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슈미트에 대한 저항과 극복_박성철 박사(독일 본 대학)
칼 슈미트는 '적과 동지'라는 테제로
헌법사상에서 가장 처음 등장한다
슈미트의 테제가 탄생한 것은 바로
정치신학에서였고, 정치신학은 곧이어서
주권자의 완전성과 절대성을 표방하여
나치즘을 비롯한 권위주의 정치사상을 발전시킨다
물론 현대에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슈미트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슈미트에 반대하는
절대주권에 반대하는 사상도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
굉장히 깊이 있고 좋은 강의였고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결국 이 싸움을 하는듯.
20150623_현대기독교연구원
정치신학과 한국교회_한국교회의 몰락 그 이후
제 1강_ 칼슈미트에 대한 저항과 극복
박성철 박사(독일 본 대학)
들어가기
- 슈미트는 누구인가?
- 슈미트는 근대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법철학의 개념과 법체계는 이미 세속화를 거쳤기 때문에 주권'의 신성한 개념이 은폐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인권의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권 담론은 성립될 수 없다. 발전할 수도 없게 된다.
- 이번 강의의 시작은 사실 어거스틴이 쓴 '신국론'이다. 고대가 끝나고 중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마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정치신학으로 보는 것이다.
- 매트가 시작하고 죌레가 발전시키고, 몰트만이 완성하는 방식으로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대한 반대편의 이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 슈미트가 정치신학을 근대화시켜서 새로운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슈미트부터 시작한다.
1. 어두운 유산, 정치신학
- 주권자, 정치신학
- 정치신학_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에서 다음과 같은 테제로 시작한다.
-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 이러한 주권자 개념을 '주권'을 하나의 '한계개념'으로 제한한다.
- 슈미트에게 주권이라는 것은 근대민주주의가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한 나라의 법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개념이다.
주권자, 하나님
-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주권자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종교적 영역에서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의 표상이 정치적 영역에서 주권자로서의 왕의 표상으로 전환되었다.
-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봉건제나 절대왕정은 결국 그 시대의 형이상학적인 세계상을 재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종교적 주권자의 표상이 근대적 정치영역에서 어떻게 수용되었고 또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가를 정치학적으로 접근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정통성, 정치신학
- 정치신학(슈미트) 3장에서 정치와 신학, 주권자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신학적 구조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 '근대적 국가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이다'
- 전능하신 하나님은 근대에 들어 전능의 입법자로 전환되는데, 이와 같이 근대적 국가론은 신학적 양식이 국가론의 양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 적을 만들고, 이러한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신학적인 정치를 실현한다. 하나님이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논리 때문에 그 당시의 감정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선택보다 하나님이 선택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 특정시대에 만들어진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시대 정치조직의 양식과 똑같은 구조를 갖는다.
- 신학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시대정신으로써 정치조직의 양식에 영햑을 미친다.
- 시대정신의 변화는 초월성의 개념에서 신개념이 등장했고 이것이 왕권신수설로 이어졌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초월성이 내재화되었다.
- 그리고 그 내제화된 초월성은 더이상 바깥으로 드러날 수 없었따.
- 19세기 왕의 개념이 사라지기 이전에도 두가지 독특한 현상이 발견된다.
- 모든 유신론적이고 초월적인 표상들의 제거와 함께, 새로운 정통성 개념의 형성이 그것이다.
- 왕의 제도와 정통성도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욕구 안에서는 독재에 의해서, 마초에 의해서, 나쁜 남자에 대해서 독재를 허용한다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2. 신정치신학, 이론의 시작
- 슈미트의 정치 신학은 '기독교의 언약과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양식의 동일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 문제는 슈미트의 사상이 전반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으며 그의 정치신학 개념 역시 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 1960년 부터 슈미트의 이론을 반대하는 개념으로 '신정치신학'이 출발하게 되었다.
- 신정치신학은 기독교 연악과 정치적인 양식은 동일하지 않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 신정치신학의 등장으로 정치신학은 통치론의 관점에서 모든 분야에 퍼지게 된다.
- 요한 밥티스트 메츠, 도로시 죌레, 위르겜 몰트만은 이러한 신정치신학을 잘 정립하였다.
- 메트는 칼 라너를 통해서 정치신학을 통해서, 죌레는 루돌프 불트만을 통해서, 몰트만은 칼바르트를 통해서 정치신학을 시작했다.
- 이제부터 칼슈미트가 이야기한 하나님=독재자 / 주권자 = 독재적 통치자'라는 개념을 넘어선 3명의 이야기를 해보자.
3. 요한 밥티스트 메츠, 정치신학
- 메츠의 정치신학은 '전체 신학을 인류학을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현재의 신학적 연구의 중요한 성과이다'
- 그러나 바로 이 인류학적으로 바뀌어진 신학은 보다 근본적으로 종말론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 세속성과 역사성을 잃어버릴 위험 속에 있다.
