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철학일기

하늘이 마음 속에 있다

처음읽는 한국현대철학_동학과 최제우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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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년은 한국 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이라는 거대한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해다.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들이 정치적 주체로 당당히 부상한 사건이며, 갑오개혁은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 한 시도였다. 이 사건들은 500년 동안 이어진 조선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 신호탄이었다. 사실 조선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흐름이다. 그 시발점은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알려진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평안도 농민전쟁은 단순한 민란을 넘어 정권 자체를 비판하고 조선 왕조의 멸망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된다. 이후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민란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변혁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갑오년의 혁명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의식을 동학이라는 구심점으로 통일한 결과물이었다.


동학은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기에 민중의 삶 속에서 발흥했다. 특히 최제우가 주창한 '시천주' 사상은 동학의 핵심이며, 이후 최시형과 손병희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동학은 인간을 하늘처럼 존귀하게 여기는 평등주의를 내세워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는 당시 신분 사회의 불합리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동학의 수행 방법인 수심정기는 누구나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평등한 길을 제시했다. 또한 개벽 사상을 통해 민중이 세상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미래를 꿈꾸게 했다. 이러한 동학의 정신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항일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의식의 뿌리가 되었다. 이제 최제우의 생애부터 동학이 제시한 새로운 세상의 비전까지 상세히 살펴보려고한다. 과연 혁신을 넘어 혁명까지 넘어가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보자.


성장과 고뇌의 시기 (1824 ~ 1854)

1824년: 경주 가정리에서 출생.

1831년 (8세): 한학 공부 시작. 총명함으로 주위의 기대를 받음.

1840년 (17세): 아버지 최옥 사망.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함.

1844년 (21세): 울산으로 이주 후, 전국을 떠도는 10년간의 방랑(구도) 시작. 유·불·선과 서학을 두루 살피며 민생의 고통을 목격함.


구도와 깨달음의 시기 (1855 ~ 1860)

1855년 (32세): 을묘천서 사건.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수행 중 이인(異人)으로부터 신비한 책을 받음.

1856년 (33세): 양산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49일 기도 수행.

1859년 (36세): 가족을 이끌고 고향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옴. "도를 얻지 못하면 내려오지 않겠다"며 불출산(不出山) 수행 선언.

1860년 (37세): 경신득도 (4월 5일). 하늘님으로부터 '시천주'의 진리와 영부, 주문을 받으며 동학 창시.


포덕과 교세 확장의 시기 (1861 ~ 1863)

1861년 (38세): 본격적인 포덕(전도) 시작. '용담유사'(한글)와 '동경대전'(한자)의 기초가 되는 글들을 집필함. 호남 지역까지 교세가 확장됨.

1862년 (39세): 경주 관가에 일시 체포되었으나, 민중들의 탄원으로 석방됨. 이후 접제(接制) 조직을 만들어 교단을 체계화함.

1863년 (40세): 8월, 최시형에게 북도중주(北道中主)의 직책과 도통을 전수하여 2대 교주로 삼음. 12월, 조정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용담정에서 체포됨.


순교 (1864)

1864년 (41세): 1월,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철종의 죽음으로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됨.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 죄목으로 참형을 당하며 순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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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제우의 생애와 동학의 발흥 및 전개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1824년 경주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학자였으나 최제우는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앞길이 막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을 체험하며 차별에 대한 반발심을 키워갔다. 20대 이후 그는 10년간 전국을 유랑하며 조선 사회의 비참한 현실과 민중의 고통을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유교나 불교가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도를 찾기 위해 용담정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1860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한울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세상에 이 도를 가르치라는 명을 내렸다.


최제우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끝이 없는 커다란 도'라는 의미에서 '무극대도'라 불렀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를 내세워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했다. 동학은 평등한 세상을 갈망하던 민중들 사이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조정은 동학을 천주교(서학)와 같은 사학으로 규정하고 엄격히 탄압했다. 최제우는 결국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당하며 순교했다. 그가 처형되기 직전 제자인 최시형에게 동학의 도통을 전수하며 교단은 유지되었다. 최시형은 도망 다니는 고난 속에서도 교단을 정비하고 포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가사집인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최시형의 노력 덕분에 동학은 단순한 신앙을 넘어 체계적인 사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시천주'를 '사인여천'으로 발전시키며 평등주의를 더욱 구체화하고 실천했다. 동학은 1894년 농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공격으로 혁명은 실패했고 최시형 역시 처형되고 만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가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며 근대적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친일 세력과 결별하고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천도교는 1919년 3·1 운동의 핵심 주도 세력으로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지원했다.


