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철학일기

일본 근대화는 누가 기획했을까?

니시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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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지성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근대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을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니시 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양대 산맥이다. 니시아마네의 경우에는 한국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만엔권 지폐 앞면에 나와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서구 문물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일본에 이식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한 결론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전략은 매우 판이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은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어 갔는지 그 궤적을 추적하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서 사실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외생성을 극복해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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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시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든 근대성


니시 아마네가 학문적 체계와 논리적 기반을 닦는 데 집중했다면, 후쿠자와는 실용적 지식 보급에 힘썼다. 니시는 국가를 위한 엘리트 철학을 설계했고, 후쿠자와는 개인의 독립을 위한 실학을 널리 전파했다. 이들의 대조적인 삶은 근대 동아시아가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겪은 두 가지 길을 보여준다. 한 명은 관료 철학자로서 국가의 뇌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민간 계몽가로서 대중의 입이 되었다. 우리는 이 두 거인의 비교를 통해 근대 지성이 지닌 양면성과 그 복잡한 층위를 깊이 이해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식의 보편성 뒤에 숨겨진 서로 다른 지향점과 투쟁의 역사를 마주할 시간이다. 이제 니시와 후쿠자와라는 두 개의 렌즈로 근대 지성사의 거대한 풍경을 다시 한번 조망해 본다.


니시 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유는 각기 다른 철학적 토양 위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났다. 니시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형이상학 및 실증주의를 깊이 파고들며 학문의 엄밀성을 추구한 인물이다. 반면 후쿠자와는 영국과 미국의 공리주의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유용성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니시가 '철학'이라는 번역어를 만들며 학문의 근본 원리를 세울 때, 후쿠자와는 그 철학이 공허하다 비판했다. 후쿠자와는 철학보다는 '독립'과 '자존'이라는 현실적 가치가 일본을 강하게 만든다고 굳게 믿으며 실천했다. 이러한 두 인물의 입장 차이는 일본 근대 교육과 정치 체제 형성에 각기 다른 흔적을 남겼다. 니시는 상층부의 지적 질서를 구축했고, 후쿠자와는 하층부의 의식 개혁을 주도하며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들의 논쟁과 협력은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처했던 고뇌와 시대적 과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근대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근대성의 전제를 일본을 통해서 배웠다. 흔히 말하는 외생적근대화라고 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이미 서양에 존재하는 실재를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해서 상징계에 넣어놓고, 그 상징계의 테두리 안에서 '상상계'가 사로잡힌 상태로 근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미 정해놓은 1:1 매칭관계에서 우리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나 뉴라이트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코끼리의 '각인학습 이론'처럼 처음 근대화를 배운 곳이 일본이라서 일본인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하고서는 실학에서 동학으로 넘어가야한다. 니시아마네의 접근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접근을 보면 미묘하게 다르지만 역시 같은 지점은 '부국강병'이라는 근대화를 무기로 제국이 되고 싶어했던 열망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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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편적 철학 vs 실용적 철학


니시 아마네는 모든 학문의 정점에 '철학'이라는
보편적 원리가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상가다.


그는 개별 지식들이 파편화되는 것을 경계하며 이를 하나로 묶어줄 논리적 중심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인간의 실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후쿠자와는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은 오늘 당장 빵을 구울 수 있는 지식"이라며 실학을 강조했다. 그는 니시가 만든 '철학'이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너무 어렵고 공허하게 들릴 것을 우려했다. 니시는 철학을 통해 문명의 깊은 원리를 탐구하려 했지만, 후쿠자와는 문명을 부강하게 만드는 기술에 집중했다. 이러한 차이는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우선순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라 볼 수 있다. 니시는 사유의 혁명을 꿈꿨고, 후쿠자와는 생활의 혁명을 꿈꾸며 각자의 지적 영토를 구축했다. 니시의 철학은 상아탑 안에서 정교해졌고, 후쿠자와의 실학은 저잣거리와 신문 지상에서 생동감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니시는 학문의 깊이를 더해주었으나, 후쿠자와는 학문의 넓이를 대중에게 선물한 셈이 되었다.


니시 아마네가 네덜란드에서 실증주의를 배울 때, 후쿠자와는 서구의 기차와 통신 장비에 경탄했다. 니시는 보이지 않는 '법칙'을 찾는 데 몰두했으나, 후쿠자와는 눈에 보이는 '제도'를 바꾸려 했다. 후쿠자와의 대표작인 '학문의 권장'은 철학적 사유보다는 개인의 문맹 퇴치와 독립심 배양을 목표로 했다. 니시가 '백학연환'에서 학문의 위계질서를 세웠다면, 후쿠자와는 모든 학문이 평등하게 삶에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니시의 철학적 태도가 자칫 과거 성리학적 관념론으로 회귀할까 봐 끊임없이 경고하고 경계했다. 후쿠자와에게 지식이란 남에게 과시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도구가 되어야만 했다. 반면 니시는 지식이 지닌 논리적 아름다움과 세계를 설명하는 완결성을 중시하는 미학적 사유를 가졌다.