- 희망은 종말론적 지평 속에서만 세상은 역사로서 나타나게 된다.
- 메츠는 정치신학을 '현대 신학의 극단적인 개인주의화에 대한 비판적 교정'으로 이해했다.
- '현대사회의 상황 속에서 종말론적 소식을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강조하였다.
- 메츠는 믿음의 초월적이고 실존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신학적 방법론에서 탈피해야 함을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탈피로써의 저항이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정치신학은 종교와 사회 사이의 관계, 교회와 사회적 공공영역 사이의 관계, 종말론적 신앙과 사회적 실제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 두번째 성찰'이라는 것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성찰을 이야기한다.
- 정치신학은 특정한 정치이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존의 신학이 외면하고 있는 복음의 다양한 측면을 담아내기 위한 새로운 신학적 성찰인 것디다.
- 이러한 두번째 성찰은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다.
- 두번째 성찰이라는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복음의 범위를 사회적으로 확장시키고 보면 정치신학이란 현재의 신학 속에서 예수의 종말론적ㅇ니 선포와 사회-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 희망속에 기독교적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구원이라면 단순한 사적영역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시간을 걸어가는 인간이 만나는 모든 상황을 포함한다.
-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언약들인 자유, 평화, 공의, 화해는 사적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 기독교의 언약들과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양식의 동일화(칼 슈미트에 대한 해석)는 잘못되었다.
- 종말론적인 유보의 입장에서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는 매츠의 정치신학과 구별될 수 밖에 없다.
- 기독교 공동체가 평화와 공의에 대한 언약들을 지향할 때 현재의 역사적 현존재는 변화하게 된다.
- 이러한 지향성은 항상 새롭게 그리스도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의 반대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비판적이며 해방케 한느 위치로 이끌며, 또한 그것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 모든 종말론적인 신학은 하나의 사회비판적인 신학으로써 하나의 정치신학이 되어야 한다_매츠
4. 도로시 죌레, 정치신학
- 죌레는 생각과 실천의 새로운 관계 혹은 이론과 실제의 새롱누관계에 대한 대랍을 정치신학이라고 생각하였다.
- 정치신학은 신학의 부분 영역이 아닌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찾아가는 모든 영역을 정치신학으로 보았다.
- 계몽주의 이후에 발생하게 된 사회인식론적 문제인 전통적인 연결고리 파괴, 불확실성과 회의, 고립과 실망과 같은 것들에서 신학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였다.
- 죌레는 정치적 해석 혹은 정치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정치신학과 병렬적으로 사용하였다.
- 정치신학은 변화되어진 선이해에서 출발한다.
- 모든 인간에게 진짜 삶이란 단지 사회적 조건들과 사회적 희망들의 문맥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다.
- 사회적 변화는 인간의 변화, 인간의 선이해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 불트만이 기존의 신학체계를 비판하기 위해 탈신화를 시도한 것처럼 정치신학은 탈신화화의 자리에 이데일로기 비판을 수용해야 한다.
5. 위르겐 몰트만, 정치신학
- 몰트만은 바르트의 '정치적 예배'의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 몰트만은 정치해석학의 특징을 희망의 신학과 상관관계를 만들었다.
- 해석학이란 과거를 현재로 번역하는 기술, 즉 과거를 현재화하는 기술이다.
- 몰트만은 과거 속에 그것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도록 가리키는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의미에서 해석학이란 기억의 양식 속 희망이다.
- 기독교 해석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와 인간의 희망의 역사에 대한 언약으로 읽어 낸다.
- 몰트만에게 정치신학이란 '개별 신학 속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 몰트만은 그래서 각각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신학을 현실과의 연결성 속에서 정치신학이라고 말한다.
-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여성신학은 각각 정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 몰트만은 자신의 정치신학을 유럽사회의 '시민계급적 종교'엗 ㅐ한 하난의 비판이며 메시아적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종교에 붙잡혀 새로운 바벨론 포로기를 살고 있는 기독교 믿음의 해방이라고 보았다.
- 정치신학은 어떤 실제를 부르는 이론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복음의 빛 속에서 현존하는실제에 대한 성찰이다.
- 해방케 하는 복음의 빛 속에서 이론과 실제는 상호 교정하는 것이다.
민네이션
- 칼슈미트를 넘어가야 한다.
- 슈미트는 바로 한국보수의 원류를 만들어 냈다. 절대자는 주권자이다. 그래서 주권자는 절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그 판단에 따라서 공권력이 생기고 법을 정지시키는 효력이 발생한다. 그래서 주권자는 실제적으로 통치자이다.
-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절대자인 주권자의 결정과 판단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매한 다중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 안보의 문제와 무엇인가를 지키는데 있어서 다른이들의 의견은 필요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독재라고 한다면 칼슈미트는 바로 이러한 독재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 슈미트가 이야기했던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의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예외상태를 선언하는 사람이 주권자이다.