동학은 500년 조선 왕조의 유교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기능했다. 최제우가 씨앗을 뿌리고 최시형이 키웠으며 손병희가 민족 운동으로 꽃피운 셈이다. 동학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내 몸에 모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사회에서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동학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중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특히 '사인여천'과 '인내천' 사상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동학의 전개 과정은 고통받는 민중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투쟁한 역사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자산이 되었다.


동경대전 (東經大全)

'동경대전'은 동학의 한문 경전으로, 창시자 최제우가 한문으로 작성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주로 동학의 철학적 배경과 종교적 원리, 그리고 포교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포덕문(布德文): 동학의 창시 경위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천명(天命)을 기록하고 있으며, 서학(천주교)에 맞서 동학을 세운 이유를 밝힌다.

논학문(論學문): 동학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서학과의 차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시천주(侍天主)' 사상의 핵심을 다룬다.

수덕문(修德文): 동학 신도가 지켜야 할 도덕적 수양과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치며, 정성과 공경의 자세를 강조한다.

불연기연(不然其然): 세상의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그러한' 오묘한 원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하며, 한울님의 섭리를 역설한다.


용담유사 (龍潭遺詞)

'용담유사'는 부녀자와 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 가사 형식으로 쓰인 경전이다. 노래하듯 읽을 수 있어 민중들 사이에 동학 사상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용담가(龍潭歌):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용담정의 경치와 득도 과정에서의 감흥을 노래하며, 동학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가사다.

교훈가(敎訓歌): 신도들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규범과 도리를 가르치며, 수련을 통해 군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안심가(安心歌):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동학을 믿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검결(劍訣):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의지를 담아 칼춤을 추며 부르던 노래로, 낡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개벽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2.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신다_시천주


'시천주'는 한울님을 내 몸속에 모시고 있다는 동학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여기서 한울님은 인간 세상 너머에 있는 초월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 실존한다. 최제우는 내 안에 모신 존재를 '천주'라고 표현하여 서학과의 공통점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서구 제국주의의 정신적 지주였던 서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동학은 서쪽에서 온 서학에 대비하여 동쪽의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은 우주의 근원적 기운인 '지기'를 내 몸에 받아들임을 뜻한다. 최제우는 정성을 다해 한울님의 기운이 내리기를 바라는 강령주를 수행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인간의 본질이 곧 신성함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선언이었다.


시천주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옹호하는 강력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울님이 모든 사람의 몸 안에 있다면, 양반과 상민의 차별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신분, 빈부,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최시형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을 주창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여종이나 어린아이조차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 극진히 대접했다.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이는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 모든 존재가 한울님이라는 사상은 훗날 손병희에 의해 '인내천'으로 완성되었다. 시천주는 인간을 신분적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꿈꾸게 한 힘이었다.


시천주 사상은 종교적 의례인 제사의 형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최시형은 벽에 신위를 모시는 기존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항아설위'를 제안했다. 조상의 혼이 내 몸을 있게 한 근원이며, 내 몸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내 몸을 향해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제사가 외부의 신령에게 비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의 신성을 확인하는 일임을 의미한다. 인간 자신이 곧 신성함의 거처라는 깨달음은 자아에 대한 혁명적 인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은 민중들이 스스로 삶의 주권자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시천주는 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학의 핵심 동력이었다.


시천주 사상은 우주적 존재를 모신 인간이 사회의 명분을 핑계로 차별받을 수 없음을 선언했다. 한울님을 모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다. 따라서 군주나 지배층이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한울님의 뜻을 어기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논리는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중이 정치 주체로 나서는 토대가 되었다. 최시형과 손병희는 시천주를 바탕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동학도들은 시천주 사상을 실천하며 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시천주는 단순히 종교적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해방의 철학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시천주 사상은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의 소중한 사상적 뿌리로 재평가받고 있다.


동학사상의 변화

시천주(侍天주)가 인내천(人乃天)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동학이 단순한 종교적 체험을 넘어 보편적인 인권 사상과 사회 운동으로 진화하는 핵심 단계다.

시천주(侍天主)에서 양천주(養天主)로 : 최제우가 주창한 시천주는 "하느님을 내 몸에 모셨다"는 자각에서 시작한다. 이후 2대 교주 최시형은 이를 구체적인 실천 원리인 양천주(養天주)로 확장했다. 내 안의 하느님을 모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성과 공경으로 그 신성을 길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등장 : 최시형은 시천주의 원리를 인간관계로 넓혀 사인여천을 강조했다. "사람 대하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이 가르침은 신분제가 엄격했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혁명적인 메시지였다. 내 안의 하느님이 소중하듯, 타인의 몸속에 있는 하느님도 똑같이 귀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논리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 동학은 천도교로 개편되며 인내천이라는 표어를 전면에 내세운다.

