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인간학*9번째강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라
거기서 다시 자신의 질서를 만들리라
자기를 부인하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찌니라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타자의 욕망이기 쉽상이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윤리적이다
위반적인 것들의 이름을 욕망이라 부르지 말라
우리는 원래 무엇인가를 추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며 자유를 누리는 존재이다
라캉수업이 1번 남았다 이제!!
20170605_철학아카데미
라캉의 인간학_백상현교수
예술의 역사와 목적, 1960년 2월 10일의 강의
들어가기
- 생각해보자. 라캉의 관점에서 플라톤은 히스테리적으로 '국가'를 썼다면? 어떻게 될까?
- 히스테리와 강박증이라면 주이상스'욕망'를 피해가려고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가?
- 그렇다면 플라톤이 피해가고 싶었던 욕망은 무엇인가? 바로 절제되지 않은 힘, 변화하는 힘이다. 이것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플라톤은 변화하는 힘을 이데아라는 피안으로 던져 버리고 현재를 강박증과 히스테리로 '국가'라는 형식으로 묶어 버린다.
- 그리고 그 국가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이상스와 마주치지 못하도록 자신의 히스테리를 복제한다.
- 이런 방식이 라캉이 정치를 읽는 방식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두려워하는 욕망을 피해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서만 끝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새로운 공간을 정치라는 장치를 통해서 탄생시키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국가이고, 사회이고, 가정이 된다.
- 이런 방식으로 보면 헤겔은, 칸트는, 소크라테스와 소포클레스는, 그들의 작품과 사상은? 당연히 주이상스의 입장에서 다시 서열화할 수 있는 것이다.
- 정치와 같이 회화, 건축 역시도 라캉은 주이상스와 대비하여 강박증과 히스테리를 분석한다.
- 지오토의 작품이 그렇고 사드의 작품이 그렇고, 제임스 조이스가 그렇고, 안티고네가 그렇다.
- 회화에서 보는 공백은 주이상스의 자리이다. 주이상스를 염두해 두고 공백을 두는 것이다. 공백 주면에는 당연히 공백을 피해가는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있다. 이것을 옥죄는 방식으로 라캉은 예술을 매듭짓고 그것을 조이는 방식으로 예술에서 주이상스를 찾아낸다.
- 예술의 목적은 공백을 드러내고, 그것으로 부터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주요 개념들, 라캉
- 예술의 역사와 목적들에 관하여 Sur I'histoire et les fins de l'art
- 아버지의 승화 La sublimation du Pere
- 베른펠트에 관하여 A propos de Bernfeld
- 기포와 비인간적 파트너 La vacuole et le partenaire inhumain
- 완곡한 품행 La conduite du detour
강의, 개요
- 필자가 보기에 이번 강의는 세미나 7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
- 라캉은 '예술의 기원과 그것의 고유한 목적'을 분명히 규정하면서 강의를 시작하고 있다.
예술의 역사, 목적들에 관하여
- 물론 라캉은 미학자가 아니다. 철학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라캉이 예술이라는 실천의 역사와 목적을 분석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승화 기능의 중요성 때문이다.
- 이것은 중요한 이유는 정신분석 임상과의 유사성 때문이다. 라캉에 의하면 예술의 목적은 세계의 산물들을 재현하는데 있지 않다.
- 오히려 그와 같은 재현된 산물들의 질서를 횡단하여 재현의 0도에 도달하는데에 목적을 가진다.
- 이것은 세계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대상들의 질서를 위반한느 절차이다. 승화의 절차를 대상에서 큰 사물로의 이행으로 보고는 라캉의 관점이 드러나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정신 분석임상 역시 환자의 무의식에 자리한 환상의 기둥들을 횡단한느 절차라고 할 수 있다.
- 쾌락-현실원칙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마음의 고정점들은 욕망의 원형을 구성하고 이것이 평생 반복되도록 고착시키는 일을 한다.
- 우리의 인생이란 이렇게 동일한 욕망의 구돌르 반복하는 소외된 절차에 다름 아니다.
