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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02. 2017

기호와 코라

줄이아크리스테바_철학아카데미

20171102_철학아카데미

정신기회학과 줄리아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

크리스테바의 접근은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낸다


들어가기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서 볼 수 있는 모성과 남성, 주체와 객체, 부정과 긍정에서 주체의 분열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쓴 공포의 권력의 이야기 특히 '아브젝시옹(주체화되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채식주의 선언 자체로 이미 아브젝시옹이다

'무한한 빛을 받지 않는 짐승은 없다. 비열하고 추잡한 시선도,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격렬한 저 멀리의 태양빛이 어루만지지 않는 것은 없다'


크리스테바가 쓴 공포의 권력은 Pouvoirs de l'Horreur이고 다시 말하면 호러블한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이라는 것도 다시 말하면 '힘'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주체가 언어의 상징적 질서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혐오의 역겨움을 아브젝시옹 개념과 연결시킨다. 아브젝시옹abjetion은 주체성 구성단계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낯선 것을 추방당하고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항상 모호한 나의 경계를 창조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때 낯선 것 혹은 바깥에 있는 것들은 혐오하고 거부하고 거의 폭력적으로 부정되는데 이것을 아브젝트abject라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다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추방하는 과정이 바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브젝트는 나 자신을 의마하며 결코 버려질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최초의 아브젝트는 나를 죽음으로 보호하던 어머니이다. 내가 나인 주체가 되려면 어머니와의 동일시에서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이는 어머니와 동일시되던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는 낯선 장소에 버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나 자신들에 의해 그/그녀의 자아경게들은 지속적으로 위협받는 동시에 유지된다는 것이다.



모성적 큰 사물, 부정


헤겔의 부정성은 변증법에서 negation이라는 부정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개념에 대한, 정신에 대한 현상에서의 반대를 헤겔의 부정성이 받아서 합이라는 절대진리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와서는 충동은 현실에서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인식하지도 선택하지도 못한다. 크리스테바는 헤겔의 부정성과 프로이트의 충동개념을 합쳐서 rejection이라는 거부의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상실은 '주체가 있고 그 주체의 의해서 거부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체가 사라져 버려서' 인식할 수 없는 공간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 후에 그 공감에 어머니가 다시 나타날 때는 어머니는 아기에서 상실되었던 빈 공간에 새로운 대상objet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이것을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이론보다 더 기원으로 들어가는 전거울단계라고 지정한다. 다시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전 거울 단계는 1차 나르시시즘 전의 오이디푸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모성적 큰사물을 인식하게 해주고 언어로 진입하는 과정을 준비하게 만든다. 라캉에게서는 남근을 상징하는 팔루스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고, 어머니를 욕망하는 주이상스에 다가가지 못하는 주체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이런 식으로 욕망을 풀지 않는다.



사랑, 인정


서양철학사 아니 서양의 역사는 항상 인정을 받는가 아닌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인정받기 위해서 인과성과 정당성을 찾아내고, 인정받기 위해서 스스로 객체로 살게 되기도 한다.인정받기 위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하면 주체는 항상 '없음'에서 시작해서 욕망의 주체가 되어 버린다.그런데 다른 길이 있다.


크리스테바에게서 보여지는 개념은 인간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라는 것이다.생명을 잉태한 생명의 당연한 관계는 주체화해주기, 스스로 쇠퇴하기이다. 자신의 자리를 새로운 사랑의 대상에게 내어주고 스스로 객체가 되어가는 과정이 사실은 인간의 본질이며, 행복이라는 것이다.사람은 사랑하는 존재로, 사랑을 잉태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스스로 객체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공포의 권력, 제 1장 아브젝시옹에 대한 방법론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자아가 있듯이, 하나의 초자아에는 하나의 아브젝트가 있는 것이다. 아브젝트를 만드는 것은 초자아이다.그것은 바로 '내'가 길들여진 야수적인 고통인데, 주체가 그 고통을 아버지로 바꾸기 때문에 숭고한 동시에 광적이다. 이것은 흔히 전환pere-version 그리고 도착증pervesion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이질성은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우지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나를 공격하고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부적당한 것, 시체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형태의 아브젝시옹일 것이다.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락해 버린 시체나 배설구나 죽음 같은 것들은, 연약하고 위선적인 우연으로만 그것에 대항한느 동일성을 격렬하게 뒤집어 놓는다.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 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반역자, 거짓말쟁이, 양심을 속이는 일, 파렴치한 강간자, 구하는 척하면서 살해자는 자이다.



