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낭만인가 , 피의 그림자인가
2007년 한 국제 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혁명가 중 한 명으로 체 게바라가 꼽혔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벽화와 깃발, 그리고 전 세계 젊은이들의 티셔츠 위에 인쇄되어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거칠게 흐트러진 머리칼, 붉은 별이 박힌 베레모, 불굴의 눈빛. 체 게바라는 단순한 한 인간을 넘어, 저항과 낭만의 아이콘으로 신화화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그 이미지 뒤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혁명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반대파를 재판 없이 처형했고, 쿠바 혁명 후에도 ‘혁명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체 게바라는 의사 출신이었지만 생명을 살리는 대신, 때로는 차갑게 생명을 거두는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총을 들고 싸운 영웅인가, 아니면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피를 정당화한 악당인가.
체 게바라. 그는 분명 한 시대를 뒤흔든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혁명이라는 이름이 품은 두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했지만 여전히 상류층 의식을 지닌 중산층 가문이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건축업에 종사했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았고,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인 성향의 여성이었다. 체는 이 부모로부터 모험심과 반항심을 함께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를 지배한 것은 천식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된 발작은 평생을 따라다녔고, 가족은 보다 건조한 기후를 찾아 코르도바 지방의 알타 그라시아로 이주해야 했다.
(알타 그라시아의 유년기 주택이 ‘체 게바라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당시 사진·소지품·서신 등이 전시중이다)
어린 체는 요양과 발작 속에서 자라났지만, 병약함은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발작으로 밤새 숨을 몰아쉰 다음 날에도 그는 축구와 럭비 경기장에 나가 몸을 던졌다. 당시를 기억한 아버지는 아들이 “설령 죽더라도 럭비를 하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병약함을 강철 같은 의지로 억누르려 한 이 경험은 훗날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두려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기질로 이어졌다.
체스 역시 어린 시절 중요한 동반자였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그는 여섯 살 무렵부터 대국을 즐겼고, 열두 살이 되자 지역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 누워 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체스판을 통해 전략적 사고와 인내심을 익혔다.
어머니 셀리아는 지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여성이었고, 체는 그녀의 영향 아래에서 다양한 책을 접했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부터 마르크스의 저작까지 폭넓게 읽으며 사유의 폭을 넓혔다. 특히 문학과 철학,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후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끊이지 않았다. 또한 십대 시절에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며, 단순히 병약한 소년이 아니라 사회 문제에 문제의식을 품은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이렇듯 어린 체 게바라는 병과 싸우면서도 체스, 스포츠, 독서와 토론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의 집요함과 호기심, 그리고 사회를 향한 초기 문제의식은 훗날 혁명가로서의 길을 선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체 게바라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청년기를 시작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이어갔다. 당시 아르헨티나와 남미 전역은 빈부 격차가 심했고, 농촌과 도시 간 삶의 차이는 극단적이었다. 체는 이런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단순한 학문적 지식 이상의 문제의식을 키워나갔다.
대학 시절 그는 동료들과 토론 모임과 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의료 지식과 사회 문제를 연결하는 시각을 넓혔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혁명가적 성향과 맞닿는다.
1951년, 체 게바라는 대학을 잠시 휴학하고 남미 여행에 나섰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콜롬비아 등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생활과 빈곤, 사회적 억압을 직접 관찰했다. 안데스 산맥을 넘고 아마존 강을 지나며 마주친 극한 환경과 인간의 삶은 그의 시야를 크게 확장했다. 이 여정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경험을 세세히 기록하며, 만난 사람들의 삶과 사회 구조를 노트에 담았다.
이 오토바이 여행은 나중에 **《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orcycle Diaries, 2004)**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과 사회적 깨달음을 대중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영화는 여행 속 체의 관찰, 빈곤과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동료와의 경험을 중심으로 재현했으며, 실제로 그가 남긴 여행기록과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 여행에서 체는 단순히 의사로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사회 구조와 불평등에 대한 이해를 쌓았다. 의료 경험과 현장 관찰을 결합하며, 이후 쿠바 혁명 등 실제 행동으로 옮길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남미 전역을 여행하며 기록한 경험은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으며, 영화와 기록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체 게바라는 의대 시절과 남미 여행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 구조의 문제를 몸으로 체험했다. 원래 그는 아르헨티나 내전과 독재 정권 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을 목격하며, 단순한 의료 지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남미 여행은 당초 베네수엘라 구아나도를 목표로 계획되었으나, 그는 볼리비아로 방향을 바꾸어 혁명이 진행 중인 현장을 목격했다. 볼리비아에서는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인디오가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직접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거쳐 과테말라에 도착한다.
