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이 Dec 01. 2023

이러다 논문도 쓰겠다

아니지. 이러다 통장 거덜 나겠다. 다이어리가 뭔데.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거위의 꿈. 인순이 언니-


그렇다. 나에게도 꿈이 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따뜻한 엄마. 일을 즐기는 여성. 행복한 꿈을 나누는 동료이자 친구. 긍정적이고 힘을 주는 선배... ' 등등 (좋은 건 다 갖다 붙인다.)  

한번뿐인 인생인데, 꿈은 한 번 이뤄봐야지. 그래서 그렇게 정신없이 사냐? 나한테 하는 말이다.

일도 여러 개, 그 와중에 공부도 한다. 거기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또 일을 벌인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없다.'


내 간절함을 안 따라주는 건 내 얇은 기억력이다. 이제는 돌아서면 곰방 곰방이다. 너는 누구냐? 여긴 어디고? 뭐 하러 왔지? (저만 그런 거 아니라고 해줘요. 제발) 이런 내가 믿을 거라곤 '다이어리' 뿐이다. '다.이.어.리.' 얘가 나의 껌딱지가 되어, 나의 실수들을 어느 정도 선방해 주곤 했다. 학창 시절부터 함께 했으니, 이~삼십 년 됐겠다.




다이어리에 얽힌 스토리도 많다. 중학교 앞 선물 가게에서 처음 접한 다이어리. 비닐로 되어 있고 링이 달린 작은 수첩 같았는데, 그 비닐 사이로 '보이즈 투 맨' 사진을 끼워 넣었던 것 같다. (그때 엄청 좋아했었지.) 그 수첩에는 친구들 생일과 시험 일정을 적었다. 좋아했던 가수들 공연 일정도 빼곡히 적어놨던 것 같다. 그리고 재수 때 다이어리는 연애사로 도배를 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처음 사귄 오빠와의 데이트를 열심히 적었던 것 같은데. 그 오빠가 바람피우고 날 차버린 날, 그 다이어리를 발기발기 찢어서 쓰레기봉투에 버렸던 기억이 있다. (나-쁜. 잘 살고 있냐? 그땐 내가 너무 순수했었다.) 취업 준비 중일 때는 우울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왜 저만 취업이 안 되는 겁니까. 저를 뽑아만 주신다면 제 한 몸 불사 지를 준비가 되어 있단 말입니다.', '집에서 눈치가 보인다. 밥이라도 적게 먹어야겠다.'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을 적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대치동 학원 강사 시절, 그때의 다이어리는 굉장했다. 빼곡한 스케줄이 나를 인정해 주는 성적표 같았다. (그만큼 통장도 두둑했다. 그때는.) 그렇게 나의 역사와 함께 했다. 다이어리는.


일을 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나의 일상은 더욱 바빠졌다. 정신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처절하게 실감 났다. 정신만 잠깐 놓아도 순간이었다. 일에 빵꾸가 나거나, 꼬맹이 학원 일정이 꼬이거나, 집안일을 놓치거나. 그래서 더 열심히 다이어리를 썼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그렇게 써 온 다이어리만 20여 개가 넘는 것 같다. 종류도 다양하게. 이쁜 것, 귀여운 것, 색다른 것, 유명한 것, 광고 엄청하는 것, 비싼 것 등. 웬만한 건 다 써봤다. 정말 신기한 건 다이어리가 다 비슷한 것 같아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돈 좀 써 본 사람들은 알지.) 그렇게 매년 겨울이 되면 우리를 유혹한다. '저를 선택하시면, 내년에는 분명 대박 나실 거예요. 내년에는 꿈을 이루실 거예요.'  맞아. 그래. 내년은 잘 될 거야. '자~ 집에 가자.' 하고 집에 데려온다.


책상 한 번 쏵 치우고, 좋아하는 펜을 꺼내놓고. 집중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빠찍' 처음부터 망쳤다. 아. 악. 으악. 너무 싫다. 한 해를 망치는 거 아냐.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그냥 쓸까, 새로 살까.' 신기하다. 매년 다이어리를 쓸 때마다 똑같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라고 매번 진심으로 쓰기 시작해 보지만, 또 '빠찍'한다. 이때부터는 다이어리의 진짜 용도가 아닌 나의 강박에 시달리는 애물단지가 된다.



올해 새벽 기상을 참여하면서 알게 된 지인분이 말하셨다. "그냥 막 쓰세요. 색깔도 칠하고. 팍팍 쓰세요." 너무 쉽게 말하는 그녀.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뭐가 있나?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다이어리 쓰는 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드디어 시작된 나의 집요함. 책을 찾아 읽었다. '다이어리에서 시간 관리까지'에 대한 내용이라면 다 읽었다. 좋은 건 알겠는데, 아줌마가 하기에는 너무 무린데. 그럼 아줌마가 쓴 책을 읽어보자. 그렇게 나는 계속 찾아 읽었다. 꽤 설득력 있는 부분도 있고, 따라 해 보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시간 관리하겠다고 읽은 책들 중 일부


자. 그러면 직접 해 봐야지. '다이어리 구입!'  궁금한 건 다 해봐야지~

그렇게 나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온전히 다이어리 사는 것에 돈을 쓴다. 다 시험해 보는 거야 합리화하며. (짝꿍이 이 글을 보지 않기를. 다이어리 과소비 한 것과 관련해 짝꿍에게 사과합니다.)


돈을 그렇게 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 마음에 쏙 든 '다이어리'는 없다는 것을. (그걸 돈을 그렇게 쓰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거니? 경제 공부는 왜 하니?)

그래도 득이 된 건 있다. 다 써 봤으니, 앞으로 다이어리를 고민할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매년 이맘 때면 다니던 교보문고도 안 가도 되고, 인터넷 사이트를 안 뒤져도 된다. 각자 특색이 있으니, 목적에 맞게 구입하면 된다라고 꾸역 합리화를 한다.


굴러다니는 다이어리 수첩들


비즈니스맨으로 거듭나리라. 그렇다면 플랭.. 다이어리.

한 해 미친 듯이 살아보겠다. 갓생 살기에 딱인 피.. 다이어리.

인생 자체를 설계해 성공하리라. 그건 쓰리. 다이어리.

필요한 것만 하고 살 거야. 이것은 불. 다이어리.

엄마들을 위한 슬. 다이어리.

인생 가볍게 사는 거지. 그럼 작은 사이즈 영.. 다이어리.

종류별로 다 있는 리. 다이어리.

이쁜 건 포기 못해. 디자인 다이어리는 교보나 아트박스, 텐바이텐을 가자.

다이어리보다 커피가 좋다. 스. 다이어리.


끝이 없네. 적어보니, 많이 사고 많이도 썼구나. 중요한 건 다이어리에 적힌 기록들인데, 일 못하는 사람들이 꼭 연장탓 한다더니, 살짝 부끄럽네. 이제는 그러지 말자.


매년 행사처럼 '다이어리'를 고르고 사는 것에 진심이었다. 뭐든지 쉽게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내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그만큼 일 년, 한 해가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들을 의미 있게 쓰고 싶다.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와 나의 사람들에게.




덧,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다이어리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집 꼬맹이도 다이어리를 사겠다고 한다.



#2024 #다이어리 #계획 #기억력 #메모 #갓생 #교보문고 #쇼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