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아실현이 아닌 자아시련

by 민네

연차가 오래될수록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상실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직장에서 자아실현 운운하는 건 이제 구시대적 유물이다.


내 하루를 채우는 감정이 짜증과 우울만 남아버려 아주 작은 균열에도 지진이 난 것처럼 반응해 버린다. 이런 공간에서 하루에 꼬박 8시간, 출퇴근시간+준비시간까지 포함하면 11시간을 꼼짝없이 투자해야 한다니


20대 초반 첫 회사를 다닐 때. 그때는 뭘 하든 참 열심히 했었다.

궁금한 건 옆 자리 대리님에게 묻던, 우리 팀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옆 팀 팀장님에게 묻던,

하다못해 다른 본부 관련부서에 음료수를 들고 가서 물어보곤 했으니까

그래서 의도치 않게 얼굴도장을 팡팡 찍고 다녔다.

(회사 주변에서 아무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부러 먼 곳만 바라보는 지금의 나와 정말 다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내 업무 역량도 따라서 성장했다. 그때 내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고 사랑받았다.


사내 팀 이동 공문이 올라오면 우리 팀으로 오지 않겠냐는 스카우트를 받기도 했었고 이건 정말 아직도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회사 앞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황당한 제안도 받았었다. 이건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일인 것 같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회사생활이 즐겁고 자체로도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10년 차가 훌쩍 넘어버린 내 모습은 어떤가?


지금도 청년 실업이 극심하지만 내가 첫 취업을 하던 당시에도 역대급 취업난이라고 했다.

빠른 년생에 고등학교를 일찍 졸업해 남들보다 2년이라는 시간을 앞서갔던 나는 대학 졸업 후 3개월 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대기업 계약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이후 내 삶의 발판이 되게 해 주었으니까.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들어간 첫 회사에서의 방향키를 잡은 나는 12년째 이 직무를 계속해 오고 있다. 타 직업군에 비해 이직이 쉽고, 인맥으로 재취업이 가능한 직종이라 공백기 없이 이직도 가능했다. 연차가 쌓인 덕에 내 나이 또래 중위소득보다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밖에서 보면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직장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매일 밤 다음 날 출근 할 생각에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날 때는 오늘의 해가 뜬 걸 원망한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다. 과거에 좋아했던 일들을 다시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된다. 곧 지나갈 노잼시기이겠거니 했지만 너무 길어진다.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다. 상사들과 부하직원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는 애매한 포지션. 꼰대도 아닌 그렇다고 MZ도 아닌. 가슴이 답답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직장은 입 다물고 자기 일을 묵묵히 잘하는 사람에게 더 준다. 보상을 주는 게 아니라 일을.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내 힘으로 절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지독히도 출근하기 싫을 때는 떠올린다.

월급날에 통장에 찍히는 몇백만 원의 돈

내 자아를 팔아 월급을 벌고 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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