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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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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25. 2017

샤먼과 들뢰즈

만신에서 나타난 들뢰즈*이지영

한국사회 안에 샤머니즘은

너무나 당연해서 기복신앙이라고 부른다


복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복을 비는 식으로 이해한다


오늘은 단지 영화적 기법으로

만신을 보겠지만


샤먼과 기복신앙은 계속해서 들여다봐야

오늘의 종교성과 국민성을 이해할수 있다



20170224_철학아카데미

들뢰즈와 영화기법들_이지영(한예종)

만신_박찬경


들어가기


- 한국사회에서 샤머니즘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 샤머니즘은 전통과 현재를 잇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러 다닌다.


- 박찬경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역사적 내러티브를 샤머니즘으로 풀어 낸다.


- 영화는 하나의 씻김굿을 하듯이 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들을 현재로 승화시켜준다고나 할까?


- 치유의 영화로 보여지게 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 이 영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박찬경, 만신


- 이 영화에서 촬영기법도 독특하지만 시간이미지도 독특하다.


- 한 사람의 점쟁이를 3명의 배우들이 연극하면서 한 개인의 역사는 3가지 방향, 이미지로 분화한다.


- 영화의 기법에서도 매우 독특한데,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논픽션이 주를 이루고 픽션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 그러나 박찬경의 작품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픽션으로 가다가 중간에 논픽션이 등장하여 팩트를 제공한다.


- 상상의 존재들이 갑짜기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실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상상이 더욱 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 주제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김금화'라는 무속인을 중심으로 샤머니즘을 풀어낸다.


- 샤머니즘의 역할은 단지 미래를 예측한다는 측면에서만 유용한게 아니라, 과거를 재현해서 현재에서 재현을 풀어내는 작업을 통해서 과거를 과거의 자리에 안착시킨다고 할 수 있다.


- 이렇게 안착된 과거는 다시 현재에 침범하지 않는 조용한 안정을 찾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씻김굿처럼 시원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 하버마스나 한나아렌트의 공론장 개념도 가지고 온다. 다만 그 공론장에 '샤머니즘'이라는 한국적 상황의 해소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 박찬경은 이지영에 의하면 아예 다른 단계의 존재들이 화해하는 공론장으로 영화라는 장르를 사용한다고 한다.


- 박찬경이 원하는 것은 영화공론장을 통해서 sympthization(공감화_이지영이 창조함)을 공유한다.


- 이 작품에서도 일상성이 깨어지는 표현은 어린 김금화가 아이들과 함께 공기놀이를 할 때 갑짜기 등장하는 슬로우모션이 그 예이다.


- 일상성이 시간개념으로 깨어지면서 감독은 관객들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젠틀하게 주고 있다.


- 여기에 혹해서 들어오게 되면, 이제 관계들은 공론장안에 굿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어떤 이론, 의견, 정황에 공감화하는 동안 일정한 메커니즘에 같이 적용을 받게 된다.


- 그렇게 되면 같은 시간대를 사용함으로 같은 존재가 되어서 재현과 재현이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만신에서 중간중간 현재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남기고 간 몸'이미지가 나온다. 대구 지하철, 삼풍백화점 등등 괴롭게 죽어간 혹은 갑짜기 죽어간 상황들을 꺼내놓는다.


- 특정한 과거를 불러와서 그 과거 중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기억을 선택하는 작업도 나온다.


- 영화라는게 한정된 시간안에서 이미지들의 결합이기 때문에 시간이미지는 이렇게 선택되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들뢰즈, 민네이션


- 들뢰즈에게서 시간은 일직선이 아니다.


- 현재는 과거로 대체되거나, 과거는 현재가 재현되기도 한다.


- 들뢰즈에게서 시간은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러단위로 솟아나는 다양성이다.


- 들뢰즈는 시간의 단절 가운데 생각을 빠뜨리고 거기서 아예 새로운 생성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요한 바깥의 사고라고 말한다.