과테말라에서는 의사로 활동하며, 페루에서 추방된 여성 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사상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녀와의 만남은 체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급속히 각인시켰다. 1950년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시대 이후 지속된 사회적 착취와 독재를 개혁하고, 마야계 인디오를 포함한 소작농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체는 이를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압력과 CIA가 지원한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는 전복되었고, 민주적 개혁은 좌절됐다. 이 사건은 체가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지하게 지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전복 후, 아르마스 정권은 게바라에게 암살령을 내렸다. 체는 아내 가데아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그는 멕시코에서 반 바티스타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당시 카스트로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무장 게릴라 투쟁을 준비 중이었다. 체는 하룻밤 사이에 투쟁 참여를 결심했고, 스페인 내전 공화파 생존자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게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으며 쿠바 상륙 준비를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체 게바라는 단순한 의사에서 정치적·군사적 지도자로 변모한다. 남미 여행과 과테말라에서의 경험, 멕시코 망명과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그를 혁명이라는 길로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체 게바라는 아내 일다 가데아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둔 채, 쿠바 혁명을 위해 혼자 출발했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혁명군은 8인승 레저 보트 그란마(Desembarco)를 타고 쿠바 해안에 상륙했다. 인원 과다로 위생 상태가 열악했고, 폭풍 속 항해로 모두 지쳐 있었으며, 상륙 계획이 사전에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혁명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았다. 결국 82명 중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등 12명만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몸을 피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상륙 후, 혁명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피델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혁명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 체가 이끄는 제2군은 쿠바 제2의 도시 산타클라라를 점령하며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 많은 시민들의 합류와 협력으로 정부군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지도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1월 8일, 피델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며 쿠바 혁명이 완성되었다.
쿠바 혁명 승리 이후, 체 게바라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혁명 정부의 핵심 권력자로 자리잡았다. 그는 산업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겸하며 쿠바 경제와 산업 정책의 전반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농업과 토지개혁, 국유화 정책, 산업 현대화 등 혁명 이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강력한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그는 사회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체는 문맹 퇴치 운동과 국가 보건·의료 체계 개혁을 추진하며, 쿠바 사회의 기초적 생활 수준과 교육, 의료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특히 농촌 지역과 소작농 중심으로 진행된 문맹 퇴치 정책은 쿠바 혁명 성과의 상징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권력자로서 체의 결정은 언제나 논란을 동반했다. 그는 사형 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혹은 반혁명 세력 약 14,000명을 처형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행동은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되었지만, 동시에 냉혹함과 독재적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그는 반혁명 세력 처형과 노동력 강제 동원을 단행하며, 혁명 유지와 정책 실행을 위해 강압적 수단을 사용했다. 특히 사형 집행과 정치적 통제는 평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경제 정책에서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산업 현대화와 국유화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과 실패는 체에게 정치적 책임을 집중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의 권력 행사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결국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열정과 강력한 추진력, 동시에 냉혹함과 강압적 수단을 모두 지닌 지도자로 평가된다. 혁명적 영웅으로서의 면모와 권력자로서의 독재적 면모가 공존하는 인물, 바로 체 게바라였다.
쿠바 혁명 승리 후 수많은 일들을 이루었음에도, 체 게바라는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미 쿠바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확보했음에도, 체는 자신의 이상을 국제 혁명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그는 남미로 향해 볼리비아에서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주민들의 협조 부족, 언어와 문화의 장벽, 그리고 CIA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의 추적으로 체와 그의 동료들은 점점 고립되었다. 게릴라 활동 중 체는 부상과 피로 속에서도 조직을 재정비하며 혁명 목표를 이어갔지만, 결국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지원한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체 게바라는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체의 시체는 볼리비아 정부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이는 그를 하찮은 존재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모습은 예수와 비교되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그의 시신은 30년 만에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에서 발굴되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는 사후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키며, 현대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혁명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의사로서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전 아메리카를 무대로 혁명에 뛰어들었다. 쿠바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올라갔음에도, 체는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이러한 숭고한 헌신과 이상을 향한 집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다.
반면, 그의 활동은 논란의 여지도 많았다.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진행된 혁명 과정에서 반혁명 세력뿐 아니라 일반 농민과 민중에게도 피해가 발생했고, 강압적 조치와 처형 등으로 인해 일부에서는 체를 비판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쿠바에서는 일부 시민이 그를 ‘아바나 백작’이라 부르며, 혁명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과도한 권력 행사를 꼬집기도 했다.
체 게바라는 살아서는 혁명가였고, 죽어서 전설이 되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숭고함과 잔혹함, 영웅과 논란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혁명과 인간의 이상, 권력과 책임이 충돌하는 역사적 장면이었고, 죽음 이후에도 전 세계에 영감을 주며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체 게바라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품은 존재로 남아, 우리가 인간과 이상, 그리고 혁명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인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