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X ( Malcolm X )

흑인 해방의 불꽃

by Minor Bloom

말콤 X

20세기 미국은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불렸지만, 그 이면에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존재했다. 버스 좌석 하나, 식당 입구 하나에도 흑인과 백인을 갈라놓는 법과 관습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그 억압의 공기 속에서 말콤 X는 등장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비폭력과 평화를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무력으로라도 흑인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흑인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고, 백인 중심의 사회에 정면으로 맞섰던 그는 동시에 급진적이고 분열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5년 2월, 뉴욕 할렘의 한 강연장에서 총탄에 쓰러진 그의 생애는 불과 39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흑인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외침은 이후 수많은 운동가와 예술가, 그리고 오늘날 ‘Black Lives Matter’ 운동에까지 이어지며 여전히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어린 시절

말콤은 1925년 5월 19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말콤 리틀(Malcolm Little). 그의 아버지 얼 리틀은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이자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를 지지한 인물로, 흑인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비의 사상을 적극 전파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곧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의 표적이 되었고, 리틀 가정은 지속적인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다. 실제로 말콤이 태어나기 전부터 가족은 쿠 클럭스 클랜의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녀야 했으며, 결국 1931년 아버지는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경찰은 전차에 치인 사고사로 발표했지만, 가족과 지역 흑인 사회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어머니 루이즈는 혼자서 여덟 명의 자녀를 부양해야 했지만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다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져 위탁 가정에 맡겨졌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적 죽음, 어머니의 정신적 붕괴, 극심한 빈곤을 경험한 말콤은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깊게 품게 되었다.


그럼에도 말콤은 보호시설에서 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재능을 보였다. 반의 수석이자 반장이 될 정도로 우수했으며, 뛰어난 머리와 성실함으로 교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담임 교사는 “현실적으로 생각하거라. 목수가 되는 게 어떠니?”라고 답했다. 당시 진로상담을 받은 백인 학생들에게는 “꿈은 더 크게 가져라”고 조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말콤은 이때 세상이 흑인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아무리 뛰어나도 흑인은 한계에 갇혀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훗날 그는 “그때 교사가 나를 격려해줬다면, 나는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당시 교사의 말은 단순한 무시가 아니라, 극심한 인종차별과 사회적 제약 속에서 그를 보호하고자 한 현실적 배려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흑인들에게 허용된 직업은 요리사, 목수, 청소부, 벨보이, 카센터 및 3D업종 정도였고 아주 운이 좋아야 가수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운동선수도 당시에는 흑인경기와 백인경기가 따로 개최되었을 정도로 차별받았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을 갖고 싶어도 학교에서 흑인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포기해야 했다. 설사 힘들게 의사나 변호사 직업을 갖거나 가수나 운동선수로 성공해도 병원과 로펌은 흑인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가수와 운동선수로 성공한 흑인도 호텔이나 식당, 병원, 공공기관에는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뒷문으로 출입하는 것도 힘들었으며 심지어 미국 정부가 대놓고 성공한 유색인종 출신들에게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감옥에 수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당시의 시대상을 봤을 때 그 교사의 말은 그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배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했던 대로 가장 인간적인 교사였던 셈이다.

어쨌든 이 말이 큰 상처가 되었는지 뒷날 그는 "그때 선생이 격려해줬으면, 난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을 텐데"라고 회상했다. 다만 그가 성공한 변호사가 되지 않은 대신 흑인 인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죽어서도 역사를 움직이고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말 한마디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말콤 X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폭력과 차별, 가난과 상실, 그리고 방황과 저항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흑인 민족주의와 급진적 인권운동의 길을 걷게 된 토대가 되었다.



