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전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지시하셨다
"맞은 편 마을로 가라
들어가보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줄에 매여 있을 것이다.
줄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왜 그러시오?'하고 누가 묻거든,
'이 나귀의 주님께서 필요로 하십니다'하여라"
대화하는 시점은 언제나
구조 안에서 일어난다
그 구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토대로써
실질적인 토대도 있지만
우리의 언어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단어, 문장, 맥락의 구조도 있다
어떤 문화를 익히려고 하면
그 문화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럼 사물들과 나란히 있는지
아니면 소유하는 개념인지
알게 되고 그걸 사용하면서
자신도 그런 방식으로 살게 된다
여기까지 오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그 안에서
자유의지로 세상을 꾸려가고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만드는데
그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예수님.
나귀를 데리고 오라는 말씀도
생각해 보면, 왜? 그냥 지금 만들면 되잖아
바다도 잠잠케하고, 물위도 걷고
떡도 축사 한번에 5000명을 먹이는데.
왜 나귀세끼하나에 이렇게
공을 드리는것 같은가?
이런 이상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왜 그럴까?
자신의 능력이 있고.
자신의 소유 아래 모든 것들이 있는데.
광야의 시험이 문득 떠올랐다
명예에 대한, 소유에 대한, 권력에 대한.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편의 대답에서 의아해 했는데.
오늘은 왠지 그게 이해가 갈 것 같다
그 이유가 직관을 타고 넘어와서
뒤통수를 뜨겁게 달구고는
곧 눈물이 되어서 떨어진다
왜 이렇게 인격적인가?
왜 이렇게 우리를 위하시는 건가?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능력보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문화와 생활세계를
그대로받으시고 그 안에서
그 꾸불꾸불한 세상의 시간에서
꾸불꾸불 선을 그어 가는 것 같은데
펴보면 그게 하나의 직선이었다는 것이
바로 진리가 우리의 삶에서
등장하는게 아닌가?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러한 인격적인 대화, 다가감, 마주침들이
즐비하게 나를 감싸고 돌면서
결국 깨닫게 된다
이 분이 나의 세계를 인정하고
나를 배려해주는 구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패턴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구나
무력으로, 강제로 하지 않고
나의 자유의지가 살아나도록
항상 기다렸구나! 때로는
거침없는 질문들로,
마냥 기다리고 기다리는
집나간 아들 기다리는 바보 아빠처럼.
결국에는 항상 언제나
깨닫고 무너지고 돌아오는 지점이지만
사랑이구나. 이 분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를 이용하려는 것도 아니고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인격적으로 부르시는 거구나
세상에서는 쉽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정해버리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하시는 일은
힘없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은
그 초대의 손길이 사실은
나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사랑이었구나!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러 나를 살리셨다
더 정확히는 나를
더욱 사랑하셨다
나에게는 이제 반응이 남았다
그 사랑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까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무차별적 순종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은
나의 자유의지로, 사랑을 담아
조금씩 다가가는 것
영원 속에서 한발짝 걷는 것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그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
나를 오늘 자유를 얻고
사랑을 받았다
이제 예수님 등에 태우고
빛나는 보좌가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주께서 쓰시는 나귀가 되어야 겠다
기쁘게 함께 죽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