- 바깥의 사고는 결국은 현재라는 시간, 자아라는 개인의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조용한 혁명이 된다.


- 오늘의 영화에서는 내면 안에서 지금까지는 의지의 단절, 지성의 단절, 감성의 단절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서 새로움을 발견했다면, 영적인 차원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바깥은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아래로 들어가는 방식이라면, 영적인 부분의 단절은 위로 항하는 방식이다.


-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 시간의 복합적 공간을 만들고, 자아의 복합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 들뢰즈의 존재는 시간의 개념에서 정의된다. 그러므로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개념을 잘 설정해야 한다.


데리다, 아카이브


- 데리다에게서 아카이브 개념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시스템이다.


- 그 시스템 안에서는 일정한 구조가 있고, 모든 존재가 아카이브 안에서 스스로 포지셔닝을 한다.


-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아카이브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게 되고, 구성이 되어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의 의식이 그렇고, 인간이 만든 구조가 그렇다.


- 아카이브로 들어가는 것들은 수집이 필요한,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 말은 반대로 아카이브가 선포되는 순간 아카이브 바깥의 것들은 모두 필요없는 것으로 의문의 1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의 인식론이 이런 식으로 정리된다고 볼 수 있다.


- 민네이션 : 정말 그런가? 이건 너무 헤겔이나 하이데거식의 인식론이 아닌가? 임마누엘 레비나스에게서는 아카이브가 무한으로 열리지 않는가?


영화, 미래와 과거


-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가?


- 그리고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꿈꾸게 되는가?


- 영화에서는 과거를 대분 보여주는데 과거와 미래의 방점에서 관객은 현재의 배치를 찍는다.


- 계열이 시간개념 안에서 생기면서 관객은 자신의 계열을 이룬다.


- 이런 이야기는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이야기를 한다.


- 미래와 현재 사이에서 계열화되는 존재는 다가올 존재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노마디즘이 나온다.


- 인간의 존재는 이미 주어진 정태적인 존재가 아니다. 유목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부유하다가 만들어지는, 생성되는 것이다.


- 그렇기에 다가오는 것이지, 잠재태론 존재하는 것이지, 확정된 것이 아니다.


- 미래 시제로 더 나아갈수록 생성은 더 깊어지고 분야와 범위는 더 넓어진다.


- 연결-접속-생성'의 도식으로 들뢰즈는 생각하고 미래를 열어 놓는다.


민네이션, 생각


-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던 때가?


- 항상 어린 시절에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가 나 자신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시간은 그래서 현재에 있지만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어느시간이 지나면 유체이탈이라고 부르는 나를 벗어나서 다른 사물에 나의 존재를 얹혀 놓을 수도 있었고, 나 자신을 360도 회전시켜서 보는 것도 가능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이 시차적 관점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 철학적인 개념들이 사실은 현실 안에서 인과율과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것들이있었고, 실제 생활에서는 철학적 개념들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찾아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 시간개념도 그렇다. 철학에서는 시간을 존재를 만들어내는 창조물로 보는 사조가 있는데, 한번은 시간이 없는 존재를 생각해 보았는데,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존재들의 시간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시간을 가진 모든 존재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이러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자아의 탄생이 비엔나학파 정신분석학 3세대 빅터프랭클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 이미 다 있었던 개념과 현상과 자연스러움을 개념으로 잡아 보는 일들은 재미도 있었지만, 사실은 시시한 부분도 많았다. 지식이 이런 것인가? 안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적이었고, 또 관계 자체는 그러니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만남은 언제나 새롭다는 의미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적이었다.


- 서양의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도 잠시, 곧 동양적인 개념에서 나를 찾는 시간도 갖게 된다. 동양의 역사와 서사시 그리고 소설에서 말이다.


-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시시했다. 다가오는 시간에 대해서 예감하는 사람들보다는 이미 있는 것들에서 짜집기하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깐.


- 그런데 들뢰즈에게서 혹은 모리스메를로퐁티에게서, 레비나스에게서, 김상봉 선생님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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