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벌써 10년 전일이다
그 후에 많은 책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말 많은 이들의 이 ‘민감함’ 때문에
때론 힘들어하고 때론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구나 생각했다
베르그송의 철학을 배우면서는 더더욱
이 민감함이 언어로만 표현되는게 아니라
직관에서부터 심리에 이르기까지
언어와 다른 방식으로도 민감함이 표현되고
또한 내가 바깥으로 찾아들어가서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사물들이 내안에 자기들의 자리를 틀고
인상impression되는 것을 알았다
인상된 것이 인지된 것보다
더 큰 세계를 이루었지만 나는 잘 몰랐다
단지 어떤 여백이나 여유에서만
나는 그런 인상된 것들의 흔적을 느꼈고
그것들을 글로 쓰면 시가되기도 하고
수필이 되기도 했다
라캉을 공부하면서 라캉이 보았던
현실에서 계속 소멸해가는 실재계
오직 순간에서만 반짝거리는 진리의 공백
그것들은이 바로 인상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서야 인상의 공간에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기억속에 남아 있던 어떤 이미지들
헤르만헤세의 표현에서 잠깐이나마
그 형체를 감지할 수 있었던 어떤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이미지들을
무시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치환하면서 기억을 이어갔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기도 했고
어떤 영화의 한장면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그 이미지들에
나의 감정들을 담아 놓고는
누군가 찾아올 그 날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직접 그 이미지들을 재현하기도 하고
흥얼거리도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들이 지났을까
다가오는 사물들과 사건들은
그 날의 기억들과 연결되어서
완전히 다른 감각을 선물해 주었다
그 어떤 것도 이전과 같은 기억일 수 없었던
언어로 치환되지 않은 실재계들의 연속에서
나는 매번 새로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매번 피로감을 느꼈다
새로운 것들은 날마다 새로운 의미였고
새로운 것들의 연결에서는 언제가
그 당신의 사건들과 상태들은
새로운 상황을 예견했다
민감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냥 현재를 감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감각들이 이루어낼 연결들의
예감을 기대하는 것까지.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혹은 사건이 발생하는 곳에서
나의 감각은 증폭이 되었고
인상들의 축제가 벌어졌었다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감에 더불어
새로운 수 많은 아이디어가 휘돌고 다녔다
그러한 까닭한 까닭에
부모님과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생각이 많고 애늙은이 같은
말이 없지만 진지한 아이였고
친구들의 세계에서는
생각은 깊지만 행동하지 않는 친구
먼가 여러가지를 고민하는데
먼가 이렇다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친구로 통했다
그러나 나의 세계에서는
나만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내면의 여러가지 인상들을 불러 놓고
그 때의 감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에
순수한 여라가지 자아들이 놀러와서
둘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차받은 자아, 자랑스러워하는 자아
슬퍼하는 자아, 기뻐하는 자아
미친놈처럼 널뛰는 자아
시무룩한 자아
모두가 둘러 앉아서 나를 구성하고
자기들끼리 히히낙낙거리면서 즐겼다
그런 내면의 자아들의 모이는 밤이면
나는 낭만이라고 걸어 놓고
흘러가는 시간을 폐장하고는
만들어지는 시간을 개장하고서는
마지막일 것 같은 축제를 벌이고
새가 뜨기 전 새벽을 향해서 치달았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나의 세계와 부모님의 세계에서.
나는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나의 세계와 친구들의 세계를.
그렇게 경계를 왔다갔다하면서
때로운 소심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내가 민감한 사람이라고 보여지는
한 단면이다
내면의 세계가 다각적으로 보일 때,
다른이들의 세계가 다면적으로 보이기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이유를
단번에 알아 차리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입은 셔츠 한올의 느낌이
그 사람의 내면의 한 웅큼의 공간이라는 것.
그 사람이 신은 신발의 문양 하나가
그 사람 감정의 한쪽 면이라는 것을.
그 사람의 어떤 면은 좋지만
어떤 면은 나랑 맞지 않는 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나의
변덕이라고 이야기하고는
너무 변덕이 심해서 같이 못 놀겠다고,
너무 너는 예민하다고 했다
나는 단지 당신들의 여러 자아가 보이고
그 중에 어떤 이하고만 친구를 삼은 것 뿐인데.
그 후로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면을
비추어 보이지 않고는.
그냥 내성적이거나 필요할 때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어디서나 가장 늦게 잠드는 사람이
되었고, 눈빛 하나에도 삼라만상이 춤추는
그런 예민함을 숨기고서는
나만의 세상을 즐기면서 살았다
글로 이렇게 표현하는 내내
나는 경계를 왔다가 갔다가 한다
나의 세상에서 다른이들의 세상으로
잠들어 계신 부모님의 세상에서 나의 세상으로
언어와 감각 사이
인지와 인상 사이에서
나는 항상 경계를 왔다 갔다가 한다
이쪽에서 보다가도 저쪽에서 보기도 한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MCN(미친놈)이라는 대명사로 놓아 두셨다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내면을 돌아보면서
나는 이런 내가 너무나 좋고 기쁘다
예민하고 세심하지만
그 만큼 다른이들이 자아를 이해하고
또한 세심하게 대할 수 있어서
사랑으로, 배려심으로 채워지는 이상
아래로 쌓여진 언어 이외의 것들에서
더 많은 것들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이 이런 말을 이해못할 것이다
그래도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나는 더욱더 내 자신 속으로 파고들고
새벽이 동터오르는 때까지
게츠비의 저택에서의 마지막 축제를
계속해서 즐겨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