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어떻게 실천으로 이어지는가

처음읽는 한국현대철학_나철과 대종교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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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일무장투쟁과 대종교

2. 하늘, 땅 그리고 인간

3.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4. 역사적 실천을 통한 한얼의 회복

5. 새로운 철학전통의 정립과 역사적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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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매주 밤에 잠을 못자고 있다. 매주 토요일 아침 8시에 진행되는 나이오트와 함께하는 철학산책 때문이다. 이전에 여러번 한국현대철학을 읽었지만 막상 강의를 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여러번 책을 보고 다양한 서적들을 사서 읽어보고 더 나아가서 영상들까지 찾아보면서 한국 역사와 철학, 사유체계와 사회구성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모으고 있다. 지난주는 동학이었고 그 전에는 실학이었다. 실학과 동학을 통해서 조선말기부터 꿈틀대던 한민족의 역사적 혼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오늘 나철선생님의 대종교와 관련된 강의를 준비하고 글을 쓰면서 근대 한국의 형성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글의 흐름은 '나철'로 표기하지만 나철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알아주면 좋겠다. 이제야 조금 더 알게 되니 독립운동사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하루하루 계속 공부하고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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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선생님의 부흥시킨 것으로 유명한 대종교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단순한 신화적 인물이 아닌, 민족 정신의 정수인 '한얼'의 현신으로 받드는 주체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홍암 나철은 1909년 부활시키다는 뜻의 '중광(重光)'을 통해 단군교를 선포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군으로부터 시작해서 외세의 침략으로 꺼져가는 민족의 혼을 다시 밝히고자 했다. 따라서 중광은 새로이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유의 도(道)가 끊긴 것을 다시 잇는다는 복원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 조선은 유교적 가치관이 붕괴되고 일제의 식민 지배가 가시화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철은 물리적인 저항을 넘어 민족의 내면적 자아를 회복하는 것만이 진정한 구국의 길이라 믿었다. 이러한 대종교의 출현은 한국 근대사에서 민족 정체성을 철학적으로 정립하고 항일 투쟁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대종교 사상의 뿌리는 '삼일신고'라는 대종교의 경전에서 시작하며,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설명하는 고도의 형이상학을 담고 있다. 경전의 첫머리인 '천훈(天訓)'은 "하늘은 형체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다(天虛虛空空 無形質 無端倪)"고 선언하며 보편적 우주론을 제시한다. 대종교는 이러한 무한한 하늘의 기운이 곧 '한얼'이며, 이것이 인간과 만물 속에 깃들어 있음을 역설한다. 나철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민중들에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어 패배주의를 극복하게 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위안을 넘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철학적 동력이 되었다. 대종교의 정신은 이후 만주 벌판의 독립군들에게 이어져,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밝은 민족의 등불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럼 항일투쟁부터 새로운 한국철학의 가능성까지 대종교의 핵심으로 들어가보자.



1. 항일무장투쟁과 대종교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1904년에 처음으로 개천절 행사를 가진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대종교일 정도로 항일투쟁과 한국의 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종교인들은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이러한 결과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였다. 또한 국어연구 활동을 통해 우리말의 중요성과 민족 고유의 정신을 지켰다. 또한 대종교인은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역사관을 정립하고, 교육하여 일본이 무너뜨리려고했던 민족의 자긍심과 기원에 대한 보존이 가능하도록 활동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투쟁이 가능한 이유는 사상적으로 단단한 철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철과 서울 그리고 윤세복과 같은 리더십은 대종교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근원적인 철학과 사상을 제공했다.