-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경쟁하는 가운데 만나는 슈미트의 논리의 유혹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미트의 논리를 영적으로 독재든지, 정치적으로 독재든지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주면 끝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정치의 문제를 신학의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는가?
- 바르트는 화해론을 통해서 정치신학의 문제를 종말론의 개념과 함께 가지고 온다.
- 우리는 종말론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현재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종말론이 열려져 있는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계속해서 무한으로 발산하는 열려진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희망을 자신의 방식으로 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의 주요한 내용이다.
- 슈미트가 이야기하는 단절은 종말에 대한 인간의 사유에서 신학과 정치의 대립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현실을 결정내리는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신학이 주는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에 따라서 현실의 정치적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치가 현실을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이 현실의 정치적 판단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 도로테죌레를 이해할 때 정치해석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삶에 대해서 이미 구조화된 결정들(칼 슈미트)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 슈미트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먼저 죌레가 정치해석학으로 슈미트가 그어 놓은 선들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면, 매츠는 그에 대한 언약들을 정치의 영역으로 가지고 옮으로써 방향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종말론에 대한 확실한 제시로 몰트만에 의해서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얻고 희망을 품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이라는 것도 어떠면 이스턴의 논리이기는 하나 칼슈미트의 계통을 밝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슈미트는 플라톤에서 가져온 개념으로써 불안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보수의 방식을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정리했다고 할수 있다.
- 이렇게 볼 때,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불안에서부터 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유에서 사랑에서 출발하는 방식으로 정치신학을 출발하려면 우리에게 언약이 필요하고, 신비로움이 필요하고, 희망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성취된 종말을 살아가는 순례자로써 미래비전을 그리스도의 오심과 회복으로 놓고 현실을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으로 놓고 가치의 판단의 문제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 현실과 동떨어진 믿음이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 있는 동시대의 시간적 동행을 인식하고 또한 매츠와 같이 고통의 문제를 정치신학의 중심에 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야 한다.
- 슈미트가 그어놓은 타자와 나, 너와 너희의 연결성을 끊어내고나면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담론이 필요하다. 이것은 진보의 테제인 비판성이 아니라 진보를 넘어서는 긍정성으로 부터 나아가야 한다.
-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며, 영원한 언약이며, 우리가 딛고 있는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참고 1_ 칼슈미트(위키피디아)
- 카를 슈미트(독일어: Carl Schmitt, 1888년 6월 11일 ~ 1985년 4월 7일)는 나치에 협력한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플레텐베르크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소상공인 요한 슈미트(Johan Schmitt)의 아들로 태어나, 가톨릭 문법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아텐도른 문과 김나지움에 있을 때도 가톨릭 신학생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대학은 베를린 대학교, 뮌헨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를 옮겨다니며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1933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한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나찌 히틀러의 독재 체제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주권에 대한 저작은 상당히 날카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어, 발터 베냐민,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등과 관련된 논의에서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논쟁적인 저서가 되어 있다.
1904년의 카를 슈미트
가톨릭 주의자
슈미트는 "나에게 가톨릭 신앙은 조상 때부터의 종교이다. 나는 단지 신앙고백의 점에서 가톨릭일 뿐만 아니라 출신으로부터나 감히 말한다면 인종으로부터 보아도 가톨릭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한 가톨릭 주의자였다.
그의 헌법이론의 근저는 철저하게 가톨릭 주의에 따랐다. 그의 가톨릭 주의는 가톨릭 신학에서 말하는 성과 속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성과 속의 통일성 관념은 그의 모든 이론과 저작에서 면밀히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신학은 성과 속의 이원론적 대립을 기초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국법학에 전면석으로 대항하는 가톨릭 주체의식의 학문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톨릭주의는 이러한 성과 속의 통일체인 가톨릭 교회를 모범으로 하여 헌법이론을 구성하는 태도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슈미트가 세속화 시대의 대안으로서 내놓은 것은 가톨릭 교회였고 그 다음은 가톨릭 교회를 모범으로 하며 그 병렬로서 형성된 근대 절대주의 국가의 질서였다. 이러한 모델에서 묘사된 포괄적인 질서 원리가 '대표'(Reprasentation)였다. 이것은 그의 헌법사상, 정치이론 그리고 기타의 문화이론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슈미트는 가톨릭의 자의식을 선명히 가지면서 자신의 학문적 만족의 장을 헌법학에서 발견하고, 공법적 형상인 가톨릭 교회의 파악을 통해서 법학과 신앙을 결합시켰다. 거기서 그는 가톨릭 주의를 거점으로 하여 헌법학적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는 결단주의적 법질서인 국가의 모범을 가톨릭 교회에서 찾았다. [1]
나치에 대한 협력
슈미트는 1933년 5월 1일 나치 당에 입당한다. 헤르만 괴링은 곧 그를 프로이센 추밀원의 고문관으로 임명했고, 11월엔 독일사회민주당 법학자 연맹의 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나치의 이념적 기반으로 생각했고, 국가의 총통(Führer)의 정당화가 특히 독재자(auctoritas)의 개념을 통한 법철학에 대한 고려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1934년 6월에 슈미트는 독일 법학자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고, 같은 달에 그는 ‘장검의 밤’에 일어났던 정치적 살인을 “가장 고결한 행정적 정의의 형태”(höchste Form administrativer Justiz)라고 정당화했다.