- 따라서 정신 분석은 이와 같은 고착된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 이는 마치 예술 현재의 아름다움을 지탱하는 고정점들을 넘어서기 위해 위반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 정신분석은 환자의 욕망을 유형화하여 고정시키는 고정점의 기둥을 횡단하고, 파괴하여 그 너머에 이르고자 한다.
- 물론 그 너머에는 텅 빈 허무가 있다. 그곳에는 그저 아무것도 없거나, 없음이 있다.
- 즉, 공백이 있다. 이곳에 도달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임상절차는 환자에게 자신만의 새로운 욕망 구조를 발명해 낼 수도 있는 기회가 제공한다.
- 마치 예술이 아름다움에 관한 고정관념을 해체한 뒤에 도달한 공허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미를 창조해 내는 시도처럼, 예술과 정신분석은 승화의 관점에서 이 같은 유사성을 갖는 것이고, 라캉이 예술 분석에 주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물론 승화의 절차가 가진 보수적 성격 또는 존재한다.
시선, 현실
- 라캉이 볼 때 사물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질서를 인간의 눈으로 다시 해석하는 과정에서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 그 욕망은 바로 자신이 피해가고 싶어하는 것이면서,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 공백을 출현시키지 않는 사물의 질서에서 지배적인 질서를 다르게 배치시키는 어떤 장치나 기술을 통해서 꺽어서 주이상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 그러니깐 원근법 안에서도 공간을 비틀기도 하고, 2차원 안에서도 3차원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인간들의 몸부림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열정으로 바뀌게 되고 결국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예술은 하나의 시스템, 질서를 멈추게 만들고 새로운 공백과 질서로 안내하는 것이다.
아버지, 승화
- 예술이나 임상분석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엑스 니힐로의 과정과는 다른 보수적 승화의 과정이 존재하는 것인데, '아버지의 승화'라는 개념이 그것을 설명한다.
- 이것은 충동에 대해서 상징계가 승화의 절차를 강제하는 과정인데, 여기서 발생하는 만족을 팔루스적 주이상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에 대한 섦영르 위해 가캉은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모세와 일신교'의 텍스트를 분석한다.
- 이 두가지 텍스트에서 암시되는 승화는 일종의 보수적 승화라고 볼 수 있으며, 예술과 정신분석 임상에서의 승화와 차이를 갖는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베른펠트, 라캉
- 이어지는 강의에서 라캉은 '베른펠트'라는 정신분석가의 승화 개념을 비관한다.
- 개인의 차원에서 시인적 기질이 성적 욕망의 승화에 기여한다는 베른벨트의 이론을 분석하는 것이다.
- 여기서 라캉은 승화가 문화적이며 인위적인 절차의 문제이지 개인의 기질로부터 작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기포, 인간적 파트너
- 이어지는 강의는 본격적인 궁정풍 사랑에서의 승화연구이다.
- 이 역시 상당히 중요한 강의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우선 중세의 궁정풍 사랑이 욕망의 대상을 탈-대상화하는 절차라는 사실을 설명하는데 주력한다.
- 중세의 이 특수한 문학형식은 기사도적 사랑의 대상을 여성도 그렇다고 남성도 아닌 '비인간적대상-파트너로 기포화'하면서 고립시킨다.
- 이 같은 절차는 산물들의 질서를 붕괴시킨다.
완곡한 품행, 라캉
- 완곡한 품행은 바로 이러한 고립을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공백의 상태로 환원시키는 전략이라는 설명 만으로는 궁정풍 사랑의 본질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보다 근본적 이해를 위해서는 궁정풍 사랑과 아나모르포시스의 유사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 왜샹게임이 어떻게 단순한 원근법의 공백 포획 전략과 다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만 궁정풍 사랑이 가진 해체젝 특수성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데아
-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볼 때 이세상은 이미 한번에 재현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관점에서 예술은 재현된 세상을 다시 재현하는 두번의 재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예술가들을 엄청 비판하고 배척했다. 그러나 라캉의 입장에서 보자면 완전히 다르다.