나철은 기존의 단군교를 부흥시켜 '대종교 중광'을 이끌었다. 중광이라는 단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다시금 밝게 빛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1909년 나철을 통해서 단군교는 대종교로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나철의 본명은 나인영이었다.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난 나철은 이름난 수재로 일찍이 과거시험에 합격했지만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동양평화를 위해 한일청 삼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게 한국에 대해서 선린의 교의로 부조하라!"라는 의견서를 일본에 제안하고 일본궁성에서 단식투쟁을 한다. 처음에는 비폭력 평화주의로 일본에게 요구했으나 이윽고 을사늑약 체결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이기와 함께 '자신회'를 만들어 '을사오적'암살을 시도한다. 물론 암살시도는 실패하고 10년형을 선고 받아 유배를 떠나지만, 이후 나철의 삶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출이 단군교를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꾼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정신탄압까지 자행했던 일제는 단군신화를 통한 결집을 두려워했다. 단군과 관련된 행사나 조직은 모두 처벌하거나 감시했는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꾸었다. 또한 일제의 어용으로 친일파들이 단군교로 들어와 밀고를 일삼거나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대종교(大倧敎)에서 '종倧'은 기존의 종교에서 사용하는 단어가(大宗敎) 아니라 '상고신인'에 나오는 '신' 즉 한얼을 가리킨다. 한얼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는 의미에서 글자를 바꾸었다. 이를 통해서 대종교는 한얼의 큰 뜻 아래 도교, 불교, 유교가 하나로 아우러지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각각의 종교가 균형을 이루고, 다른 종교까지 포섭하여 한얼의 뜻 아래 모일 수 있도록 대종교라는 이름을 바꾼 것이다.


나철의 뒤를 이은 2대 교주 서일(徐一, 1881-1921)은 대종교 사상을 무장 투쟁의 강력한 정신적 동력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서일은 만주로 망명한 의병들을 중심으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김좌진, 홍범도 등과 협력하여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다. 그는 '삼문일답', '회삼경' 등의 저술을 통해 대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독립군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으로 수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자 서일은 이에 책임을 느끼고 나철과 같이 스스로 숨을 조절하여 순명했다. 3대 교주인 윤세복(尹世復, 1881-1960) 역시 무장투쟁과 산업육성에 힘쓰며 해방 후까지 대종교 정신을 이어갔다. 그는 '삼법회통'을 저술하여 대종교 사상을 체계화했으며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시련 속에서도 신념을 지켰다.


대종교인들이 이토록 처절하게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사상이 민족적 주체성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라는 망했어도 도(道)는 보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얼의 회복이 곧 국권의 회복이라 믿었다. 이러한 확신은 단순한 관념에 그치지 않고 국어, 역사 연구는 물론 정치 활동과 무장 투쟁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출되었다. 신규식, 이동녕 등 상해 임시정부의 주역들도 대종교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닦았다. 주시경과 김두봉 같은 학자들은 우리말을 '한글'이라 부르며 대종교의 정신을 언어 연구에 녹여내어 민족 문화를 수호했다. 박은식과 신채호 같은 역사학자들 또한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민족 사관을 정립하며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섰다. 결과적으로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전반을 관통하는 거대한 정신적 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철과 서일의 활동과 영향력

대종교의 철학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만주 벌판의 거친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역사적 실천으로 구체화되었다. 1910년대 이후 대종교인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청산리 전투와 같은 역사적 승리를 일구어냈다. 이들에게 투쟁은 단순한 군사 활동이 아니라 훼손된 한얼의 도를 지상에 다시 세우는 신성한 종교적 의무였다.

교단 제2대 교주였던 서일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동시에 '회삼경'을 저술하며 대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독립군들이 단군의 자손이라는 일체감을 가질 때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정신적 무장은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대종교인들은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교육과 국학 운동을 통해 민족의 생명력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고자 했다. 주시경과 김두봉 같은 대종교 계열의 국어학자들은 우리말 연구를 통해 민족의 사고방식을 지키는 '말의 독립'을 추진했다.

또한 박은식과 신채호는 대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해석하여 식민 사학에 맞서는 민족 사관을 정립했다. 이들에게 역사와 언어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한얼'의 기운이 서린 민족의 소중한 유산이자 저항의 무기였다.

이회영 일가와 대종교인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역시 이러한 철학적 토대 위에서 독립군 간부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되었다. 이처럼 대종교는 다방면에서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의 주체성을 지켜낸 강력한 사상적 구심점이었다.


나철의 항일투쟁

외교 투쟁 (1905): 일본으로 건너가 정계 인사들에게 한국 독립을 요구하며 국제 사회의 양심에 호소했다. 하지만 일본의 야욕을 확인하고 외교적 해결의 한계를 절감했다.

