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글을 써주는 시대에
글쓰는 즐거움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같이 AI가 모든 것을 써주고 찾아주고 결정해주는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사치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의 진실된 생각을 찾고 싶다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면 자신의 손으로 글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상징의 세계를 여는 순간 내 삶속에 지나간 수많은 상상력들이 실재의 경험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글은 상상력과 실제 경험이 만나는 지점을 꿰매는 바느질과 같다. 내가 손수 지은 옷을 해 잆는 것처럼, 내가 가진 상상력과 경험이 하나의 단어에서 만나고 그 단어들이 배열되어서 나의 생각을 드러낼 때 비로소 인생은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즐거움을 모른다. 누군가의 전유물처럼 여긴다. 작가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 것처럼 지금은 인공지능에게 맡겨 버린다. 그래서 삶의 기쁨에서 크나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글쓰기의 능력이 점점 쇠퇴한다.
글을 안 쓴다는 것, 글을 못 쓴다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들이 점점 나에게서 빠져 나간다는 것의 다름아니다. 인간이 하루에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의 도화지는 몇 만장을 넘는다. 그러나 그 도화지는 어느새 망각의 벽날로에 태워진다. 태어지기 전에 얼른 낚아채서 나의 몸의 움직임과 연결해 놓고 그것을 살아숨쉬게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글로 남기는 순간 재로 사라지지 않고 나의 기억도 잊어 먹을 때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들이 제일 괴로운 때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써야할 때이리라. 그래서 소설가들에게 글쓰기가 괴로운 작업이고, 시인에게는 즐거운 놀이가 되는 것 같다. 시인들은 하나의 단어에 수만가지의 상상력과 경험들을 엇갈려서 걸어 놓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자신이 봐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연결했던 그림이 아니기에 더욱 신기한.
삶 속에서 시적 허용을 가지게 되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이란 숨막히는 시간과 관계 속에서 자유를 찾아 헤메이는 존재이다. 그 자유는 단지 시간이 넉넉하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연결이 무한으로 생성될 때 주어지는 자유로운 감정, 해방감, 속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두려움이 아니라 신기함을 넘어 신비함으로 다가온다면 말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정작 쓰지 않으면 모른다. 단어들이 춤을 추고 있는 도화지 위의 잔치들을.
사람들의 생글생글한 미소를 본다. 누군가의 뒷모습에 걸려 있는 슬픔을 본다. 아이들의 웃음 뒤에 어머니의 미래를 본다. 비가 내리는 한 낮에 더 뒤에서 쉬고 있는 태양의 늦잠을 본다. 달리기하는 선수의 땀바울에서 100일간의 사투를 본다. 한 글자씩 남겨 놓은 시인의 눈물에서 인류의 과거를 본다.
인간이 가진 가장 신비로운 능력은 어쩌면 글쓰기가 아닐까? 이럲게 무한으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늘어 놓고, 죽을 때까지 쓸 수 있으니깐 말이다. 밤이 아니어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결국 글쓰기가 아닐까? 우리는 글을 쓰면서 꿈을 꾸고, 사랑을 느끼고, 인생을 음미한다.
지금은 밤이다. 잠이 들기 전에 이러한 글을 남겨 놓지 않으면 내가 이런 생각으로 글을 쓰다가 행복해 한다는 것을 금새 잊어 먹을까봐 남겨 놓는다. 미래가 열려 있다는 것은 이렇게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그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미래가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다른 누군가의 글들에 담긴 미래가 언젠가 내 삶 속에 들어 올 것임으로. 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니깐 말이다.
그러나 제발 글을 쓰자.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경험이 담긴 글을. 쓰는 내내 자신이 자신이 되고, 미래가 더 끝없이 펼쳐지며, 마치는 순간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질 테니. 인공지능이 장악한 세상에서 결국은 글을 쓰는 것만 남을 것이다.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만 남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담을 글을 쓰자. 산문이라도 시라도, 소설이라도 좋다. 글을 남기자. 자신의 고유성을 찾고 미래를 밝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