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의 생활

by 민모네

미국 이민국에서 불법 체류 경고문을 받자마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생활을 계속하면서 더 감사하게 느낀 점은, 그 당시 내가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 자였다는 점과, 혼란스러운 조언들 사이에서 불법은 안된다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었고, 제대로 유학 수속을 받아보고 싶다던 나에게 아끼지 않고,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신 부모님이다.


아끼지 않는 금전적인 지원이란, 혹은 가난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자영업을 하시던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우리에겐 당연하게도 빚이 많았다. 가난이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시장에서 옷을 구입해서 입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고, 시장에서 상의 하의 만원에 한벌을 사면, 내가 입고 그리고 또 동생에게 물려주는 시스템을 유지했다. 사실 옷 한 벌에 만원도 여러 벌을 구입하면 가격을 깎아주시기도 했다. 중학교입학 시절 나는 30만 원을 넘게 내고 교복을 구입해야 했는데, 내게 가장 비싼 옷은 교복이었다. 주말에 입을 사복이 없어도, 나는 교복과 체육복이 있어서 괜찮았다. 새 겨울 패딩이 없었지만, 나는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떡볶이 코트가 있었고, 메이커 가방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온라인으로 구입해 준 책가방이 있었고, 생리대를 살 수 없어 걱정할 일도 없었다. 사복이 없어서 주말에도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면 주말에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얼마나 예쁘게 보이는지... 아마 믿지 않겠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겨울에 입던, 역시나 시장에서 구입했던 노란색 상의와 바지 한벌. 초등학교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다 그랬는지, 한쪽 다리 무릎 쪽이 찢어졌었다. 어머니는 개나리 같은 노란색 바지에 검은색 실을 사용해 꿰매어주셨는데, 그땐 그게 너무 창피해 한쪽 무릎을 가리고 앉곤 했다. 지금은 웃으며 어머니께 노란 바지에 검정실은 진짜 아니지 않냐고 말하곤 한다. 당연하게도 그 옷 역시 동생에게 물려 내려갔다. 어머니는 그때는 참 힘들어서 아이들 영양제 하나 사 먹일 생각도 못했다고 웃으셨다. 학교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있다가 올 때도, 나는 참 많이 굶으며 다녔는데, 어머니는 유독 작은 내 키에, 그 시절 내가 잘 먹지 못해 키가 작은 건 아닌지 마음 아파하시곤 한다.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고이 간직해 놓다 동생에게 가버린 첫 메이커 신발까지, 동생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울먹이며 부모님께 상황을 여러 번 설명했다. 학생비자란 무엇인지, 보통 미국 유학에서 어떤 과정들이 필요하고, 나는 어떤 것을 하지 않았는지. 고이 모셔온 미국 이민국에서 받은 경고문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황을 인지하고, 주변을 수소문하셨고, 이민 변호사분에게 상담을 받고자 하셨다. 당시 정확한 시기와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미국 학생비자 거절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부모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시기도 시기였지만, 나는 이민국에서 경고문까지 받았기 때문에, 내 케이스를 받아 진행하려는 변호사분이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서울에서 일하시던 미국 이민 전문 변호사 한분께서 아버지와 상담을 진행하셨고, 비자가 거절이 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을 할 것인지 물었다고 했다. 상담 및 수임료로 당시 우리에겐 꽤 큰돈인 몇 백만 원을 부모님께서는 지불하셨다.


부모님은 변호사분과 상담 후, 학생비자가 거절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모의 도리를 지켰다고 하셨다.


나는 변호사와 함께 학생비자 인터뷰 준비를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가려고 했던 기독교 사립학교는 미국 교육부에서 인증한 교육기관이 아니었고, 따라서 학생비자 발급 역시 안 되는 곳이었다. 연방 교육부에서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커리큘럼을 주정부 요구 조건에 맞춰 변경해야 하는데, 학생 한 명을 위해 커리큘럼을 변경시키고 추가로 돈과 시간을 들여 승인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학비용을 계산했던 부모님에게도 나에게도, 학교를 추천했던 미국 목사님도 모두 참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에게 최선의 선택은 무조건 기숙학교가 아닌, 홈스테이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저렴한 학교였다. 근처 두 군데 다른 사립학교 중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학교를 선택했다. 교육의 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 영어는 늘겠지라고 막연하게 마음먹었고, 학교에 연락해 지원서를 넣었다.


변호사는 학생비자를 심사하던, 주한 미국 대사관 영사가 놀라 누가 이렇게 서류를 준비해 줬냐는 질문을 할 정도의 두꺼운 서류를 준비해 주었다. 내가 관광비자로 미국에서 머물렀던 동안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작성한 서류들이었고, 절대 불법체류를 의도적으로 하려던 상황이 아니었음을 어필하는 문서들이었던 것 같다. 변호사는 미국 학교 및 홈스테이분들과도 대화를 진행했고, 서류를 준비하는데 당연하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국에서 나는 중졸인데, 이러다가 미국으로 학교를 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다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들어가야 하나? 그사이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마음은 답답한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서, 나는 고졸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플랜 B: 혹시라도 미국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고졸 검정고시 후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서의 대입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마음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한국에서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미국에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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