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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5. 2017

반성과 전쟁

나는 잘 살고 있던 걸까?

#1_오랜만에 논쟁을 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 장소에 얼굴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해지기 마련인지라, 그렇게 열을 올리지 않아도 될 문제에 대해서 내 생각이라면서 설득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의 입담에 심각해지다가도 웃다가도 즐거워기도 했다. 나는 마치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의 흥거움에 이야기를 계속해서 가감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2_나의 이상주의자같은 견해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은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묻는 사람들이다. 어느 장소에서나 그런 사람들은 나 같은 상상력덩어리의 문제적 인물을 경시하거나 경계하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나는 경계 대상이었고, 논쟁처럼 제도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라는 문제로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럴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대척점에 있는 그 사람과 나는 서로의 이야기가 얼마나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논쟁이 사실은 말잔치가 아니라 엄청난 전쟁터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논쟁을 하려고, 전쟁을 하려고 말을 시작한 것은 아닌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상대방의 이야기를 꺽기 위해서 내가 사용하는 도구들이 있었다.


#3_나는 엘리트주의를 너무 싫어한다. 누군가가 엘리트처럼 행세할 때는 정말 어떻게 해서라도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엘리트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빈틈을 찾기도 한다. 물론 행동으로 하지는 않지만, 비판의 각은 항상 세우고 있는 편이다. 나는 논쟁에 앞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건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면서 현실정치에서는 이상주의적인 태도는 아무것도 못할거라는 핀찬을 주었다. 물론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립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반대 혹은 야유를 보내는 눈치였다. 나는 그래서 플라톤과 칼포퍼를 꺼내들면서 전쟁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양진영에 소크라테스-칼포퍼로 내려오는 비판적 합리주의자들을 놓고 다른 측면에서는 플라톤-헤겔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주의자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당신의 주장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나는 여기에서 말하는 거다라고 설명을 했다. 그 다음에 또 질문이 나오거나 반박을 하면 다시 위대한 정치가나 철학자들의 사상을 가지고 왔다. 때로는 내가 더 배웠다거나 그 질문도 내가 스스로 해봤는데 역시 답이 없더라라고 상대방을 내리누르는 나를 발견했다. 발견했다. 정말 오랜만에 내가 나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가 발생해서 스스로도 놀라웠다. 컨트롤이기 보다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해서 직성이 풀리지만, 사람들은 상처받는 그런것 말이다.


#4_상대방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시장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을 빗대어서 그 사람을 내가 동굴의 우상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언어를 잃고 그 다음에는 목소리를 잃어 버렸다. 무엇인가 승리감으로 도취된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한 켠에서 마음 한켠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나의 성장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사람들한테, 무시 당하고 언저리로 밀려났는데, 이제는 내가 그러고 있다니. 자괴감이란 바로 이럴 때 드는 감정이 아닐까?하면서 그 이후에 말문을 닫았다. 나도 안다! 너무 작은 문제라서 너무 소심한 문제처럼 보인다는 것을! 그러나 나도 웬만한 사람보다 센서티브하기에, 마음의 불편함을 가지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5_존경하던 교수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자신이 모로코에서 종교최고지도자를 기독교철학으로 이기고 나서 남은 건 추방밖에 없었다는 것. 나는 논쟁에 이겼다고 사람들이, 혹은 내 자신이 인정해주었으나 나는 사람들이 없는 무인도로 추방된 느낌이었다. 독방에 갖힌 것처럼 마음을 더 이상 확장할 수가 없었고, 어떤 것을 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플라톤을 넘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건만 현실에서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이데아를 선정하고 상대방은 이데아를 모르는 사람으로 상정한 다음에, 그가 모르는 언어 다발로 공격하는 것'이 확실한 승리를 약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남는 것처럼, 폐허로 변해버린 마음과 타자가 사라져버린 부정성의 공간은 삶의 구조를 붕괴시켜 버렸다.


#6_보통 이런 순간에는 어느정도의 합리화와 적절한 무시로 마음을 지키고 타자를 모두 이상한 사람으로 몰면 되는데, 나는 그게 되지 않았다.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을까? 그리스도가 나에게 이렇게 대하시고 이렇게 알려주셨을까? 나는 진짜 잘 살고 있는 걸까? 최근들어 모처럼 강하게 반성의 시간들이 마련되었다. 나의 방법론은 과연 맞았던 걸까? 진짜 내 안에 사랑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어느지점부터 잘못한 것일까?를 되내이면서 나는 새벽녘에 흐느꼈다.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 세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에서 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때문에 이것을 하는가? 등등의 문제까지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만리장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7_곧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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