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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30. 2017

노동과 윤리

신학적 관점의 노동이란

- 노동은 인간의 생존과 생계에 필요한 수단이다.


- 노동은 인간다운 삶,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구차하게 구걸하며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게으른 삶과 그로 인한 빈곤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노동은 부를 창출한다. 그리하여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위해 노동해야 한다. 노동은 선을 바루히하는 적극적 방식이다.


- 노동은 인간안에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하는 통로이다.


- 노동은 직업, 즉 일자리의 도구이다.


- 노동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편이다. 그런적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20170530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세상속의 그리스도인_김동춘교수

노동의 신학과 직업윤리


들어가기


- 여러가지 논의가 있지만 노동 혹은 일이라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 생계와 연결되어 있다.


- 노동이란 생계수단으로서 직업활동의 일환으로 생산활동을 벌이면서 생산물의 결과에 따라 임금을 받거나 이윤을 획득하는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 오늘은 신학의 관점에서 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 직업은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노동, 3가지 차원


- 인간에게 일은 3가지 차원이 있다.


- 첫 번째 생물학적 차원의 노동으로서, 노동은 호구지책으로, 의식주의 해결책으로서 노동이다.


- 두 번째, 사회적 차원의 노동으로 인간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는 것으로서 노동이 있다.


- 세 번째, 문화적차원의 노동으로, 인간은 노동을 통한 창조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며, 생산물을 통한 성취감과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 노동이다.


노동, 신학적 이해


- 문화명령으로서 노동 : 노동은 인간에게 부여된 위임commission 혹은 문화명령culture mandate이다.


- 하나님형상의 대리행위로서 노동 : 노동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다.


교정되어야할 노동의 신학적 오해


- 노동은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형벌과 저주가 아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바라본 노동은 창조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위임된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바라보는 노동은 타락으로 인한 형벌과 저주라는 소극적 의미를 지닌다.


- 하나님은 영원속에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6일간의 노동은 창조주의 노동적 활동이며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의 신개념이다. 무운동적, 비활동적 신관은 성경적 하나님 개념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적이며,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에 근거한 존재론적 신관이다. 일하시는 하나님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 예수 그리스도와 노동에서 볼 때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성육신 사역을 기억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신 이 후에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노동의 착취자가 아니라 일하는 자의 쉼을 보장하시는 주님임을 보여주고 있다.


- 영육, 성속 이원론은 노동 혐오적 신앙인을 조장한다. 노동없는 안식일이 오히려 인간에게 더욱 비인간화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노동이란 그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선을 제공하는 행위라야 한다.


노동과 소명, 직업의 도구로서 노동

- 루터, 직업윤리


- 소명Berut, vocation은 부르심의 이층구조를 철폐하고, 모든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것을 직업소명설이라고 한다.

- "당신의 집에서 하고 있는 일은 당신이 마치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만큼이나 소중한 가치가 있다."


-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해도 그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일은 수도자들이 금욕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보다도 탁월한 것이다.


- 종교역역에 제한된 소명을 세속 직업의 영역으로 확장함으로써 부르심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세속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속 직업으로의 활동ㅇ르 신적 부르심으로 간주함으로써 직업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덧입혔다. 이것이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이다.


-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도록 불러내심을 받았으며, 동시에 세상속으로 말과 행위를 통한 증언의 삶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 그러나 루터의 직업소명설은 한계까 있다. 루터의 권고는 현재의 직업에만 소명으로 제한할 위험이 있거나 현존하는 사회적 신분과 직업을 영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해의 여지를 가져올 수 있다.


- 하나님은 특정 직업에만 하나님의 소명이 있지 않고, 주님은 모든 직업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


- 칼빈, 직업윤리


-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soil Deo gloria


- 세계내적 금욕과 직업윤리 : 직업은 영혼의 수련도장이고 종말론적 결산의 태도로 살아가게 한다. 막스 베버의 노동윤리도 이와 비슷하다.


직장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노동윤리


- 노동관에 대한 편향된 관점은 교정되어야 한다.


- 자본가 중심의 노동관에서 벗어나서 청지기적 노동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청지기윤리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노동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을 제시힌다.


- 노동자 권위보호주의는 항상 기업과 적대주의적이라야 하는가? 기업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공익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나라의 외적 기관이다.


그리스도인의 노동윤리의 기초적인 문제


- 인권의 차원에서 노동윤리가 다루어져야 한다.


- 노동문제를 접근하는 오도된 처방이 있다. 목회주의적인 처방은 당신의 고통에 하늘의 위로가 있기를! 주님이 다 보상해주실 것이라는 설교조의 처방은 자칫 돌팔이 의사의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도덕주의적 처방은 이런 사태를 개인의 게으름이나 불성실만으로 돌리는 것이다. 관찰과 분석-해석-실천적 방법론을 통해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 노동자의 노동윤리는 모든 것을 주께하듯 하면서 달란트 비유와 같이 성실함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 기업은 교회가 아니며, 회사는 예배당이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 볼 때 영역주권론을 적용하면 기업의 운영원칙이 교회의 운영원칙이 되면 안된다. 각각의 운영원칙이 있는 것이다.


- 노동과 쉼의 관계가 정리되어야 한다.


- 대안적 노동사회의 창출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시장경제의 차원에서 대안을 생각하 ㄹ수 있다.


노동, 정리


- 노동은 인간의 생존과 생계에 필요한 수단이다.


- 노동은 인간다운 삶,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구차하게 구걸하며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게으른 삶과 그로 인한 빈곤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노동은 부를 창출한다. 그리하여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위해 노동해야 한다. 노동은 선을 바루히하는 적극적 방식이다.


- 노동은 인간안에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하는 통로이다.


- 노동은 직업, 즉 일자리의 도구이다.


- 노동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편이다. 그런적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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