직접 투쟁 (1907):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했다. 매국노 권중현 등을 저격하여 민족의 저항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나, 실패 후 유배를 겪었다.

정신 투쟁 (1909~1916): 대종교를 중광하여 '단군'을 구심점으로 민족 정체성을 세웠다. "나라는 망해도 민족의 혼(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전파해 독립운동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희생 투쟁 (1916): 일제의 종교 탄압에 맞서 구월산에서 순교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잠자는 민족의 혼을 깨우고 독립 의지를 결집시키는 최후의 저항을 선택했다.


대종교에 대한 탄압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하고 1915년 종교통제안을 통해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1916년 나철은 일제의 압박에 맞서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숨을 거두는 조식(調息)의 방법으로 순명하며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은 교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나, 동시에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순교 정신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일 또한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와해되자 지도자로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철의 길을 따랐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숭고한 희생은 대종교가 지향하는 '나를 버리고 전체를 위하는' 철학적 실천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대종교의 항일 투쟁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고귀한 정신적 승리의 기록으로 남았다.

해방 직전인 1942년에는 '임오교변'이 발생하여 윤세복을 포함한 지도부 21명이 검거되고 10명이 옥중에서 순교하는 비극을 겪었다. 일제는 대종교의 씨를 말리려 했으나, 대종교인들은 감옥 안에서도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 정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처절한 투쟁 끝에 맞이한 해방은 대종교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은 역사적 필연이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대종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로서 국가 재건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하며 그 역사적 소명을 이어갔다. 비록 분단과 전쟁이라는 새로운 시련을 겪었으나, 대종교가 보여준 무장투쟁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주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대종교인들의 투쟁은 한얼의 가르침이 현실의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증거다.


대종교의 영향을 받은 근현대 인물들

서일: 대종교의 2대 교주(도사교)이자 북로군정서의 총재다. 대종교의 철학인 '삼일신고' 등을 바탕으로 독립군 정신 교육을 주도했다.

김좌진 & 홍범도: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이다. 김좌진은 대종교 신자로서 북로군정서를 이끌었고, 홍범도 역시 대종교 세력과 연대하여 연합 작전을 펼치며 항일 의지를 다졌다.

지청천 & 이범석: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깊은 이들은 대종교의 민족주의 정신을 군사 교육에 이식했다. 이범석은 대종교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광복군에서 활약했다.

박은식 & 신채호: 대종교의 유신(儒神) 일체 사상과 단군 중심의 역사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등을 통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확립하며 대종교적 역사 인식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정인보: '얼'의 철학을 강조한 인물로, 대종교의 단군 정신을 현대적인 민족주의 철학으로 계승했다.

김교헌: 대종교의 2대 교주를 지냈으며, 《단군고》와 《신단민사》를 저술하여 대종교 사관에 입각한 민족사를 정리했다.

시경: 대종교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글 연구에 매진했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른다"는 그의 생각은 대종교의 민족 자강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지석영 & 김두봉 & 이극로: 조선어학회 등에서 활동하며 한글을 지키는 것을 곧 민족의 혼을 지키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김두봉은 대종교 사상에 심취하여 한글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시영 & 이동녕: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들로, 대종교적 가치인 '홍익인간'을 건국 강령의 기초로 삼았다.

신규식: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며, 대종교 신앙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단결을 도모했다.

조완구: 대종교의 간부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내에서 대종교 세력을 대변하고 민족 정통성을 수호했다.