이러한 두 사람의 갈등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서구의 지적 유산을 수용할 때 겪은 전형적인 갈등이다. 철학적 깊이와 실용적 유용성 중 무엇을 먼저 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분분하다. 니시와 후쿠자와는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근대 일본 지성사의 두 바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학문적 정의에 있어서도 니시는 'Science'를 '과학'으로 옮기며 지식의 분절과 전문성을 지향했다. 이에 반해 후쿠자와는 서구의 'Civilization'을 '문명개화'라는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운동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니시는 교실 안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였으나, 후쿠자와는 사회 전체를 가르치는 계몽 운동가였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정확히 대칭되는 존재나 학문의 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 근대화라는 장에서 이 둘의 대립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변증법적 발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니시가 만든 '주관'과 '객관'이라는 용어는 후쿠자와에게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어려운 한자어에 불과했다. 후쿠자와는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서구의 합리성을 설명하여 누구나 근대인이 되게 하려 했다. 니시의 사유는 전문가 집단에 의해 계승되었고, 후쿠자와의 사유는 대중의 상식이 되어 시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철학자 니시'와 '계몽가 후쿠자와'라는 뚜렷한 대비를 만들며 일본 지성을 풍요롭게 했다. 니시는 지식의 수직적 체계를 세웠고, 후쿠자와는 지식의 수평적 확산을 이끌며 근대화를 완결 지었다. 니시의 사유가 정밀한 시계의 톱니바퀴라면, 후쿠자와의 사유는 그 시계를 돌리는 거대한 동력원이다. 오늘날 우리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 속에는 이 두 사람의 치열한 논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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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료 철학자 vs 민간 계몽가


니시 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결정적인 차이는
국가 권력과 개인의 삶 중 어디에 서 있느냐였다.


니시 아마네는 메이지 정부의 핵심 관료로서 국가 시스템을 내부에서 설계하고 운영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지식을 활용해 군대의 훈령을 만들고, 법령의 기초를 닦으며 국가를 보필했다. 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부의 관직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평생 야인으로서 민간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정부보다 무서운 것은 지각없는 국민"이라며 민간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 사명을 두었다. 니시가 '국가의 뇌'로서 군인칙유를 썼다면, 후쿠자와는 '민간의 입'으로서 게이오 대학을 세웠다. 니시는 위로부터의 하향식 근대화를 주도했고, 후쿠자와는 밑으로부터의 상향식 근대화를 끊임없이 꿈꿨다. 이러한 지식인의 처신 차이는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권력의 균형을 이뤘다. 니시는 질서와 통치를 중시하는 안정적인 국가의 틀을 마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 후쿠자와는 비판과 독립을 강조하며 국가 권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시민의 역할을 정립했다.


니시 아마네의 관료적 사유는 국가를 거대한 유기체로 보고 이를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개인의 사유조차 국가의 부강함이라는 목적 아래 일사분란하게 통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후쿠자와는 "한 나라의 독립은 곧 한 개인의 독립에서 시작된다"고 외치며 자립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의 보조금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언론 활동과 교육 활동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냈다. 니시는 관제 지식인으로서 서구의 제도적 우수성을 일본의 전통적 지배 구조에 이식하는 데 능했다. 후쿠자와는 민간 사상가로서 서구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일본인의 뼛속까지 스며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니시의 철학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매뉴얼이 되었고, 후쿠자와의 실학은 개인의 삶을 개척했다. 니시는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를 옹호했고, 후쿠자와는 지방 분권과 자발적 결사의 힘을 믿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나아갈 방향을 두고 끊임없이 충돌하고 교차했다. 니시는 통치 기술로서의 지식을 탐구했고, 후쿠자와는 저항과 해방의 도구로서 지식을 널리 유포했다.


교육에 있어서도 니시는 관립 대학교를 통해
국가에 봉사할 소수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후쿠자와는 사립 학교를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할 자율적인 시민과 기업가를 길러냈다. 니시의 제자들은 관료가 되어 국가의 질서를 유지했고, 후쿠자와의 제자들은 상인이 되어 국부를 쌓았다. 니시는 철학적 학위를 중시했으나, 후쿠자와는 학위보다는 실질적인 실력을 갖춘 인재를 높이 평가했다. 후쿠자와는 니시와 같은 관료 지식인들이 권력에 아첨하며 국민의 눈을 가릴까 봐 매섭게 비판했다. 니시는 후쿠자와의 과격한 자유주의가 사회의 혼란을 야기할까 봐 우려하며 질서 있는 진보를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은 지식인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방식에 대한 두 가지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니시는 체제 내부의 개혁가로 살았고, 후쿠자와는 체제 외부의 비판자로 살며 근대를 완성했다. 니시의 길은 효율적이었으나 위험했고, 후쿠자와의 길은 더뎠으나 단단하여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두 거목의 존재 덕분에 일본은 국가의 강력한 추진력과 민간의 자율적인 에너지를 동시에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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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어의 창조와 사회적 소통


니시 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개념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확연히 다른 철학적 접근을 보였다. 니시는 한자의 조어 능력을 극대화하여 추상적이고 엄밀한 전문 용어를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는 'Philosophy'를 '철학'으로, 'Subject'를 '주관'으로 번역하며 지적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이러한 한자어들이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벽을 더 높일 뿐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했다. 그는 가능한 한 일상적인 언어나 가타카나를 섞어 누구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번역을 선호했다. 니시의 번역이 학문의 벽을 쌓았다면, 후쿠자와의 번역은 그 벽을 허물어 지식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후쿠자와는 '스피치'를 '연설'로 번역하며,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적 소통을 강조했다. 니시에게 언어는 진리를 정의하는 정밀한 도구였고, 후쿠자와에게 언어는 사람을 움직이는 무기였다. 니시가 만든 '철학'은 대학의 강의실로 들어갔고, 후쿠자와가 만든 '연설'은 광장과 의회로 나아갔다.