철학적 완성: '모심(侍)'의 단계를 넘어 인간과 하늘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를 선언한 것이다.

인권 운동으로의 승화: 사람이 곧 하늘이기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는 근대적 인권 의식의 토대가 되었다. 이는 3·1 운동과 어린이 운동(방정환) 등으로 이어진다.


우음_최제우의 시


남쪽의 별들 원용하게 가득 차고, 북쪽의 은하수 돌아올 때, 대도는 하늘처럼 세상의 시간을 벗으리라.

거울을 만리에 투영하니 눈동자가 먼저 깨닫고, 달이 삼경에 솟으니 뜻이 홀연히 열리도다.

누가 비를 얻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온 세상이 바람 따라 임의로 오고 가네.

겹겹이 쌓인 먼지, 내가 씻어 버리고자, 표연히 학을 타고 신선대로 향하리라.

사람이 세간에 나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도를 묻는 것을 오늘날 주고받는 일이겠지.

진리의 핵심 아직 깨닫지 못하지만, 뜻이 지혜의 문에 있음은 반드시 나와 같으리라.

하늘이 만민을 낳음에 도 또한 낳았으니, 각기 기상이 있음을 나는 몰랐었네


3. 내 몸을 수양하다_수심정기


동학의 수행 방법인 '수심정기'는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음에도 현실이 어지러운 이유가 수련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이기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교의 도덕성인 '인의예지'가 옛 성인의 가르침이라면, 수심정기는 내가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마음을 맑게 하고 그 기운을 깨끗하게 유지할 때 비로소 내 안의 한울님이 드러난다. 수행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르게 하고 도덕적 의지를 굳건히 하는 일이다. 동학은 성리학처럼 10년 넘는 공부를 요구하지 않으며 정성과 기도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성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동학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동학에서 마음과 기운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다. 맹자는 기운이 마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동학의 시각은 이와 조금 다르다. 최시형은 만물의 근원인 한울님이 곧 기운이며, 인간의 마음도 그 기운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수심정기는 한울님으로부터 나온 내 마음을 바르게 보존하고 모시는 행위다. 내 몸 안의 한울님을 바르게 모시지 못하면 재앙과 불운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마음 수양은 기운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이다. 동학은 마음 수양에 무게를 두는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더 실천적인 길을 제시했다. 기운과 마음의 조화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도덕적인 행위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동학의 수련은 산속의 고립된 생활이 아니라 철저히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다. 최시형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일상적인 행위조차 한울님을 모시는 수행으로 보았다. 이를 '이천식천'이라 하는데, 한울님의 기운이 담긴 음식을 통해 내 안의 한울님을 기른다는 뜻이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생명력과 소통하는 종교적 의례다. 따라서 음식을 대할 때나 타인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경건한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노동과 생활을 신성시하며 민중의 삶 전체를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밥을 짓는 아낙의 마음가짐조차 수심정기의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매우 파격적이다. 민중들에게 밥은 곧 한울님이었으며, 밥을 먹는 일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축제였다.


최제우는 깨달음을 얻은 후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21자의 주문을 외우도록 권유했다. 주문은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어 이를 정성스럽게 외우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가능하다. 복잡한 한문 경전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주문은 가장 쉽고 확실한 구원의 통로였다. 주문 수련은 내 안의 한울님과 소통하고 지극한 기운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성이 부족하면 한울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므로 마음을 다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동학의 수행법은 일상과 동떨어지지 않았으며 누구나 접근 가능한 용이성을 지녔다. 글을 모르는 농민들도 주문을 외우고 밥을 경건히 먹으며 스스로를 주체적인 존재로 여겼다. 수심정기는 민중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4. 평등한 새 세상의 주인이 되다_개벽


동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인간상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군자'다. 과거에 군자가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면, 동학은 이를 도덕적 인격체를 지칭하는 말로 재정의했다. 군자는 신분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도덕적 책임감을 가진 모든 개인이 될 수 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되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으며 이를 '개벽'이라 불렀다. 개벽은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우주의 근원적 원리에 따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는 태초의 개벽 이후 인간이 주체가 되어 여는 '다시 개벽'의 시대를 선포했다. 다시 개벽된 세상에서는 모든 백성이 정치적 주체로 당당히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사상은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혁명적인 비전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개벽 사상이 현실 정치로 표출된 거대한 민중 운동이었다. 1892년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에서 시작된 흐름은 점차 사회 개혁으로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폭정에 항거하며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들은 '왜놈과 양놈을 몰아내고 왕의 길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강령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드러냈다. 농민군은 전주화약 과정에서 자신들이 국가의 운영 주체임을 명확히 인식하며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했다. 동학의 사회주의 의식은 민중이 더 이상 지배의 대상이 아닌 역사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비록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민중의 가슴 속에 심어진 주체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농민군은 무력 항쟁을 통해 신분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열망을 증명했다.