2. 하늘, 땅 그리고 인간


대종교의 핵심 사상은 '삼일신고'에서 출발하여 '신리대전'과 '회삼경'을 거쳐 체계적으로 완성된 독특한 우주론을 지닌다. 교리의 중심에는 '한얼'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으며, 이는 우주의 본체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을 상징한다. 한얼은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무궁한 존재이며, 만물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주재자다. 나철은 '신리대전'에서 한얼 위에 더 높은 존재는 없으며 만물은 그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한얼 정신은 우리 민족이 공유하는 '하나님' 사상과 맥을 같이하며 민족의 근원을 하늘에 두는 자긍심의 원천이 된다. 대종교 사상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조화를 이루는지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경전인 '삼일신고'는 숫자 '3'과 '1'의 원리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며 이를 '삼일(三一)'의 원리라 부른다. 1이 본체인 한얼을 뜻한다면, 3은 그 본체가 현실 세계에서 쓰이는 세 가지 양상인 환인, 환웅, 단군을 의미한다. 서일은 이를 '본체는 하나이나 쓰임은 셋'이라고 설명하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경지가 곧 한얼과 하나가 되는 것임을 밝혔다. 환인은 하늘을 다스리고 환웅은 지상에 내려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며, 단군은 나라를 세워 인간을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이 세 존재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한얼'이라는 하나의 본체에서 나온 것이기에 '세 검'이라 불린다. 이러한 삼일의 논리는 우주의 조화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원리로도 확장되어 적용된다.


수행의 방법: '삼법(三法)'

거짓된 삼망을 벗어나 참된 삼진을 회복하기 위한 세 가지 구체적인 실천법을 제시한다.

지감(止感): 기쁘고 슬픈 감정의 소용돌이를 멈추고 평정심을 찾는 것이다.

조식(調息): 거친 호흡을 가다듬어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금촉(禁觸): 감각적인 자극과 부딪힘을 절제하여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삼일신고 1장에서 5장까지

1장 장천훈(天訓)하늘의 본체: 하늘은 형체도 끝도 없는 무궁한 존재이며 어디에나 있다.

2장신훈(神訓)신의 존재: 한얼님은 절대적 지혜와 권능을 가졌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계신다.

3장천궁훈(天궁訓)하늘 나라: 온갖 선과 덕을 쌓아야 도달할 수 있는 영원한 즐거움의 세계다.

4장세계훈(世界訓)우주의 형성: 무수한 별들 중 지구의 생성과 만물의 번성이 한얼님의 기운임을 밝힌다.

5장인물훈(人物訓)수행과 실천: 삼진(참됨)을 회복하기 위해 삼법(지감·조식·금촉)을 수행해야 한다.


인간은 한얼로부터 가장 빼어난 기운을 받고 태어난 존재이지만, 동시에 땅의 기운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윤세복은 '삼법회통'에서 인간이 만물 중 가장 빼어난 능력을 갖추었기에 한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땅의 기운은 불완전하며 공간적 한계를 지니고 있어 인간은 태어난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과 운명을 지니게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세상에서 다양한 감정을 겪고 부딪히며 방황하는 '세 길(三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설명한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과 비교할 때 한얼은 '리(理)'와 닮아 있고 기운은 '기(氣)'와 유사한 성격을 띤다. 하지만 대종교는 인간이 단순히 기운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본래의 청정한 기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타고난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한얼의 신령함을 회복해 나가는 끊임없는 수행의 과정이어야 한다. 대종교는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기운이 순수하고 탁한 정도에 따라 사람마다 한얼과 닮은 모습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신성은 모두에게 깃들어 있다. 이러한 평등한 인간관은 카스트 제도에 반대했던 불교의 평등 가르침과도 궤를 같이하며 민족의 결속을 다지는 근거가 되었다. 대종교 사상에서 인간은 우주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도덕적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존엄한 존재다. 결국 하늘과 땅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한얼과 하나가 되는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된다.




3.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대종교는 인간이 현실의 고통과 방황을 극복하고 한얼과 하나가 되기 위해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세 법(三法)'을 제시한다. 세 법은 느낌(感), 숨(息), 부딪힘(觸)과 관련된 실천법으로 각각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을 의미한다. 지감은 일어나는 감정을 절제하여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이고, 조식은 고른 호흡을 통해 신체의 생명력을 다스리는 법이다. 금촉은 외부의 물리적인 자극이나 유혹으로부터 신체를 정결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하며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일은 '회삼경'에서 상등의 밝은이는 성품을 통달하고 중등은 목숨을 알며 하등은 정기를 보전한다고 등급을 나누어 설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인간이 타고난 한얼의 마음을 회복하여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다.