슈미트는 스스로를 급진 반셈족주의자로 생각했으며 베를린에서 1936년 10월에 있던 법학자들의 집회에서 그 장으로 활동했다. 이 집회에서 그는 "독일 법이 유대 정신(jüdischem Geist)의 오염에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 집회 이후 "유대인 학자가 발표하는 모든 논문에는 유대인임을 상징하는 작은 심볼이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두달 뒤인 12월에 SS가 발표한 〈암약하는 반체제 조직〉(Das schwarze Korps)에서 그는 기회주의적 존재이자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사상가이며 그의 반셈족주의는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점이 그가 초기에 발표한 나치의 급진 이론을 비판한 발언들의 인용을 통해 비판 받았다. 그 뒤, 슈미트는 그의 주요한 공직들을 잃었으며, 나치의 주도적 법학자의 지위에서부터 은퇴했다. 다만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1945년 슈미트는 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년여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그의 고향인 플레텐베르크로 1946년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에 그는 플레텐베르크-파젤의 그의 부인(?, housekeeper)인 안니 슈탄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학계나 정계의 주류로터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특히 국제법에 대한 연구를 1950년대부터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노쇠할 때까지 그의 친구 및 젊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았는데, 방문객 가운데에는 에른스트 융거. 야코프 타우베스, 알렉상드르 코제브 등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슈미트는 1985년 4월 7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플레텐베르크에 매장되었다.
슈미트가 나치 치하에서 했던 행위들에 대한 최근의 몇몇 변명에도(그가 살아있는 동안 어떠한 변명도 스스로가 하지는 않았다), 나치 치하의 그는 초기 하이데거와 함께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슈미트는 그의 나치 체제에서 유력한 지위를 누렸으며, 나치의 권력 강탈에 대해 사법적 외관(façade)을 제공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슈미트의 매우 통찰력있는 정치적 마인드는 나치의 진정한 본성과 그들의 리더십에 관해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슈미트는 명백하게 심지어 독재적 권력까지 가진 강력한 권력을 선호했으나, 그러한 권력의 형태가 히틀러 총통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권위주의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이 열려 있다. 만일 우리가 관대한 쪽으로 기울어질 경우, 그가 히틀러를 비스마르크로 착각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대한 의견은 슈미트의 <<독재론>>을 읽어 보았을 때 의심받게 된다. 그는 계엄적 독재의 장을 위한 비난을 주권적 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슈미트의 논의 가운데 꽤나 역설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나치가 승리하는 시기까지만 해도 그가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의 역할이 줄어드는 체제를 지원할 것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나치당 안에서 그의 지위는 그를 나치 독일 내의 법철학의 최고 권위로 만들기 위해 슈미트 스스로가 사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영향
조르조 아감벤과 상탈 무페를 비롯한 많은 저자들에 따르면 칼 슈미트는 오늘날 우파에게 필수적인 참고 대상인 만큼 좌파에게도 그런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의 논의는 슈미트의 위치에 대한 해석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현재 정치학의 문제에 매우 적절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외 상태의 문제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연설 속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외친 주장이 메아리치고 있는데, 이 속에는 전쟁상태 에서의 사법적인 예외적 관리 권력에 대한 주장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권력은 영장 없는 전자적 감시 금지법의 범주를 제한할 수 있다거나 그와 같은 감시의 모든 불법성이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해 사실을 합법적일 수 있다는 논의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는 외국 지식인 감시 법안{the Foreign Intelligence Surveillance Act}과 같은 법의 내용에 대한 위반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법에서의 전쟁상태 하의 최고통수권자로서의 대통령의 헌법적 권위와 대통령이 어쨌든 의회에 의해 군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된 절대적 권위를 받았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좀 더 슈미트주의자다운 말로 하자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그의 권력을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있다고 간주될 수 없는 권력이다. 단일 권력자 이론에 기초한 비슷한 논증이 최근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된 고문 금지법에 붙은 공식적 성명(부시가 지지한, 물론 국가 안보의 이름 하에 요구되었다면 무시했을 이 법률안)에서 또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감벤과 무페의 독자들은 슈미트의 작업에 담긴 정신과 그 내용에서부터 끌어내어져 나온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논쟁에 들어가게 된다.