방황과 수감, 그리고 이슬람 귀의

청소년기를 지나며 방황하던 말콤은 보스턴, 뉴욕, 미시간 등지를 전전하며 구두닦이, 철도 회사 직원, 잡상인 등 다양한 임시직을 전전했다. 그러나 생계와 좌절 속에서 그는 점점 범죄의 길로 들어섰다. 도박, 마약 거래, 매춘 알선 등 거리의 범죄 세계에 발을 들이며 ‘디트로이트 레드(Detroit Red)’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병무청은 청년들을 징집했다. 말콤 역시 징병 검사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면접관 앞에서 “전쟁터에 나가면 먼저 백인을 겨냥할 것”이라며 분노를 드러냈다. 이 발언으로 그는 ‘정신적으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이는 그가 흑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분노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훗날 급진적 인권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1945년 후반, 말콤은 몇몇 동료와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가 부유한 백인 여성들의 집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였다. 1946년 1월 12일 보석점에서 시계를 훔치다 체포되었고, 1월 16일 절도, 불법 침입, 기물 파손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월 27일 찰스타운 스테이트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탓에 교도소 내에서 “사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교도소는 말콤에게 인생을 바꿀 전환점이 되었다. 독학으로 공부하던 존 엘턴 벰브리(“벰비”)와 만나 감화를 받았고,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탐독하며 지적 성장을 이뤘다. 벰브리는 교도소 안에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말콤은 처음으로 진정한 존경심을 느낀 사람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벰브리의 지도 아래, 그는 자기주도 학습을 시작했고, 교도소의 전등이 꺼진 후에도 책을 읽으며 지식을 넓혔다.


1948년, 형 필버트의 소개로 말콤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접하게 되었다. 필버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 그의 아버지 얼 리틀이 활동했던 만국 흑인 진보 연합과 마찬가지로 흑인의 자기 신뢰와 아프리카 이산민 해방을 목표로 활동한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맬컴이 가입할 생각이 없었으나, 다른 형 레지날드가 담배와 돼지고기를 끊으라는 조언을 주면서 생활습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같은 해 2월, 말콤은 누이의 청원으로 매사추세츠주의 노포크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곳에는 풍부한 도서관이 있었고, 그는 이 기회를 통해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이슬람 신앙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다. 1948년 하반기,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지도자 일라이저 무하마드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운 삶을 시작할 방법을 문의했다. 무하마드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라에게 간절히 기도하라고 조언했고, 말콤은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과거의 범죄와 단절하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 신자로 거듭났다.


1952년 8월 7일, 말콤은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출소 후 그는 수감 생활을 돌아보며 “책을 읽고, 가족과 면회를 하고, 무하마드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감옥에서의 자기수련과 네이션 오브 이슬람 귀의 경험은 이후 말콤이 흑인 민족주의와 급진적 인권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지도자로서의 부상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말콤은 자신의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는 가족의 성인 ‘리틀’을 버리고, 자신의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조상의 성을 상징하는 ‘X’를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였다. 1950년 12월, 형 필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 진짜 선조인 아프리카 조상의 성을 알 수 없기에 미지를 뜻하는 X를 내 성으로 삼는다. 선조를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의 성일 뿐인 리틀을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그는 말콤 X로 새롭게 태어났다.


출소 직후,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수장 일라이저 무하마드를 찾아가 교리와 지도 방침을 배웠고, 1953년 6월 디트로이트 제1사원에 성직자로 등록하며 전업 성직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보스턴 제11사원과 필라델피아 제12사원을 열었고, 뉴욕 할렘의 제7사원 지도자로 임명되며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그의 지도 아래 제7사원의 신도는 급속히 증가하였고,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하트포드, 애틀랜타 등지에도 새로운 사원이 설립되면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출소 직후부터 말콤 X는 뛰어난 연설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많은 흑인 청중을 사로잡았다. 191cm의 키와 81kg의 풍채, 힘 있고 명료한 설교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는 “활력 있는 몸매와 매료될 수밖에 없는 미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메시지는 흑인들의 자긍심 회복과 자기결정권 강조, 사회 구조적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50년, 그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한국 전쟁에 반대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그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대해 감시와 조사를 진행했으며, 조직이 과격 단체와 연계되어 있는지 의심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 압박에도 불구하고, 말콤 X는 조직의 성장과 흑인 사회의 각성 운동에 집중하며 민권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말콤 X를 전국적으로 주목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1957년 존슨 힌튼 사건이었다. 존슨 힌튼이라는 흑인 청년이 백인 경찰에 의해 부당하게 체포·폭행을 당하자, 맬컴 X는 즉각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경찰과 권력 구조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그는 열정적인 연설과 강력한 행동으로 지역 사회의 지지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자신의 활동이 전국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말콤 X의 출소 이후 활동은 단순한 종교적 귀의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도소 시절의 독학과 자기 수련을 바탕으로 신도들을 교육하고, 전국적 조직을 확장하며, 미국 내 흑인 공동체의 자존심과 연대감을 강화하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의 활동은 이후 흑인 해방 운동과 민권 운동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를 혁신적 지도자이자 상징적 인물로 기억하게 만든 기반이 되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와 세계관의 변화