수행의 과정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태도는 '세 나(三我)'라는 개념으로 정리되며 이는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포용한다. 첫째는 '오직 나(獨我)'로, 스스로 높음을 주장하며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적 태도를 상징한다. 둘째는 '나를 위함(爲我)'으로, 자신의 몸을 소중히 보살피고 지키려는 도교적 가르침과 연결되는 자아 사랑의 태도다. 셋째는 '내가 없음(無我)'으로, 예(禮)와 공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유교적 태도를 의미한다. 대종교는 이 세 가지 태도 중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면 독선이나 이기심, 혹은 자아 상실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진정한 수행자는 이 세 가지 관점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화시켜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으며, 이때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는 원리가 적용된다. 세 법과 세 나라는 개념은 모두 숫자 3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 속의 다양성과 변화를 상징하는 숫자다. 인간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이 다양한 가치들을 한얼이라는 하나의 근원으로 수렴시켜야 한다. '모은다(會)'는 말은 단순히 합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고도의 균형 감각을 의미한다. 삶의 실천이 한얼이라는 본질과 떨어져 존재할 때 인간은 방황하게 되며, 반대로 실천 없는 관념은 공허해질 뿐이다. 결국 올바른 삶이란 자신의 내면 수행과 현실에서의 실천이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대종교 사상은 개인의 수양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현실의 구체적인 실천인 역사적 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한얼과 하나가 되는 과정은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으려는 투쟁과 다르지 않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서 대종교인들이 국어와 역사를 연구하고 무장 투쟁에 나선 것은 그 자체가 종교적 실천이었다. 그들에게 독립운동은 민족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회복하여 한얼의 가르침을 이 땅에 실현하는 거룩한 과업이었다. 이러한 실천적 종교관은 당시 지식인들이 왜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는지 설명해 주는 핵심 열쇠다. 인간은 오직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할 수 있으며, 그것이 대종교가 말하는 참된 인간의 삶이다.



4. 역사적 실천을 통한 한얼의 회복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할 무렵의 시대적 정세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등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대종교인들은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역사적 실천에 나섰다. 당시 많은 유학자 출신 지식인들이 대종교를 선택한 이유는 기존의 성리학이 지닌 사대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가 아닌 엄연한 사실로 인정하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적 뿌리를 찾고자 했다. 특히 '나라는 망했어도 도는 보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국치(國恥)의 상황에서도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역사적 실천은 곧 잃어버린 한얼의 정신을 회복하여 민족의 자존감을 되찾는 숭고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대종교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단실기'와 '신단민사' 같은 독자적인 역사서 편찬에 힘을 쏟았다. 이 책들은 한웅이 처음 지상에 내려온 자리인 '신단(神檀)'을 공유하며 우리 민족이 한얼의 교화를 직접 받았음을 증명한다. 특히 '신단민사'는 대종교의 경전인 '신사기'의 기록을 따라 고조선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철저히 북방 중심으로 서술했다. 고구려, 발해, 요, 금, 원으로 이어지는 북방 민족의 역사를 우리 역사와 연결하며 대륙을 호령했던 민족의 기상을 일깨웠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일제가 조작한 반도 사관을 타파하고 민족의 활동 무대를 광활한 대륙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역사를 기록하고 배우는 행위 자체가 일제에 맞서는 강력한 정신적 무장이자 역사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대종교의 역사 인식은 역대 왕조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이는 한얼의 가르침에서 멀어질수록 국운이 쇠퇴했다는 믿음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는 불교에 물들고 조선 시대에는 유학에 빠져 우리 고유의 정신인 '세 검의 도'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대종교인들은 외래 사상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하여 국난을 극복하려 했다. 특히 백두산 주변을 비롯한 만주 지역을 민족 정신의 발원지로 보고 그곳에서의 포교와 무장 투쟁을 정당화했다. 서일, 김좌진, 홍범도와 같은 장군들이 만주에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정당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실천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독립을 설계하는 적극적인 행위였다.