슈미트의 영향력은 또한 최근의 정치 신학(정치적 개념인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에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슈미트의 논증)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도 보인다. 좋은 예로 유대계 독일 철학자인 야코프 타우베스는 슈미트에 대한 성 폴의 연구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Stanford Univ. Press, 2004}를 참조하라). 그러나 타우베스의 정치신학 이해는 슈미트의 것과는 크게 달랐고, 정치적 요구를 종교에서 끌어내는 것보다는 신학적 요구가 가지는 정치적 관점을 오히려 강조했다.
비슷하게, 영향력있는 정치철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비평(이 비평은 한국어판에도 포함되어 있다)에 참여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슈미트의 법적, 정치적 시각과는 다른 그의 시각을 전했다.
동시대 학자
2010년 현재 한국의 헌법학에서는 켈젠(1881년생), 스멘트(1882년생), 슈미트(1888년생)를 자주 언급하는데, 이 셋은 모두 히틀러 시대의 동년배 학자들이다. 법실증주의의 켈젠은 스위스로 망명을 가서 나중에 미국인이 되었으며, 통합주의의 스멘트는 히틀러로 부터 소외되었고, 결단주의의 슈미트는 히틀러의 헌법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2010년 현재 한국 독일의 이론과 판례는 모두 스멘트의 통합주의가 통설이다. 스멘트의 한국인 제자로 허영 (헌법학자) 교수가 있어서 권영성 교수와 최근까지 쌍벽을 이루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저작
《정치 신학 外》슈미트의 논문 10개 수록, 김효전 옮김, 1988년, 법문사.
《정치적인 것의 개념》원저는 1932년, 김효전 옮김, 1995년, 법문사.
《대지의 노모스》, 최재훈 옮김, 1995년, 민음사.
《독재론》원저는 1921년, 김효전 옮김, 1996년 4월, 법원사.
《파르티잔-그 존재와 의미》, 김효전 옮김, 1998년, 문학과지성사.
주석
↑ 김태홍《칼 슈미트 헌법이론의 가톨릭적 기초》(동아대학교 대학원)
참고 2_ 장보댕
종교적 관용·사유재산권 등 근대 주권론 선구 장 보댕
장 보댕(1529~1596)은 프랑스의 종교전쟁기의 인물로서 칼뱅파 위그노에 속했다. 리옹의 로마법 교수였고, 경제사상사적으로는 중상주의와 화폐수량설의 선구자였다. 보댕이 〈국가에 관한 여섯 편의 책〉(1576)에서 펼친 주권론은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이라는 개념과 함께 근대 주권국가의 이론적 기초로 평가된다.
종교전쟁기의 혼란상태에 직면해 보댕은 국가만이 질서의 수호자이고, 국가는 주권이 존재할 경우에만 성립한다고 보았다. 주권이란 그 행사에서 신민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국가에서 최고, 영속적, 단일적, 초법적인 권력”이다. “주권은 군주에게 속하며, 주권자는 주권의 구체적인 징표로서 입법, 선전강화, 공직 임명, 재판, 사면, 화폐, 도량형, 과세의 8권을 가진다.”
보댕의 주권론의 핵심은 “법으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주권자”라는 원칙이다. 이 개념은 국가주권을 외부적으로는 황제권이나 교황권 등의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고, 내부적으로는 봉건제후와의 계약으로부터 주권자인 국왕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중요한 점은 보댕이 주권자를 ‘법’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할 때, ‘법’의 개념이다. 이때 ‘법’은 인간 상호간의 동의나 계약에 의해 성립된 규칙을 의미하지 신의 법이나 자연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법은 인간의 동의와 무관하게 관철되므로 당연히 주권자를 구속한다.
보댕은 재산권,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주권자조차 구속하는 자연법의 내용으로서 파악했다. 따라서 조세징수권처럼 자연권을 제한하는 입법은 신민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비록 절대주의 체제를 옹호했고, 군주정을 가장 완벽한 국가 형태로 이해했으나, 중세적 복종계약의 체계로부터 자유로운 절대왕정을 통하여 종교적 관용과 사유 재산권의 보장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민주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보댕의 군주주권론은 더는 현재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 논리구조는 국민주권 개념에 대해서도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히 “주권의 최대 기능은 법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러하다. 국민이나 국민의 대표는 주권자로서 법률을 개폐할 수 있다. 물론 헌법국가적 질서 안에서 헌법은 법률에 대해, 중세에 자연법이 계약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국민은 주권자로서 헌법조차 개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주권의 법창설적 기능은 보댕의 주권론으로부터 연원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시사점은 권력분립과 국민주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권력분립론에 의거하여 주권이 분할되어 있더라도 분할된 권력은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단일한 원천을 가진다는 점이다. 만약 국가권력 간의 충돌을 해결할 절차가 규정되어 있지 않아서 입법권과 마찬가지로 국민주권에 근거하는 행정권의 행사에서 장기적인 장애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헌법 자체의 구성 오류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금민/사회비판아카데미 이사
참고3_요한 밥티스트 매츠
- 요한 밥티스트 메츠가 인간의 고통과 수난의 역사를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동료 소년병들의 참혹한 죽음을 체험한 것이 계기가 됐다.
