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길은 험난하다.
*겨울 막바지에 제작한 독립 출판물 '을지로 야옹이'를 매주 브런치에 소개합니다
나도 은은한 육향을 느끼며
‘평양냉면부심’을 부리고 싶다.
어른의 길은 험난하다.
스물일곱이면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다.
나이 말고 음식을.
그러나 평양냉면이 잠시나마 들었던 허영을 꺾어주었다.
평양냉면의 첫맛은 충격이었고, 두 번째 맛은 경악이었다.
‘아무리 식초와 겨자를 넣어도 네가 생각하는 그 맛은 절대 안 난다’는 말이 떠올랐다.
27년 일생을 함흥냉면만 먹어 왔다.
평양냉면의 존재는 애청하던 수요미식회에서 처음 알았다.
도대체 무슨 맛이기에 냉면 하나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걸까.
너무 궁금했고, 평양냉면 유경험자 친구를 꼬드겨 주말에 바로 을지로 우래옥에 갔다.
당시 블로그에 맛집 포스팅을 했는데, 우래옥 포스팅 제목이 ‘평생 함흥냉면만 먹기로 결심했다’였다.
삶은 소고기를 물에 헹군 후 그 물에 면을 넣은 것 같다는 후기를 남겼다.
후식으로 주는 스카치 캔디가 제일 맛있었다며 포스팅을 마쳤다.
그 후 평양냉면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다.
“점심으로 평양냉면 먹으러 갈 건데 갈래?”
2년 후 여름, 팀원으로부터 평양냉면 탐방 초대장이 날아왔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평양냉면을 인증하는 사진들이 하루에도 두세 건씩 올라오던 때라 다시 한 번 먹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평양냉면을 ‘소고기 헹군 물맛’이라고 폄하했던 걸 까맣게 잊어버린 나는 ‘을지면옥’으로의 초대를 수락해버렸다.
“저.. 비빔으로 먹어도 돼요?”
막상 가니까 용기가 안 났다.
“비빔은 ‘진짜’ 평양냉면이 아닌데~”
같이 간 평양냉면 매니아들은 나를 놀렸다.
아무래도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물 셋, 비빔 하나 주세요.”
주변을 둘러봤다.
전부 투명한 국물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면, 대충 흩뿌린 고춧가루가 장식된 물냉면을 앞에 두고 있었다.
“에이, 그래~ 비빔으로 시작하면 되는 거지”
일행 중 한 명이 애써 위로해줬다.
나름 자부하던 먹방 인생이었는데 애송이가 된 기분이었다.
주문한 냉면이 나왔고, 나를 위로해주던 일행에게 국물 한 숟가락만 먹어보겠다고 부탁했다.
‘훗 나도 이제 진정한 미식가가 될 수 있는 건가!’
안타깝게도 내 입맛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소고기 헹군 물맛밖에 느끼지 못했고, 아무 말 없이 멋쩍게 웃으며 내 비빔냉면을 비볐다.
새빨간 양념은 딱 봐도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내 입맛에 맞을 것 같았다.
아. 기대와 달리 비빔냉면도 슴슴했다.
그 정도 붉은색이라면 무한 ‘쓰읍-’, ‘하-‘가 나올 텐데 정말 하나도 안 매웠다.
매운맛이 나려고 하자마자 달짝지근함이 맴돌더니 후추가 강펀치를 날렸다.
평양은 어떤 곳일까.
사는 게 너무나도 퍽퍽하니 음식만큼은 슴슴하게 먹자- 뭐 이런 주의인 걸까.
평양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불불이 불족발(완전 맵다)’을 대접한다면 그들이 내 심정을 느낄 수 있을까.
먹으면 먹을수록 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옆 테이블의 할아버지 무리는 평양냉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즐기고 계셨다.
본래 소주 안주라 함은 기름지고 매우며 자극적인 음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늘. 아니었다.
연륜이란 것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감히 애송이는 따라 할 수 없는 멋짐이었다.
결국, 난 또 절반을 남겼고, 돌아가는 길에 핫도그를 사 먹었다.
‘평양냉면’에 자부심 있는 사람을 ‘면스플레인’이라며 비꼬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물에서 소고기 헹군 물맛이 아닌 은은한 육향을 느낄 줄 알고,
뚝뚝 끊기는 메밀 면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멋진 사람들이다.
올여름에도 인스타그램에는 평양냉면 빈 그릇 인증 샷이 넘쳐나겠지만,
나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안 됐다.
할머니가 되기 전까지는 애송이처럼 후식 냉면이나 먹을 것 같다.
을지면옥
을지로3가역 5번 출구로 나와
30초만 걷다 보면 손으로 쓴 간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