결국 대종교인들에게 역사란 한얼의 뜻이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는 과정이며, 독립운동은 그 어긋난 역사를 바로잡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그들은 국어 연구와 역사 교육을 통해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무장 투쟁을 통해 물리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꿈꿨다. 이러한 다방면의 실천은 모두 '한얼의 회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렴되었으며 대종교만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타 종교들이 내세의 구원이나 개인의 안탈에 집중할 때 대종교는 철저히 민족의 현실과 역사적 책임에 주목했다. 이러한 주체적 사상과 역사 의식은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한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토대를 제공했다. 대종교의 역사적 실천은 우리 민족이 시련 속에서도 어떻게 고유의 빛을 잃지 않고 저항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기록이다.


삼일신고 서문

본 삼일신고(三一神誥)는 고구려의 멸망시, 그 유신(遺臣)대조영이 민족의 경전(經典)인 신사기(神事記) 등을 품고, 말갈의 땅으로 도피하여, 발해국을 일으켜 세운 뒤, 지난 역사에 전란(戰亂)으로 민족의 경전이 없어진 경우를 생각하여, 항상 잘못될까 염려하던 중,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신사기(神事記)와 임금이 지은 삼일신고 예찬(三一神誥 禮讚)을 첨부한 삼일신고(三一神誥) 해설집 등 민족의 경전을 보본단(保本壇) 돌집속에 간직하여 두었던 것이다.

- 단기 3,031(서기 968)년 대흥 3년 3월 15일 -




5. 새로운 철학전통의 정립과 역사적 실천


대종교는 기존의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을 단순히 통합하는 것을 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적 전통을 세웠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지켰던 '도통(道統)'의 개념을 재해석하여 중국 성인들이 아닌 고대 단군으로부터 이어지는 민족의 도맥을 정립했다. 이는 외래 사상에 의존하던 기존의 학문적 풍토에서 벗어나 민족 고유의 가치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주체적인 시도였다. 새로운 철학 전통은 관념적인 이론에 머물지 않고 급변하는 근대 사회의 문물과 사상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토대가 되었다. 대종교인들은 이러한 철학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종교적 구원과 현실적 독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노력했다. 사상의 발전이 곧 실천의 동력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 대종교 철학의 가장 큰 성취다.


해방 이후에도 대종교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민족의 중심을 잡기 위해 다양한 실천적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1946년 만주를 떠나 서울로 총본사를 이전한 대종교는 국학 강좌와 교리 강습회를 열어 민족 정신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1950년대에는 조직을 개편하여 교주 중심의 전제적 의사결정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교의회 제도를 도입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이는 대종교 사상이 단순히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과 국무총리 이범석 등 건국 초기 주요 인물들이 대종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것도 이러한 철학적 깊이 때문이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 과정에서 대종교의 민족 주체성 사상은 건국 이념의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대종교의 활동은 해방 후 정치적 혼란과 외래 사상의 유입 속에서 점차 위축되는 아쉬운 과정을 겪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대종교의 사상을 왜곡하여 폐쇄적인 민족우월주의로 흐르기도 했으나, 본래의 가르침은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인 공존을 지향한다. '신사기'는 인간을 지역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한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존재로 설명하며 타 문화에 대한 포용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대종교가 대중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특유의 강렬한 실천성이 약화되고 종교적 신비주의로만 비춰진 탓이 크다. 하지만 대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날카로운 현실 비판 의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구체적인 실천력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철학 전통은 고정된 교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과 소통하며 변화하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대종교 사상은 현재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한반도 전체가 단군의 가르침을 받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넘어선 통합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동학이 농민의 계급의식을 반영한 정치 투쟁으로 나아갔다면, 대종교는 고유의 민족 정신을 강화하며 무장 투쟁과 국학 운동으로 외연을 넓혔다. 현대 사회의 수많은 정보 홍수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대종교의 주체적 태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지켜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국권을 위협받던 시절 대종교인들이 보여준 실천적 원천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도 유효한 통찰을 준다. 우리는 대종교의 철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할 책무가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사건의 발단인 함흥 영생여학교 일기장 사건 : 1942년 여름,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학교 학생이었던 박영옥의 일기장에서 "오늘 친구들과 국어(조선어)를 사용했다가 꾸중을 들었다"는 내용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었다. 당시 일제는 일본어만을 '국어'로 강요하던 시기였기에, 조선어를 '국어'라 칭하며 사용한 배후를 캐기 시작했다. 조사 과정에서 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교사 정태진이 체포되었고, 고문 끝에 그가 몸담았던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며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일제의 탄압 논리와 대종교적 연관성 :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을 단순한 어학 활동이 아닌, 민족의 정신을 고취하여 독립을 준비하는 고도의 정치 운동으로 규정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들이 내세운 "말은 민족의 얼이다"라는 주장이 나철의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궤를 같이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이극로, 김두봉 등 학회 주역들은 대종교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일제는 이를 근거로 '치안유지법' 상의 내란죄를 적용하여 이희승, 최현배 등 33명을 구속하고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고문과 희생, 그리고 기적적인 원고 사수 : 이 사건으로 인해 국어학의 거두였던 이윤재와 한징은 차디찬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나머지 학자들도 광복 직전까지 투옥되어 사전 편찬 작업은 영영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1945년 광복 직후, 일제가 압수하여 폐기한 줄 알았던 사전 원고 뭉치가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이 원고는 훗날 '우리말 큰사전'으로 결실을 맺으며, 우리 민족이 언어를 통해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음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조선어학회