▲ 스승 칼 라너와 메츠(오른쪽).
▲ 메츠의 주요 저서로 꼽히는 「역사와 사회속의 신앙」(1977).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는 1928년 독일 바이에른 아우어바흐에서 태어났다. 1952년 「하이데거와 형이상학의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4년 사제품을 받고 다년간 사목생활을 했다. 1962년 칼 라너의 지도로 '그리스도교 인간 중심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 모형'이라는 주제로 신학박사 학위논문을 작성했다.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뮌스터대에서 기초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65년에 이브 콩가르, 칼 라너, 에드워드 스힐벡스 같은 유수의 신학자와 함께 국제신학잡지인 '콘칠리움'(Concilium)을 창간하는 데 이바지했다.
메츠는 무엇보다도 인간 고통과 수난 역사를 신학적 사유의 중심에 둠으로써 신학의 얼굴을 새롭게 한 정치신학의 선구자이자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 신학자다. 메츠가 인간의 고통과 수난의 역사를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동료 소년병들의 참혹한 죽음을 체험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고작 열여섯이었던 메츠는 소년병으로 소집돼 수박 겉핥기식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에 배치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천진난만한 소년의 웃음과 전선의 불안을 함께 나눴던 또래 소년병들이 폭격기와 탱크의 맹폭을 받아 고통에 휩싸인 처참한 얼굴로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 체험은 메츠의 유년시절 꿈과 희망을 산산이 부숴놨고, 견고했던 신앙적 신뢰에 깊은 균열을 일으켰다. 메츠는 훗날 이 고통스러운 체험과 기억이 자신의 신학 생애와 운명을 결정짓고, 인간의 고통과 수난의 역사에 천착하게 된 근본체험이 됐다고 고백한다.
이 같은 근본체험과 더불어 동시대의 정신사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이들과의 대화와 만남은 메츠가 정치신학 근간을 세우는 데 큰 자극을 줬다. 특히 1960년대 초반 활발히 이뤄진 그리스도인과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비판적 대화와 희망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에른스트 블로흐,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했던 이들과 만남은 실존주의 신학과 초월론적 신학에서 벗어나 정치의식을 형성하게 해줬다. 또한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재앙의 역사와 제3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비참한 실존 상황은 '고통 당하는 이들의 권위'를 줄곧 변호하는 데 근본적 동기가 됐고, 유럽 중심주의 교회에서 문화적 다원주의 세계교회로 변화를 추동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역시 메츠의 신학적 전망 변화에 작용했다.
칼 라너의 초월론적 신학에 대한 메츠의 비판
메츠는 한결같이 라너를 스승이자 친구로 생각했다. 심지어 그가 스승 라너의 초월론적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했을 때도 변함없었다. 메츠는 라너의 신학이 인간학적 전환을 이룸으로써 스콜라적 객관주의의 견고한 바위를 깨고 나와 신학의 얼굴을 새롭게 단장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정치신학 역시 라너 신학의 빛으로부터 조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메츠는 이미 1966년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라너의 신학 역시 역사성이 없는 사사화 경향이 농후하다고 비판하고, 급기야 그의 주요 저작인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1977)을 통해 라너의 초월론적 신학과 결별한다.
메츠의 라너 비판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초월론적 신학이 '주체의 범주적-역사적 경험'을 '초월적 경험'으로 환원시켰다고 보는 데 있다. 달리 말하자면 라너의 초월론적 주체신학에서 경험의 개념은 역사적 경험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역사적 경험과 역사적 주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모순과 적대를 구체성이 상실된 초월적 경험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결국 비변증법적 화해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물론 라너는 메츠의 이런 비판과는 달리 주체의 초월적 경험이 역사로부터 분리돼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에 정향돼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라너의 초월적 경험의 구조가 과연 구체적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모순과 적대를 꿰뚫고 자기 정체성 정립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다.
메츠 정치신학의 출발점, 아우슈비츠
정치신학의 신학적 장소는 구체적인 역사이며 이는 특히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고통의 역사다. 메츠 신학이 시대 상황에 민감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우슈비츠가 그의 사유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신학적 사유에서 핵심을 이루는 '위험한 기억'은 아우슈비츠라는 구체적 역사와 관계함으로써 시대사적으로 규정된다.