개벽 사상은 조선의 신분 질서를 유지한 채 지배층만 바뀌는 역성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모든 이가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기에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동학의 주장이다. 농민들은 스스로를 '보국안민'의 주체로 자각하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노력했다. 실패 이후에도 동학도들은 일제의 침탈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며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특히 손병희는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3·1 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주권 회복을 꾀했다. 동학은 개인의 해방을 넘어 공동체와 국가의 안녕을 책임지는 실천적 사상으로 진화했다. 주체로서의 개인은 자연스럽게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며 나라를 보위하는 주역이 된다. 보국안민의 정신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동학의 개벽은 인간이 우주의 근원과 소통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가 됨을 뜻한다.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손병희를 거치며 동학은 민중의 의식을 체계적으로 혁신했다. 한울님을 모시고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농민과 천민들에게 강력한 힘이 되었다.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부패가 심화되던 시기에 동학은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한 등불이었다. 개벽은 단순히 먼 미래의 예언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실천해야 할 삶의 태도였다. 동학도들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의지를 실천하며 조선 사회의 낡은 관습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이들의 활동은 훗날 천도교의 활동으로 이어지며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개벽 사상은 민중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가장 선명한 선언이었다.



5. 동학의 한계와 의의


동학 사상은 사회·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가능하게 하며 민중들 사이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싹튼 민중의 자각은 동학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사상으로 정립되었다. 동학은 민중의 고통을 덜어줄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출했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성의 바탕에는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모신 '시천주'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그가 기존 사상과 단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학은 그 사상의 적용 범위를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민중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동학은 유교와 달리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일상적인 수행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중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한울님을 모시고 모든 존재를 경건하게 대하는 태도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고는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동학은 임금이나 신하 같은 특정 계급의 책무가 아닌, 모든 사람의 책무로서의 '시천주'를 강조했다. 이러한 보편성은 동학을 단순한 종교를 넘어선 사회 변혁의 주체로 기능하게 했다. 다만 동학 사상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천주'라는 종교적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한울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동학의 가르침은 큰 영향력을 끼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동학이 지닌 종교적 외피 때문으로, 다른 사상들과의 차별점이자 동시에 한계점이기도 했다.


동학에는 극복해야 할 유교적 요소와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모신 주체라는 동학의 근본 사상은 여전히 빛나는 가치를 지닌다. 인간이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적 존재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관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낯설고도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동학은 일반 백성들의 일상적인 수행만으로도 이러한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동학의 시천주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비록 서구 근대의 산물인 자유와 평등과는 그 출발점이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유사했다. 동학은 한국 고유의 철학적 바탕 위에서 근대적 가치를 자생적으로 싹틔운 사례다.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가 붕괴되던 시기에 동학은 백성들의 의식을 체계적으로 결집했다. 동학은 노동하는 민중들이 사회 운영의 주체가 되는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 사회를 지향했다. 이는 서양의 철학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 속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동학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삶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논리를 찾아내었다. 이러한 사상적 노력은 훗날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민주화 운동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동학은 한국 현대 철학의 진정한 시발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평등과 주권의 가치는 이미 동학의 가르침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었다. 동학의 정신을 되새기는 일은 곧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을 찾아가는 소중한 여정이다.


해월 최시형과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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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의 몸 안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은 인간을 도구화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큰 울림을 준다. 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농민들의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동학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층의 부패라는 이중고 속에서 민중 스스로가 구원의 길을 찾아낸 위대한 여정이었다. 우리는 동학을 통해 고유한 한국적 가치가 어떻게 근대적 사상으로 승화될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은 인종과 국경을 넘어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이 시대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일상 속에서 정성을 다하고 타인을 하늘처럼 섬기는 자세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동학은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주인이 될 때 세상이 비로소 개벽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과거 동학도들이 꿈꿨던 '다시 개벽'의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성숙한 민주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리된 이 내용이 동학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학의 사상을 발판 삼아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하늘을 모시고 있음으로.


https://youtu.be/z31gzqUnXZY?si=YkWEllpKzEnPM3QS

수운 최제우의 대도의 깨달음은 어쩌면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이 열리는 오로지 직관에 의한 초월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루시의 마지막 장면과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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