6. 기호계적 코라와 신화의 기능


여기서 신화의 기능과 상징의 가능성을 살펴보자. 라캉의 유명한 RSI(Real-Symbol-Imagine)구분법은 세상을 상상계와 실재계 그리고 이것을 이어주는 상징계로 정의한다. 상상계는 우리가 흔히 떠 올리는 무한의 공간인 공상과 환상이 넘치는 세계다. 이것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언제나 상상계 안에서 생각을 한다. 상상계가 넓고 깊을 수록 더 많은 상상과 생각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실재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이다. 감각의 세계이면서 이미지와 영상의 세계이다. 걷고 뛰고, 먹고, 말하는 모든 순간의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촉각이 바로 실재계에서 실제가 일어나는 방식이다. 실재계에서의 현상들은 매번 끊김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상징계인 언어는 이것들을 하나로 연결해서 단어와 문장으로 만든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소환하면서 확장하는 플랫폼인 셈이다. 이는 수사학에서 에토스를 상상계로, 파토스를 실재계로, 로고스를 상징계로 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라캉의 RSI 구분에서 조금 더 들어가서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적 코라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유명한 저서 세미오티케(Séméiotiké)에서 기호에서 상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의 실재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기호이다. 그 기호는 해석되지 않으면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아직 해석이 되지 않고 기호가 다양한 층위에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코라'라는 개념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중간지대 혹은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코라를 안토니오 그람시는 인터네그넘이라는 단어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새로운 것은 아지 오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호계적 코라이다. 기호가 아니 기호이면서도 언어로 상징성을 가질랑 말랑 하는 공간 말이다.