자신, 아브젝시옹


불가능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아브젝트와 다름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아브젝트야말로 자기 존재 자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체가 겨냥한 모든 대상들의 존거 최초의 상실에 단초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주체의 경험에서 그 절정의 형태를 가질 것이다. 사실 존재, 의미, 언어, 그리고 욕망을 가능케 한느 결핍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자신의 아브젝시옹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의식, 무의식


지금까지 욕망은 언제나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이제 욕망을 견뎌낼 수 없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그 존재의 근간에는 거부exclusion가 있다. 그런데 거부는 이른바 신경증이나 정신병의 여러 형태인 부정negation과 그것의 여러 양상들, 이를 테면 위반trnsgression이나 부인denegation, 그리고 배척forclusion 같은 것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들의 역동성은 무의식이 부정성의 변증법에 의존하므로 무의식을 문제 삼는다.


신경증이나 정신병의 경우와 달리 아브젝트ab-ject에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기 분열이나 공포증과 관련해서는, 이 무의식 고유의 부정성에 대한 분절이 그 효력을 잃고 있지 않은가하고 자문해 본다. 아브젝트나 그에 따르는 상황 속에서 무의식의 내용들은 배제되거나, 아니면 이상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주체/대상간의 명확 구별이나, 아니면 적어도 방어나 거부를 그 안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젝트의 상태 속에서 적어도 승화라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마치 신경증에서의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처럼, 아브젝트에서는 나와 타자, 안과 밖의 대립이 존재한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대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억압, 상징계


프로이트에게서 1차 억압은 아버지의 이름이지만 크리스테바에게는 상징계로 들어가기 전, 그러니깐 아버지의 이름을 만나기 전에 이미 '상상계적 현실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억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은 존재 자체, 생명 자체가 모성적 큰 사물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미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크리스테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억압에서부터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억압과 배제, 내것이 아닌 것들을 내것 밖으로 배출하는 작업들이 사실은 '내꺼 만들기'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코라


아브젝시옹이란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위기이다. 아브젝시옹만이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는 이 상태의 덧없음을 증언한다. 신은 비난하는 질투로 그 사실에 침묵한다. 게다가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에 외관을 부여한다.



도착성, 예술성


아브젝트는 도착성과 친척뻘이다. 아브젝트는 도착적인데, 내가 느끼는 아브젝시옹의 감정은 초자아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금지나 규칙, 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하는 차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왜곡시키고 곡해하고 부패시킬 뿐이다. 즉 그것들을 더 잘 부인하기 위해 실컷 이용하는 것이다. 아브젝트는 예술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에술가에게서 부패가 그것의 가장 명백하고 알려진 사회화된 특성을 가지게 된다. 아브젝시옹의 이 어중간한 도착성이 형성되거나 배제되기 위해서는, 도덕, 종교, 법과 같은 법칙과 금지의 든든한 동의가 필요하다. 법칙의 비호 아래 얼마간 지배하다가 결국 압제적인 것이된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적인 위치는 점차 위협당한다.



어떤 아브젝시옹, 어떤 성스러움


아브젝시옹은 모든 종교의 구성물과 함께 한다.그리고 그 구성물들이 와해되었을 때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져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아브젝시옹의 여러 구성물딜이 성스러운 것을 규정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아브젝시옹은 모계적인 특성을 지배하거나, 그 지배력이 남아 잇는 사회의 이교도적인 의식에서 보이는 오염이나 더러움과 관련된다. 아브젝시옹이 가진 정화작용이 다양한 양태, 즉 다양한 카다르시시는 종교의 역사를 이루어내고, 종교사를 통들어 탁월한 예술로서의 카다르시스로 종결된다. 카다르시스적 관점에서 예술적 경험은 분명 아브젝트를 말하고 그것을 통해 정화디며, 아브젝트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림으로써 종교의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그것은 아마 고대 이래로 여러 형태의 족교가 생서오디고 또 붕괴된 후에도, 단지 그것의 예술적인 경험만으로도 명맥이 이어져 간다는 사실이 설명해 줄 것이다.



채식주의자, 아브젝시옹


채식주의자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그러나 채식주의자'라는 선언 자체가 '아브젝시옹'의 시작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런데 작가가 약간 꼬았다. 오히려 '혐오스러운 것을 숭고함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주체화가 바로 '공포의 권력' 혹은 '호러블한 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욕망이면서 아니 오히려 욕망 이전의 충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내부 구조는 계속해서 주체화되기의 경계 만들기이고,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시계추처럼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처제와의 근친상간의 시작은 '몽고반점'이다.


