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지젝사이, 알튀세르
한림국제대학원_정치커뮤니케이션
김헌태_지젝 강의
라캉, 지젝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과 라캉을 통해서 헤겔을 다시 해석하는 일, 고전적 모티프(계급투쟁, 상품물신숭배)를 새롭게 해석하여 이데올로기 논의를 부활시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 포스트모던시대에 이데올로기의 분석은 이제 끝났다는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이데올로기의 분석이 없이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읽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 판타지, 유령과 같은 라캉이 사용한 개념을 빌려와서 이데올로기 논의를 다시 시작한다.
알튀세르, 지젝
- 지젝은 알튀세르가 이야기한 대타자 호명이론에대해서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고, 판타지와 유령의 출몰에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라캉이 이야기한 윤리적 차원과 연결됨을 설명했다.
-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부활시킴에 있어 라캉은 정신분석학에 윤리적 차원을 부여했다면, 지젝은 이러한 윤리적 행위에 이데올로기 분석이라는 정치적 기획을 가미한다.
- 지젝이 보기에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은 그것이 붕괴되는 혹은 통하지 않은 균열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호명에 의해서 불려진 주체는 대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 그러한 호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언어적으로, 담론 구조 안에서 받아 들였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의식의 차원이 아닐수도 있고 더욱이 무의식의 어떤측면에서는 더더욱 변화적이고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다시 라캉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무의식에 대한 논의를 하게되면서 부터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사용되는 방식이 사실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은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호명이론도, 이데올로기의 목적도 바뀌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유령, 지젝
- 라캉이 이야기한 실재(the Real)은 항상 상징계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쫓겨나는 존재이다. 따라서 항상 재현이 불가능하다. 마치 유령과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 그러나 유령은 상징계 안에 항상 침범한다. 이데올로기로 구성된 질서 안에 형체도 없기 근원도 없이 불쑥 등장해서 상징계를 온통 휘저어 놓는다.
- 라캉에 의하면 유령은 상징계 안에서 포착되지 않는 실재계의 것이기 때문에 유령이 출몰함으로써 상징계는 자신에게 없는 실재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상징질서의 잠재적인 완성으로 유령으로 부터 시작된다.
- 생각해보면,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현실 안에 없는 무엇인가가 등장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환타지, 지젝
- 보통 환타지라고 하면 현실에는 없지만, 있을 것 같은 세상이다. 그 세상은 살아보고 싶은 세상, 경험해 보고 싶은 세상, 이루어졌으면 좋은 세상에서부터 반대로 절망적인 세상, 다가오지 말아야할 세상도 포함한다.
- 이러한 세상을 보는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고 부르며 그들이 보았던 환타지를 재현내겠다는 '비전' 선포를 믿고 싶어 했다.
- 그리고 그 환타지 속에도 여전히 배회하고 있는 유령들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 축축하게 덮고 있는 이끼같은 어둠의 그림자를 엿보기도 한다. 탐욕이라던가, 불의라던가, 사기라던가 하는 유령들 말이다.
- 이데올로기의 투사로 미래에 제시된 환타지의 구조물들도 마찬가지로 투사하는 사람의 과거로부터 기록된, 내제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라캉으로 돌아가야만 해결되는 부분들이 발생한다.
- 바로 무의식에 접근하는 것 말이다. (만약 의식에 접근했다면 말, 상징세계, 담론 안에서 그것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징적 허구, 판타지
- 상징적 허구가 판타지는 아니다. 상징적 허구는 상징계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데올로기로 부터 탄생한 인공물이다.
- 그러나 판타지는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계에서 날아온 현실에 존재하는 않는 실재이다.
-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해보자. 매트릭스가 3편까지 가게 되면 상징적 허구의 세계, 이데올로기의 구성체인 매트릭스 안에서 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스미스요원이 나온다. 스미스요원은 상징적허구를 만든 아키텍처의 말도 듣지 않는 일종의 버그로써 모든 매트릭스 안의 존재들을 버그로 만든다. 어떻게 보면 매트릭스 안에 상징적 질서를 지키려는 경찰의 역할을 하던 스미스는 이데올로기의 조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간다.
- 이 때 등장하는 것은 실재계에서 날아온 주인공 네오이다. 네오는 스미스와 같은 의미에서 허구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혹은 안티고네와 같은 상징적 질서의 시간대와 공간, 중력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존재이다.
- 두 존재가 매트릭스 안에서는 안티고네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점은 네오는 실재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트릭스라는 체계 안에서 진정한 유령은 스미스가 아니라 네오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스미스는 네오와의 싸움의 마지막 수단으로 네오와 자신을 동일하게 만든다. 결국 네오는 스미스가 된다. 문제는 스미스는 상징질서를 정복했기 때문에 절대 죽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 그러나 네오는 실재계 안에서 날아왔기 때문에 물리적 죽음이 가능한 존재이다. 영화의 구성 상 물리적 죽음은 매트릭스 안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네오가 실재계에서 죽음으로써 네오와 같이 동일시 코드화된 스미스도 죽게 된다. 결국 네오는 전기충격요법?에 의해서 부활하지만, 스미스는 영원히 그 생명을 다하게 된다.
안티고네, 윤리적 요청
- 이데올로기와 안티고네의 윤리적 행동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 라캉에게 안티고네는 상징질서를 넘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에서 충동으로, 상징질서에서 실재 차원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사건이다.
- 지젝에게 안티고네의 행동은 판타지와 유령을 가로질러 실재와 대면하는 사건이 초자아와 현실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상징질서에 맞서는 대타자의 불완성정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행위, 도덕
- 법이 먼저가 아니라 행위가 먼저라고 한다면, 법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 존재한다.
- 크레온이 안티고네의 행위에 대비해서 법을 만든것처럼, 항상 행위는 법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법은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행위를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 도덕법은 의무를 상정하는데, 사실은 그 의무를 행위에 기반하지 않고는 상정할 수 없게 된다.
- 도덕법이란 내가 올바르게 그 행위를 수행했다는 어떤 보장도 제공하지 않는다.
- 도덕적 행위를 관장하는 곳이 상징질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도덕적 행위를 관장하는 것은 철저하게 실재계이다.
유령, 행위
- 지젝을 이해한대로 유령을 말한다면, 상징세계가 규정해 놓은 법과 도덕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장치에서 실재계의 옷을 입고 그것들의 통제를 드러내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유령이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정치의 과정이 아닐까?
- 그런 의미에서 유령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철저하게 판타지처럼 들리지만, 판타지에 뛰어들고 싶어서 유령이 되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세계는 사실은 판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판타지는 칸트식으로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실재계에 대한 부름이면서, 원래의 것으로 부르는 것이다.
지젝, 라캉
- 지젝과 라캉이 동시에 추구했던 것은 결국 정치의 문제였던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는 가치를 정하는 문제이면서 행위를 우선시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행동을 이끌어 내어 상징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가는 작업말이다.
- 그런 의미에서 누가 더 현실적인 실재를 구성하는가는 안티고네와 같은 불편한 사람들이 진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더욱 사회적인 여론과 담론이 만들어낸 상징계 안에서 횡단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을 기대하게 된다.
- 라캉의 논의를 아리스토텔레스 시학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젝 역시 오독 혹은 미독으로 인해서 그 선에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통한 정치적 행위를 드러낸 것에서는 라캉과 지젝이 동료로 만나게 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