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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INO Mar 22. 2023

우리 볼 수 있으면 보자

<오롯이 시리즈> 오롯이 홀로 '제주'

퇴사를 하고 제주도에 혼자만의 퇴사여행을 갔을 때였다. 도착하는 순간까지는 너무나 맑은 하늘이었고, 심지어 노을도 환상적이었더랬다. 해변 한 켠에 텐트를 치고 풍경을 즐기며 저녁을 먹고 분위기에 취해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서 날씨를 검색하니.. 응? 태......풍?


사실 알고 있었다. 태풍이 근접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애써 부정하고 출발했었을지도 모르겠다. 태풍의 진로가 바뀔 수도 있어보인다는 그 한 마디 말만 믿고 떠나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떠나왔던 여행. 이대로 접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 더 눌러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허나, 바람은 드세지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실려 작디 작은 물방울이 여기저기 내려 앉을 수 있는 곳에는 무작정 내려 앉아 조금씩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내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서둘러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어쩔 도리가 없이 나도 제대로 정리할 틈도 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한 가득 쥐고 차로 철수했다. 이미 시간은 늦었고 호텔로 들어가자니 이미 술을 한 잔 마셔서 운전도 어려웠기에 꼼짝없이 차에 갇혔다. 의도치 않았던 차박. 그렇게 비 바람이 몰아치는 태풍의 밤을 보낸 뒤, 본격적으로 제주도는 태풍의 바람 속에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일정 내내 태풍에 발이 묶여 어디도 갈 수 없이 호텔에서 하염없이 밖만 바라보다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태풍처럼 지나 간 퇴사 여행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가는 날.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아졌다. 태풍은 모두 물러갔고, 하늘은 청명했다.


'진짜 너 야속하다 정말..'


몇 일 더 있을까했지만, 의도치 않게 예산을 너무 많이 써서 더 이상 남아있을 돈도 없었기에 비행기에 올랐다. 의자에 앉아 비행기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기대를 너무 했나..?' 내 퇴사 여행은 완벽할 것이고, 나는 이 여행을 끝으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퇴사여행도 도전의 일부였었다. 모든 일정을 캠핑으로만 보내는 것.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딘가 실망이 컸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어 인간 관계도 이런게 아닐까 라고 번져나갔다. 제주도의 날씨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기대하는 나의 삶도 나의 인간관계도 내 뜻처럼 되지 않는 것에 너무 크게 연연하는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었던가 싶었다.


그 때부터였을까? 나는 모든 것에 특히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너무나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현재를 충분히 즐길 뿐이다. 인간 관계 속에서도 왠만해서는 '우리 꼭 보자'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대신 애둘러 말한다.


'우리 볼 수 있으면 보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기대가 없다는 건 의지가 없는게 아니냐고, 누군가와의 만남을 그저 피하는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그렇지 않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의 찬란할 미래가 기대되고 누군가와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리고 그 사람 자체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프다.


허나 현재가 아닌 미래의 기대로 살아가다보면 그렇지 못한 현실에 실망해서 정작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놓치게 되는게 싫었다. 날이 갈 수록 서로 다른 삶의 길 위에서 살아가느라 나의 혹은 상대의 갑작스런 사정으로 그 만남을 미루더라도 조금은 덜 실망하고 덜 상처받기 위함이었다.


큰 기대를 품고 갔던 제주에서 태풍과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는 태풍같았던 퇴사 여행에서 어쩌면 나는 제주도로부터 상황이 어떠하든 지금을 충실히 보내고, 내 뜻대로 되지 않던 인간 관계를 조금은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돌아온 듯 하다.


* 그럼에도 가끔은 기대를 하고 가끔은 '꼭 보자'라고 하는 건 그만큼 간절하게 내일이 기대되고, 누구보다 당신의 안부가, 당신의 모습이 그립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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