메츠에게 아우슈비츠는 여태까지 수행해 온 신학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과연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것일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아우슈비츠를 그리스도교와 신학 전반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신호이자 규범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아우슈비츠 앞에서 지금까지의 역사 해석을 중단하고 역사 안에서 하느님 행위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해야 하며, '모든 것은 아우슈비츠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우슈비츠가 모든 신학적 진술의 출발점이 돼야 하며,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메츠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은 신학적 전통과 진술의 이데올로기 차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슈비츠는 신학적으로 주체도 맥락도 없는 사유체계와 신앙체계로부터 결별해야 한다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메츠는 시대와 역사와 무관하게 수행해 온 신학은 물론이고 사변적이고 제일철학적인 사유에 근거해 주체성을 정초하려는 신학적 사유방식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타자의 고통을 기억하는 '기억의 이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기억의 이성을 토대로 메츠는 자신의 정치신학 기획을 △신정론으로서 신학 △주체의 신학 △추종의 그리스도론 △성토요일 그리스도론으로 구체화한다.
신정론으로서의 신학
메츠에게 아우슈비츠에 닿아 있지 않은 모든 그리스도교적 신정론과 의미 진술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신정론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이들의 구원에 관한 물음이며 동시에 하느님에 관한 진술은 우리 역사에서 부당하게 고통받는 이들, 희생자들, 패배자와 같은 타자의 구원 외침과도 같다. 따라서 메츠에게 신정론은 신학의 정수와 같은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메츠는 무감정의 신학과 고통의 문제에 민감하지 못한 신학을 비판한다. 신정론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축소되거나 과잉응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정론의 문제는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응답을 찾는 방식으론 결코 수행될 수 없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물어야 하는 종말론적 물음이기에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메츠는 아우구스티노의 고전적 신정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노의 신정론은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종말론적 물음을 인간의 죄에 대한 인간학적 물음으로 대체해, 세계 내 악과 고통의 원인과 책임을 하느님이 아니라 배타적으로 인간에게 떠맡겼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반문을 무력화시켰다고 본다. 또한 신정론 문제를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 관점에서 보는 입장에도 비판적인데, 그 까닭은 하느님이 함께 고통을 당하신다는 입장은 인간의 고통과 사랑을 화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배가시키고, 결국 하느님 사랑의 전능함과 그 사랑의 불패성을 종속시킨 관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메츠는 삼위일체 신학에 근거한 신학적 응답에도 회의적이다. '하느님과 하느님 사이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이 견해는 하느님 안에서 영속되는 고통으로 안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츠는 신정론이 하느님을 향한 반문으로 구성돼야 하는데, 그것은 고통의 역사에 직면해 하느님 자신만이 '그의 날'에 정의를 이룰 수 있기에 그렇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정론을 '고통에 민감한 신학' 혹은 '하느님을 향한 고통의 정치적 신비'라 일컫는다.
이 신비는 무엇보다도 시편, 욥기, 탄원의 노래, 그리고 예언서의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기도 전통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기도의 언어는 그 자체로 고통의 언어이자 위기의 언어이고, 근본적 위험에 처했을 때의 언어요, 탄원과 고발, 외침의 언어다. 말 그대로 이스라엘 자녀들의 투덜거림이다. 이러한 하느님 신비의 언어는 일차적으로 고통에 관한 위로로 가득 찬 응답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열렬하게 하느님께 반문하는 것이며 긴장감으로 가득 찬 기다림이다. 이는 마치 예수가 하느님마저 떠나버린 십자가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 속에서 드리는 외침의 기도, 곧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 체험은 오로지 자기 지평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의 고통, 심지어 적대자의 고통까지도 수용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용어설명
신정론=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과 악의 존재가 서로 공존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신학적 개념.
정치신학=신앙의 제재(題材)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신학. 이전의 신학은 모두 사회의 구원을 무시한 개인적 구원, 개인적 문제에만 국한되었다고 비판했다. 해방ㆍ여성신학 등으로 발전했다.
참고 4_도로테죌레
- 도로테 죌레
1929년 9월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조직신학자, 독문학자, 여성신학자이다.
1954년 독일 괴팅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2년 독일 쾰른 대학에서 "계몽주의 이후 신학과 문학의 연관성"이라는 주제로 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 초빙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3년 4월 독일에서 별세하였다.
다수의 저서 가운데 비교적 후기 작품으로는 Gegenwind. Erinnerungen (역풍. 회상들,1995)
Jesus von Nazareth (나사렛 예수, 2000, 공저)가 있으며,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로는『사랑과 노동』, 『고난』, 『나를 따르려면』, 『환상과 복종』, 『현대 신학의 패러다임』,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등이 있다.
- 책 소개 : 신비와 저항
신비주의를 민주화하다!
세계적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신비와 저항』. 독일의 여성 신학자인 저자의 역작으로, 온몸으로 신학을 펼쳐간 그녀의 사상이 녹아 있다. 신비와 저항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지성적 합리성을 주장하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신비주의를 민주화하고 있다. 신비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믿음과 오해 등을 경계하면서,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잊혔거나 감추어진 신비주의 전통을 다루고, 다른 종교에 등장한 신비주의의 기능을 검토한다.
