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Context
text라는 문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구텐베르크 갤러시라고 부른다
text의 성질 상 축적과 연관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텐베르크 갤럭시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지식이 성장하고
이러한 지식들 간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하게 된다
modernism은 이러한
구텐베르크 갤럭시가
계몽주의라는 사조를 만나서 발빠르게 구조화된
하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인간을 상하로 나누고
나누어진 인간 안에서도 좌우로 나눈다
내부의 증명없이도
외부의 객관성을 가지고 분류를 시킬 줄 아는 것
이것이 모더니즘의 무서움이며
구텐베르크 갤럭시가 내포하는 위험성이다
현실 속에서 숨이 막히는 것은
사람이 존재해야할 실재 속에
이데올로기나, 이상이나, 관습이나,
문화가 존재해 버릴 때
사람이 없고 system이 남아서
자율적으로 운영될 때이다
모더니즘의 자율성은
이러한 제도와 규칙 그리고 합의에 의한 합리성을 지향한다.
이것은 잘 만들어지면 법으로 표현되고
엉성하게 만들어지면 관습이나 도덕으로 존재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러한 규정들이 해체된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개인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구텐베르크가 존재한다
분해되고 해체되었지만 다시 집합할 때는
더욱 강력한 자가정당성을 탑재하고 등장하는 것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구텐베르크 갤럭시의 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쩌라고?
text자체를 해체하는 것
이것은 몸이다
몸의 언어는 text로 존재하지 않기에
축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는다
살깣이 느끼는 context라는 것은
오직 개인의 것이기 때문에 판단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context화된 살깣의 언어가
말의 언어로 표현되어지면 그 생명력을 잃어 버린다
기표라는 형식과 기의라는
의미의 머나먼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형식과 의미는 사회적인 것이라서
서로 연결성이 없다
그 연결성을 찾는 것 속에는
강제성과 요구가 혼재한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사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사랑하는 표현이 된다
아직도 풀리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성육신incarnation의
언어를 구하다가 보면 결국은 부활에 다다르게 된다.
몸의 언어로 살아난다는 것은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나고 부딪히는 가운데 몸과 몸이 만나는 것
이것을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갤럭시 속에서,
말에 먹혀서
언어가 정의해주는 대로 살아가는,
구조화된 문화 가운데 이러한 야다'를,
몸의 언어를 배우고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그러나 사실 그리 어렵지도 않다
진리가 번쩍 거릴 때 움직이면 되리라
- 동사 -
걸어가면 되리라
- 명사가 살아나서 움직일 때 -
오라
걸으라
들으라
그래서 명령은 이러한 구조에서
우리를 '동사'로 부르는 희망과 자유의 메아리다
언어가 우리를 사로잡기 전에
시간이 우리를 붙들어 메기 전에
살깣이 반응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할 때
걷고
뛰고
듣는 것
이것이.
Context 속에서 포스트머더니즘적이지 않게
삶의 의미를 지켜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