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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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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4. 2016

삼위와 일체

삼위일체에 대한 간단한 생각

니케야 종교회의 이후 교리로 정해진 삼위일체 교리는 사실 그 이전부터 성도들에게 경험되던 것이었다.


교리가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현실이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다른 방향, 하나님이 계신 방향,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 바람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오심으로 우리는 천지를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를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는 아들 예수님과 모든 만물 가운데 충만히 거하시고 성부성자의 관계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가 된다.


범신론적인 세계관이나, 뉴에지와 같은 영적 에너지의 흐름이 아니라 우리안에서 진정 살아계시고 말씀히시고 흘러넘치시는 삼 위의 인격성을 우리는 매일 양식처럼 먹고 자란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라고, 서로에게 자란다.


삼위일체는 경험적으로 향유하던 기독교인들의 현실이었다.


해석학적 순환이든(과거), 현상학적 지향성이든(현재), 미래비전으로 삶의 방향(미래)이든 삼위의 역사는 좌와 우를 넘나들고 위와 아래를 가로 질렀다.


여전히 우리의 삶속에 그래왔고, 그리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그 나라의 현실은 바로 삼위를 경험하고 누리는 가운데 이루진다.


삼위일체를 경험한 사도들과 그렇지 않은 사도들로 나위었듯이, 우리의 현실도 삼위를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는 듯하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위의 세계에서 율법을 붙드는 반면, 경험이 계속 인격성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사랑의 세계에서 생명을 누린다.


그 분이 진정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을 만드신 것과, 사랑이 제일인 왕국을 지금도 계속 운행하시는 것, 이것은 삼위 안에서 완벽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성자와 성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성자의 은혜와 사랑가운데 창조의 아버지와 바람의 성령님을 만나게 된다.


회개는 실존주의적인 자기회생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사랑을 누리는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길이 되고, 찬양은 현실을 누리는 흥얼거림에서 언어로 담겨진 것이 된다.


다소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러한 낭만이 없는 신앙은 항상 외나무다리 칼바람 맞으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것들이더라.


지금도 내 안에서 삼위의 충만하심이 겉과 속의 구분을 없애고 미래와 과거의 시간개념도 넘어 영원으로 불어가는 시원한 공간을 만드신다.


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었구나!


나는 오늘도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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