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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농 Sep 03. 2019

당신, 위로해줄래요?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이야기하다.


  가족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친다면

  사업장 인근에서 여느 때처럼 야외수업을 하던 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딸인 교사와 다른 교사 두 명, 열몇 명의 아이들과 여유를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에게 80대 노인이 운전하는 차가 돌진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아니, 아비귀환이 됐다.


  고통과 두려움에 우짖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잔인한 엔진 소리에 묻혔다. 아이들을 지키려던 어느 선생님은 아이를 붙잡고 피하느라 머리가 아스팔트에 뭉개지듯 부딪쳤다. 차에 가슴을 정통으로 받힌 교사는 숨을 가쁘게 쉬며 답답함을 눈물로 호소했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작은 몸이 자동차 바퀴에 눌린 아이들이 있었다. 등부분이 타이어 자국처럼 파였다. 주임교사는 소리를 질러 주변 사람들을 모았다. 앞바퀴에 깔린 아이들을 구출해야 했다. 장정 너뎃명이 모인 덕에 위급한 아이들은 신속히 병원으로 후송됐다.


  아비귀환을 뒤로하고, 친구를 보러 왔다던 80대 노인은 유유히 운전석에서 내렸다. 경찰과 구급차가 연거푸 도착하자, 그는 ‘급발진’이라고 목소릴 높였다. 반성하는 기색은 없었다.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평화롭던 삶은 늪 같은 실의에 빠졌다.


  정부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관리하지 못했다며 주임교사를 벌하려 조사를 했다. 여론은 덩달아 주임교사의 부실한 안전관리를 지적하고 나섰다. ‘사고당할만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우연히 발생한다. 우연을 줄일 수 있는 건 역시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밖에 없다.


  허나,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전에도 가해자는 여러 번 교통사고를 냈고 그때마다 급발진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고들을 언론들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만약, 노인이 운전한 차가 아니라 음주운전을 했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여론이었을까?


  부주의했거나 휴대폰을 했거나 졸음을 했거나 음주운전을 했거나 치명적인 사고의 결과는 같다. 그리고 그 과실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다. 설령 펜스나 안전설비를 제대로 갖추었다고 한들, 작정하고 달려드는 차를 막을 방도는 없다. 그래도 가해자 편을 들 수 있을까? 답은 명백하다.


  한 가정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일이 있다.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의도치 않게 벌어졌을 때,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선의의 피해자들을 양산해왔는지 모른다. ‘내 일이 아니면 되겠지’하며 안일했던 나에게 불행이 노크했다. 생각없이 문을 열어준 게 화근이었다. 문 앞에서 불친절했어야 했다. 다행인 건, 신이 허락하신, 서로를 위로할 가족이 있다는 단 한 가지 사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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