몽고반점은 기호계에서는 생명의 근원적인 지점을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르시시즘의 수용체인 코라로 소환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상징계-현실계에서는 이미 자동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징계 이전의 상상계 사이에서의 기호계를 창조해야 한다.마지막에 주인공은 죽어가는데 죽어가는 과정에서 독자는 주인공을 살려내는 가운데 읽는 사람들에게 부활시킨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을 잘 그려낸 채식주ㅇ자


민네이션, 어린시절


어린시절 어렴풋한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4살정도였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말을 어느정도는 했지만 막 시작하던 때라서 언어로 기억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시절 어머니는 내게 많은 시간 '상실'로 다가왔다. 상실된 어머니는 어느순간 다가와서 새로운 객체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상실된 순간 나는 오롯이 혼자서 나'라는 사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 어머니가 돌아오면 새로운 객체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누구인지, 나랑 어떤 관계인지를 한참 생각해야했고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과정 가운데서 나는 타자를 인식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타자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마찬가지로 어떤 것들이 거부되면, 상실되면 그 반대편에서는 존재하는 것들,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그렇게 두뇌의 분할은 현실의 분할을 만들어내고 명백하게는 해야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할 수 없는 것들의 세상으로 주름이 생긴다. 이절성과 혐오, 내것과 내것이 아닌 것에서 나는 주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성장이나 자아정체감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민네이션, 생각


라캉이 이야기하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순간 타자의 욕망에 붙잡혀 버리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사회가 구성해 놓은 이미 연결된 세상의 의미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나아가는 사이, 다시 이야기하면서 '상상계-기호계-상징계' 이런 배치에 끼여 있는 기호계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상징들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미 상징계로 들어서기 전에 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계에 도착하면 아이는 이미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기호계들의 연결고리들을 부정, 파기, 억압시키게 만들어 진다.아이들이 우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기호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들은 언제나 상징계의 언어로 소통을 하려고 한다. 가끔 아이들의 눈속에서 기호들의 공유를 겪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호계 안에서 주체들은 상상계에서는 빠져 나왔으나 자기 스스로를 끌어 안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것은 포함시키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들은 밀어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이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내자신인 것처럼 1차적인 소통을 하다가 어느순간 사라져버린다. 상실해 버린 어머니의 존재의 빈 공간에서 두려움과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빈공간에는 숭고함이나 장엄함 등이 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숭고는 상징적 질서에서 '멋지다, 범접할 수 없다. 대단하다'라는 것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경계에 서 있다'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민네이션, 고민


욕망을 중심으로 주체되기가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주체가 될 수 있을까?무엇인가가 없는 것, 그 전제에서 시작해서 주체를 구성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엇인가가 충분히, 충만히 있는 곳에서 시작해서 전체를 구성하면 어떻게 될까? 아브젝트가 주체와 다른 것들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원죄론'은 더없이 주체를 구성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제시될 수 있지 않을까? 죄'라는 것은 계속 나 자신을 부정rejection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되고, 죄를 지으면 자기 자신이 아닌게 되는 타자화의 경향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주체론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을 스피노자는 예속이라고 말하면서 주체를 이루는 것들을 죄가 아니라 자연에서, 신에서 다시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기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정신 속에서도 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도 그러한 기호계의 코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민네이션, 연결


미쉘푸코가 이야기했던 '감시와 처벌'에서 왜 처벌이 이루어지는가, 혹은 바보들의 배'를 생각해 보면 아브젝시옹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사회적으로 볼 수 있다. 사회 역시도 아브젝시옹을 통해서 자신을 구성할 기호들을 찾고, 그 기호들을 상징계 안에서(자신들이 정해놓은 약속, 언어, 규칙) 다시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벰의 호모사케르'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의 아브젝시옹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아브젝시옹 의해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바로 호모사케르인 것이다. 한나아렌트의 'co-founder'의 개념으로 볼 때 크리스테바가 찾아낸 공간 '기호계'차원에서 새로운 상징계를 구성하자는 것과도 마찬가지일 수 있는 것이다. 르네지라르에 의해서 '희생양 이론'은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계의 쓰레기들을 희생양에 담아서 공동체 밖으로 버리면, 공동체 안에서는 잠시나마 기호계의 잔치들이 일어난다. 그 이야기는 기호들이 어떤 가치 정향, 가치 편중, 가치 소유의 관계를 가지기 전의 원시성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이유로 '애무'의 개념이 나오는데, 이러한 애무는 사실은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처럼 1차원적인 언어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기호계로 연인들은 돌아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 안에서 타자와 같이 만날 수 있는 기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라캉이 사용하는 '언어' 적 접근에서만 보자면 이미 상징계의 언어인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언어 이전의 기호적 코라계(특이한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충동으로 플라톤의 본능의 수용체)를 발견해 내었다. 스피노자의 존재의 욕망인 코나투스가 어떻게 보면 공포의 권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동하려는 욕구, 살아가려는 충동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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