- 라캉이 볼 때 플라톤은 예술가들을 경쟁자로 생각했다. 예술가들은 로고스로 접근하는 플라톤과 경쟁적으로 파토스를 통해서 이데아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보면 플라톤의 방식이 아니어도, 예술이라는 언어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승화, 개념
- 승화라는 것은 한 마디로 어떤 사물, 대상을 큰 사물의 자리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 기존의 삶은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상징체계에서만 만족을 하게 만든다. 대부분은 큰 사물의 자리를 피하고, 다른 사물에 욕망을 묶어 놓는다.
- 그것이 돈, 이성, 집, 미래와 같은 것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 큰 사물을 만날 수 있는 공백에 도달하면 결국 남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만 남는다.
- 욕망은 무한이 되고, 더이상 무한인 욕망, 즉 파토스를 가두려는 모든 것들로 부터 승화가 일어나는 것이 라캉이 생각하는 윤리이다.
- 인간은 주어진 타자의 욕망을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내는 존재이다.
- 주어진 욕망을 반복하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 주어진 욕망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스스로 창조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라'라는 것이 라캉의 인간학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서 창조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파토스를 통해서 그러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위반의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이렇게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가? 잘 생각해보라! 이 사회가 주고 있는 윤리 그리고 그것을 금지하라는 위반! 역시 모두 주어진 타자의 욕망이다. 강박이고 히스테리의 일종인 것이다.
-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공백을 욕망하는 것이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삶의 형태인 것이다.
- 이 후에 결국은 진리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게 된다.
민네이션, 생각
- 공백은 주이상스의 자리이다. 그래서 문학은 그 공백을 에둘러서 간다.
- 캔버스에 존재하는 공백들은 항상 자신이 피해가고 싶은 것들의 자리이다.
- 종교도 이와 같다. 공백을 만나야 비로소 진리가 시작된다. 진리는 언제나 새롭고 신난다. 그렇기 때문에 공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진리다운 것이 된다. 진리는 우리의 주이상스이고, 그것을 만나기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에둘러서 간다.
-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은 매우 다르다. 두 양식은 모두 공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로마네스크에서는 글라스창문이 없다. 하지만 고딕양식에서는 극단적으로 내부의 아름다움을 창문을 통해서 빛을 통해서 받아드리게 된다.
- '대성당들의 시대'라는 곡에서 공간이 무너지고 새로운 공간이 찾아온다는 모티브는 노틀담의 곱추가 여는 새로운 이방인들의 시대라고 볼 수도 있는가? 건축의 붕괴는 공백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 플라톤은 두려웠다. 스승이 만들어낸 카오스에서 나오는 공백들이 불안했다. 그 공백들은 어쩌면 이데아가 세어나오는 공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공간을 자신의 철학으로 메워가는 구조물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두려움을, 주이상스를 피해서 국가라는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진리를 가두었다. 그 진리는 자신만이 소유하게 되었고, 소유주로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 플라톤을 따르는, 역사를 따르는 많은 이들은 사실은 겁쟁이이다. 자신의 본질과 자신의 욕망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플라톤을 따르는 독재자들을 보라, 정치가들을 보라, 군인들을 보라, 학자들을 보라. 대부분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척점에 자신의 진지를 쌓아 놓고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 자신의 고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 라캉이 하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 자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는 것, 그것들과 마주하게 하고 무너져 버리고 다시 공백으로 돌아가는 것. 거기서 바로 자신의 질서와 진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되고, 공간에 대해서도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생각하는 임상과 치유의 개념이었다.
-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징체계는 만들어진 것, 타자의 욕망이 체계를 이룬 것, 그 체계가 우리의 내면에서 무의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라고 말한다. 자기부인으로 부터 모든 인생의 위반과 욕망들이 멈춘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게 된다. 새로운 창조물, 태초에 인간이 가지고 있던 위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위반을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질서지어진 인간의 시대는 끝나고 결국은 모든 것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식인 사랑의 방식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