여 스스로를 예외적 시간 안에서 자유를 위해서 주체하는 개인인 내가 등장하는 시간이다.


민네이션

아렌트의 논리는 그래서 국가를 가진 사람들,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의 논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자유를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게 되는, 이성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못하는 이론적 제약을 가지게 된 것이다.

fact finding에 있어서 어떻게 data를 정보로 바꿀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시작된다. 삼위 안에서 우리는 행위하고 자유가 진리로 인해서 완성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사유하지 않음은 그래서 과거의 시간대로 부터 날아오는 악을 인정하는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과거의 악이 미래로 이어지게 만드는 굴곡된 시간이 만들어지지 않음으로서 행위하지 않게 되는 지점이 만들어진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게는 사유하지 않음으로로써 과거로 부터 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그대로 미래로 넘겨줘 버리게 된다. 그런 인간에게는 미래도 과거도 다르지 않고 자신의 인생이 탄생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상은 탄생성이라는 것의 반대로 사멸성을 가진 하이데거의 사상 안에 누룩처럼 퍼져 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거는 이제 선택적으로 존재한다. 보수는 어떤 과거를 미래로 넘겨주는 역할을 통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행위가 나오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constitutioanl democracy와 constitutionalism

헌법적 민주주의와 헌법주의는 다르다.

demos가 법에 종속하는 제도가 최상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에 종속하는 주체는 demos라는 것을 볼 수 있다.

legal constitutionalism은 단속을 위해서 존재한다.

다음 흐름이 political constitutionalism이 발라미에 의해서 법안에 갖히 데모스를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나오는 개념이다.

state of exception 예외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상으로 파고드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agmabem의 논리이다.


헌법주의, 식민지

헌법이 최고라는 식으로 정립되어 버리는 최대의 국가는 식민지가 된다.

이런 국가에서는 정당성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악의 평범성, 용기없음

용기 없음으로써 생각없음이 만들어진다.

두가지의 스펙트럼이 발생한다. 생각없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식인의 책무가 나오는가 하면 용기 없음을 극복하는 테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국가적인 차원까지 수직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또한 발생한다.


하이데거 , 아렌트

하이데거는 사멸성의 입장에서 사유를 전개한다.

인간은 사멸하는 순간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의 시작이다.

사명성은 탄생성에 반대하고, 사유를 행위에 배치시킴으로써 스승의 테제를 모두 반박하는 아렌트를 볼 수 있다.

탄생성이 드러나더라도 망각'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자연스럽게 사멸성의 순간에서야 사유하기 시작한다.

탄생성이 망각되지 않도록 계속 시작하는 행위가 중요하다. 이것은 계시의 역할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사유의 역할은 기억이다.

역사교육이 사라지만 사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는 유서없는 유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히틀러는 과거의 어떤 부자유와 정체성을 망각하게 만듬으로써 과거의 일차원적 생각의 범주가 자연스럽게 미래로 넘어가는 지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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