또한 신비주의를 종교성 맞물린 사회적 상황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읽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삶과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승화시킨다.
- 목차
- 목차
서문
도입
제1장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1. 우리 모두는 신비주의자이다
1.1 유년 시절의 신비
1.2 신비주의자들은 아주 다른 사람들인가?
1.3 신비적 감수성
1.4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가 나를 결정한다" (C.S. 루이스)
2. 황홀경
2.1 자아를 벗어나기와 자아 속으로 몰입하기
2.2 번잡함과 연합성: 마르틴 부버
2.3 라비아와 수피 신비주의
2.4 만수르 알 할라디: 하나님의 양 모하메드
2.5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3. 정의-방법-경계
3.1 의심의 해석학으로부터 배고픔의 해석학으로
3.2 방법의 다원주의와 상황성
3.3 참된 신비주의와 거짓된 신비주의의 구별
4. 다른 언어를 찾는 것
4.1 무지의 구름과 망각의 구름
4.2 "왜 라는 질문 없이"
4.3 지배하지 않는 언어
4.4 부정의 길
4.5 역설
4.6 침묵
5. 여행
5.1 하늘의 사다리와 땅의 정거장
5.2 정화-조명-합일: 고전적 신비주의의 세 가지 길
5.3 다른 여행의 흔적: 토마스 뮌처
5.4 경이로움-내버림-저항함: 오늘을 위한 신비적 여행의 개요
제2장 신비적 경험의 장소
6. 자연
6.1 장소성과 비장소성
6.2 아침의 찬송: 해리엇 비쳐 스토
6.3 유일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6.4 나눔과 치유: 땅에 대한 다른 관계성
7. 에로티시즘
7.1 천상적 사랑과 지상적 사랑의 불가분리성
7.2 노래 중의 노래: 아가서
7.3 마르그릿트 포레트와 가깝고도 먼 일자와의 황홀경
7.4 황홀경의 비통함: 데이빗 허버트 로렌스와 잉게보르크 바흐만
7.5 성스러운 힘, 성인의 힘
8. 고난
8.1 욥: 악마적 신비적 내기
8.2 고난을 향유하는 것과 연민 사이에서
8.3 "설령 밤이 될지라도": 십자가의 성요한
8.4 20세기의 고난의 신비에 대하여: 마취되기보다는 죽음의 고통이 더 낫다
9. 공동체성
9.1 감추어진 성스러운 불꽃: 하시딤
9.2 공동체성-미래의 시내산: 신비주의에 대한 부버의 논쟁
9.3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청빈하며 핍박당하나 자유롭게: 베긴회
9.4 친구들의 공동체와 내면적 빛
10. 기쁨
10.1 시간에 대한 신비적 관계: 틱 낫한
10.2 술집 주인, 어릿광대 그리고 다른 유형의 바보: 분리의 제거
10.3 춤추고 뛰어 오르기: 기쁨의 신체적 언어
10.4 신비주의와 미학의 관계성
제3장 신비주의는 저항이다
11. 우리가 해방된 세상에 살았을 적에……
11.1 우리가 잠들어 있는 감옥: 지구화 더하기 개인주의화
11.2 집으로부터 집 없음 속으로
11.3 행위와 꿈: 마르다와 마리아 되기
11.4 인종 차별의 열매
12. 나 그리고 내가 버린 나
12.1 감옥에서 최고의 파수꾼이 되는 나
12.2 "네가 아무것도 아닌 곳으로 가라"
12.3 금욕을 찬성하기와 반대하기
12.4 이기적 자아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톨스토이의 전향
12.5 다그 함마슐트의 "차디찬 반지"로부터 자유하게 됨
12.6 성공과 실패
13. 소유와 소유 없음
13.1 소유와 존재
13.2 옷을 벗고 옷 벗은 구원자를 따르기: 아씨시의 프란시스
13.3 존 울맨과 노예 사업
13.4 자발적 가난: 도로시 데이
13.5 중도의 길과 광기 어린 자유
14. 폭력과 비폭력
14.1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연합성
14.2 국가에 대한 불순종의 의무: 헨리 데이빗 소로
14.3 마하트마 간디와 아힘사
14.4 "우리의 무기는 아무 무기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14.5 희망과 패배 사이에서
15. 해방의 신비주의
15.1 세베리노의 죽음과 삶: 호아오 카브랄
15.2 무릎 꿇는 것과 올곧게 서는 것 배우기: 해방신학
15.3 "죽음과 춤을 추려면, 춤을 잘 추어야 한다." 페드로 카살달리가
15.4 돔 헬더 카마라: 벙어리의 목소리
15.5 기도하는 법 배우기와 다른 신비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