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이와 소통하고 자신에게 직면하기
남들보다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하며 살아갈 때가 있다
어떤 명확한 기준이 주어진 건 아니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정당성과 정체성을 부여할 때
오만은 탄생한다
다른 이의 의견을 들을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어하는 욕구가
현대의 오만을 탄생시키고
더불어 어느 작가의 말처럼 편견을 동반하게 된다
요즘들어, 그래 요즘들어서 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만.
나는 어떻게 나의 정체성을 구성할까?
나는 어떻게 나를 지키고 있을까?
지키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다른이들의 말이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잘못 던져서 그런건 아닐까?
나는 허영'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다른사람이 어떻게 보는가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행동들이
'행동하는대로 사고하게 만든다'라는
결론에 다다를 때 허영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들이 어떤 이야기는 받아들이고
어떤 이야기는 튕겨내지 않았나 한다
오만과 허영의 굴레에서
나는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한 쪽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구성해 내고
한 쪽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자신을 구성해 내는 방식에서 말이다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평가의 기준인
세계관은 13세가 지나면 배타성을 갖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니깐 중학교를 들어갈 무렵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자신만의 것을
지키려고 하게 되고 그것을 지킬 때
개성이라는 것이 탄생하고 지키지 못할 때
쉽게 그 당시의 상황과 문화에
쓸려 간다고 한다
여기서 이미 만들어진 배타성을 침투하는 것은
자신이 존경하는 모델과 경험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동경의 대상이 있고
롤모델 혹은 멋진 누군가 배우고 싶은 이가 있다면
언제라도 배타성은 무장해제를 하고
닮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험은 실제로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이 인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렇게 까지 생각하고 보니 나는 누구를
닮아가려고 했던 걸까? 그 시절.
나의 삶 속에서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였고 나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물론 13세 이전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정체성의 근간은 13세 이후인것 같다
너무 길어지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아무튼 오만과 허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건 확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생각을 해야할까?
생각은 항상 변하고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을 믿으며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답을 어느정도 해야겠지?
진짜 내가 행복했던 때는
다른 사람이 희망을 발견했을 때다.
다른 이가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발견할 때
나는 그렇게 기쁘고 즐겁고
나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이렇게 내가 궁극적으로 기쁜 것에
오만과 허영을 넣어보면 갑짜기 엄청 쉬워진다
다른이가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나는 오만을 버리고, 허영을 버리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
다른이의 삶을 받아들여야 겠다
그것이 내가 기쁘고 남이 기쁜 것이 아닌가
희망에게서 오만과 허영을 극복해보자
누군가 희망을 품기 시작할 때
나는 다른이의 의견을 듣고 싶다, 설레이게도.
누군가 희망을 품기 시작할 때,
그 때를 위해서 나는 허영도 버릴 수 있다
누군가의 기쁨이 희망과 만나는 시점에서
나는 비로소 겸손해지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잡아서
내일을 희망할 수 있다
다른이와 소통하는 길
나에게 직면하는 길
희망을 잉태하는 과정
어쩔 수 없다. 여기에는 사랑밖에는.
사랑할 때 희망을 품고
사랑할 때 희망을 기대하게 되는 것.
결국! 사랑이구나
오만과 허영을 벗어나는 길은
사랑이구나 한다
희망이전에 사랑이구나 한다
정해놓고 쓰지 않아서
이리저리하지만 결국 이 글들의 끝에
나는 또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을 구하고,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이 희망으로 가는 사이
오만과 허영에게 작별하고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넘어가는
더불어 함께 가는 길이 있다
먼 길이었으나 그래도
오늘 살아갈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