신화는 여기서 등장한다. 상상계에서 구성된 신화가 '언어'를 만나기 전까지 수 많은 기호들이 배치되지 않은채로 떠돌고 있다. 이른바 '상상계적 노마드'의 단계이다. 상상계를 떠도는 이미지와 기호들이 아직은 엉겨붙지 않은 상태에서 '기호계적 코라'는 충만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나 작업, 누군가의 등장으로 기호계는 바로 상징계로 넘어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역사서가 편찬되는 것이 보통이고 누군가가 실재계에서 만들어진 내러티브를 신념형식으로 끌어 올려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새로운 기원이 되어서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건국신화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화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특히 20세기로 접어드는 현대성의 길목에서 '민족 만들기' 혹은 '국가 만들기'의 차원에서 주로 진행된다. 이것을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제국주의자들이 했던 고민은 자신들이 가진 신화의 우월성을 식민지가 가진 신화로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기원이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자신들이 가직 '특권'을 영속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누굴 믿음 것인가는 결국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가로 귀결된다. 일본의 경우 자신들의 신화의 기원인 아마테라스 오오가미를 기반으로 한 천황을 섬기게 만들기 위한 전략을 짜게 된다. 그래서 조설말기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역사말살 정책부터 시작해서 한국어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제국주의를 강화했다.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으로 보면 제국주의 헤게모니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의 파도 속에서 거대한 닻을 내리고 민족혼을 부활시켜 다시 빛나게 만드는 '중광'을 제창한 것이 바로 대종교이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대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한얼'님의 다스림 안에서 시간의 무한성이 펼쳐지고 한반도라는 장소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정신이 도교, 불교, 유교로 현현한 것을 종합한 것이다.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헤게모니에 반대해서 대항헤게모니를 구성했던 구조를 보자. 실학의 경우에는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가 가진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위해서 실재계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대항헤게모니로 '실사구시'를 제안했다. 구체적인 변화를 현실에서 보여주면서 대항헤게모니를 만든 것이다. 반면 동학의 경우에는 기존의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라는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시천주-사인여천-인내천'의 카운터헤게모니를 만들었다. 더욱이 기존의 '정신'을 넘어서는 '천주'의 개념으로 영적인 부분까지 대항헤게모니의 범주를 확대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조선이 아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왔다. 동학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도 실제적인 방식의 조직화와 함께 정체성 차원에서의 영적인 동질감을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동학의 헤게모니는 곧이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대항헤게모니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대종교에서는 동학에서는 잘 다루고 있지 않은 '역사성'의 관점에서 '단군신화'를 가져왔다. 일제의 제국주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한얼'의 헤게모니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적인 시원을 단군으로 정립함으로서 한반도라는 장소 안에서 5000년이라는 시간대가 모두 대한민국의 역사 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바로 한얼님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었다. 이것이 바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는 홍익인간의 이념인 것이다. 상상계에서 한얼과 한민족의 이념이 실재계에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만나서 단군신화의 연속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호계적 코라에서 놀고 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나로 연결해서 단군신화로 통합하고 이에 맞는 실천적인 방식으로 대항헤게모니를 구성하여 '항일 운동'으로 재현함으로써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서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까지 제국주의자들이 생각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들이 만든 헤게모니를 무너뜨린 대항헤게모니가 너무 큰 영향력을 줄 것 같을 때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탄안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영화로 보았던 '말모이'처럼 조선의 언어를 지워버리려는 무단통치를 강화한다. 이에 반해서 자신들의 상징계적 질서에 편입하도록 만드는 문화통치가 진행되면서 창씨개명과 일본역사 및 문화에 대한 헤게모니적 편입시도를 진행한다. 일제 말기 그렇게 많은 문학가들을 포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까지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무엇을 해야했을까? 당연히 우리가 가진 말과 글을 정리하고 확산하면서 우리의 상상계 안에 민족혼을 불어 넣고, 우리의 실재계 안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야하지 않았을까?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헤게모니의 디딤돌을 놓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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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사적 대위기 앞에서 '한얼'이라는 고유의 정신적 닻을 내리고 거센 풍파를 견뎌낸 거대한 함선과 같았다. 나철이 씨를 뿌리고 서일이 꽃을 피운 이 사상은 단순한 종교적 구복(求福)을 넘어, 나라를 잃은 동포들에게 '우리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강력한 자긍심과 독립의 당위성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본 고찰을 통해 대종교가 무장 투쟁의 총칼뿐만 아니라 국어와 역사를 지키는 붓으로서 어떻게 민족의 혼을 수호했는지 확인하였다. 또한 유·불·도를 포용하면서도 우리만의 주체적 철학 체계를 세웠던 그들의 학문적 깊이는 오늘날 사대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결국 대종교의 역사는 정신이 살아있는 민족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살아있는 증거이자 기록이다.


다만 대종교가 지닌 사상적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을 잃고 소수의 종교로 남게 된 점은 아쉽다.


어떻게 보면 항일투쟁과 같은 과거의 강렬한 실천성이 오늘날의 시대적 요구와 결합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의례적인 활동을 넘어서 실천적인 활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고민을 해본다. 또한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칫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종교의 사상은 오히려 모든 것을 품는다. 따라서 대종교 사상이 박물관의 유물이 되지 않으려면, 나철 선생님이 가졌던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역동적인 실천력'을 현대 사회의 갈등 구조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제언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수 많은 사회문제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이것은 대종교의 숙제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숙제와도 같다. 과거가 미래를 구했으니 이제 우리가 미래를 구할 차례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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