니시 아마네는 서구의 'Right'를 '권리'로 번역하며 동양에 없던 법적 지위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후쿠자와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권리'라는 말이 자칫 국가가 베풀어주는 혜택으로 오해될까 봐 경계했다. 그는 '권리' 대신 '통리(通義)'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개인의 타고난 천부인권적 성격을 강조했다. 니시가 만든 '예술'이나 '과학' 같은 단어들은 이후 동아시아 공용어가 되어 지식의 표준이 되었다. 후쿠자와는 '보험', '은행', '증권' 같은 경제 용어들을 대중에게 보급하며 실물 경제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니시는 관념의 세계를 번역했고, 후쿠자와는 생활의 세계를 번역하며 근대적 일상을 새롭게 구축했다. 니시의 언어는 세상을 '설명'하는 데 능했고, 후쿠자와의 언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능했다. 니시는 서구 지성의 '정수'를 옮기려 했고, 후쿠자와는 서구 지성의 '효용'을 옮기려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니시 아마네의 번역어는 학문적 권위를 얻었고,
후쿠자와의 번역어는 사회적 보편성을 얻었다.


니시가 만든 추상어들은 고등 교육의 필수 언어가 되어 지식 계급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후쿠자와가 보급한 실용어들은 시민 사회의 소통 언어가 되어 근대적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니시의 언어적 엄밀함이 없었다면 동양 철학은 논리적 정교함을 갖추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후쿠자와의 언어적 통찰이 없었다면 근대적 개념들은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로만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니시는 언어를 통해 세계의 질서를 세웠고, 후쿠자와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일깨우며 나아갔다. 두 인물은 번역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일본이라는 낡은 틀을 해체하고 근대라는 새로운 틀을 짰다. 니시의 '철학'과 후쿠자와의 '독립'은 그렇게 번역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와 다른 열매를 맺었다. 우리는 지금 니시가 만든 단어로 후쿠자와가 꿈꿨던 자유와 자존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창조한 언어의 숲에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정의한다.


니시아마네의 사상

백학련환과 학문의 체계화 : 니시아마네는 지식의 체계적인 정리를 중시했다. 그는 모든 학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백학련환'의 개념을 제시하며, 서구의 근대 학문을 일본에 이식하려 노력했다. '철학', '주관', '객관', '현상', '이성'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동양 철학 용어의 상당수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학문을 '순수 과학'과 '응용 과학'으로 나누고, 이를 통해 일본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지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일육비론과 세속적 윤리 : 그는 유교적 도덕관에서 벗어나 공리주의적이고 실증적인 윤리관을 제시했다. 정치를 종교나 전통적인 도덕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위 근거를 '건강', '지혜', '부(富)'라는 세 가지 보물(삼보)에 두었으며, 이를 통해 개인과 국가가 번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세속적 행복 추구론이었다.

국민개병제와 군인칙유 : 니시아마네는 사상가인 동시에 관료로서 메이지 정부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다. 국민 개병제를 옹호하며 '군대는 국가의 도구'라는 관점을 견지했다.

군인칙유 기초: 1882년 발표된 '군인칙유'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천황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세웠는데, 이는 훗날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기원이 되기도 하는 양면성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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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 아마네가 만든 '철학'이라는 번역어 속에 담긴 국가주의적 그늘을 걷어내는 작업은 여전히 유효하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외쳤던 '천부인권'과 '자립'의 가치를 우리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 또한 시급하다. 두 사상가는 우리에게 근대적 사고의 도구를 주었지만, 그 도구 안에는 트로이의 목마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기존의 컨셉을 해체하고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고민하고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연관된 사상의 전제를 파악하고 제국주의를 넘어서 우리만의 새로운 지적 영토를 향한다. 과거의 인물들을 비교하는 작업은 결국 현재의 우리를 정의하고 미래의 우리를 기획하는 가장 정직한 시도다. 아마도 친일파들에게는 이들의 숭상의 대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 역시 유산으로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생을 신분의 사다리에서 허덕이더니 이제는 국가간 사다리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제국주의의 저주를 벗어버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뉴라이트 혹은 친일을 기준으로 열등감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어떤 철학이 필요할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동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실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선이 붕괴되기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가서 기초를 다시 만들어야 하지만 제국주의의 유산이나 봉건주의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한다. 누가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누가 해야할까? 쉽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이번에 나이오트와 함께하는 '처음읽는 한국현대사상'을 통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언어의 시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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