1963년, 말콤 X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내에서의 영향력과 활동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내부 갈등과 지도자 일라이저 무하마드와의 이견으로 점차 불화가 심화되었다. 그는 무하마드가 보여준 과도한 권위주의와 일부 신도들의 배타적 태도, 그리고 조직 내 여성 차별 문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또한, 무하마드가 정치적 현실과 외부 세력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회피한다는 점에도 불만을 품었다.


1964년 3월, 말콤 X는 공식적으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하고, 이후 그의 활동은 종교적 울타리를 벗어나 인종과 민족을 넘어선 국제적 정의와 인권 문제로 확장되었다. 그는 ‘오마의 X’ 시절부터 이어온 흑인 민족주의를 한층 더 폭넓게 재해석하며, 모든 인종과 국가 간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 4월, 말콤 X는 메카 순례(Hajj)를 다녀오며 이슬람 세계와 다양한 인종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은 그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는 백인 전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흑인과 백인을 철저히 구분하였으나, 메카에서 만난 다양한 민족의 이슬람 신자들을 통해 인류 공동체의 가능성과 인종 간 화합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귀국 후 강연에서 더 이상 백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인종과 국적을 넘어 평등과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 시기를 계기로, 말콤 X는 국제적 시각의 흑인 권리 운동가로 변모했다. 그는 미국 내 흑인의 권익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카리브 지역 등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지배와 인종 억압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미국 내 흑인 사회에서도 폭력적 저항보다는 교육, 경제 자립, 정치 참여를 통한 변화를 강조하며 지도자로서의 성숙을 보여주었다.


말콤 X의 세계관 변화와 탈퇴는 단순한 조직 이탈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과 민족주의를 넘어 인류적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그의 성숙한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이후 남은 생애 동안 세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하고, 국제 연대와 평화적 흑인 권리 운동의 필요성을 널리 알렸다.



비극적 최후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에서 열린 연설 도중 말콤 X는 관중 속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으며, 암살 사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내부 갈등과 외부 적대 세력의 연루 가능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혹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말콤 X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후, 종교적 울타리를 벗어나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인권과 정의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미국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지만 동시에 많은 적을 만들었다. 암살은 단순한 범죄 사건이 아니라, 미국 내 인종 문제와 사회적 긴장이 격화된 상황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말콤 X의 죽음은 흑인 사회와 미국 전체에 깊은 충격을 남겼다. 그의 사망 이후, 그가 평생 전파한 흑인 민족주의와 인권 운동, 국제적 정의를 위한 목소리는 더욱 크게 회자되었으며, 그의 삶과 죽음은 지금까지도 흑인 인권 운동과 사회 정의 논쟁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남아 있다.



말콤 X

말콤 X는 단순히 영웅이나 악당으로 규정될 수 없는 복합적 인물이다.

그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추구한 비폭력적 흑인 인권 운동과 달리, 초기에는 급진적 민족주의와 자력 구제, 때로는 폭력적 저항까지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분열을 조장하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고, 반대로 억압받는 흑인들에게 현실적 각성을 불러일으킨 영웅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그는 억압받는 흑인 사회에 자존심과 목소리를 불어넣고, 구조적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세상에 드러낸 점에서 역사적 영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초기의 배타적 사상과 폭력적 발언, 일부 백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한 극단적 태도는 많은 논란을 불러왔고, 분열의 상징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면서, 말콤 X는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인권과 평등을 강조했다. 메카 순례 이후 그는 백인을 단일한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함께 협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를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닌, 국제적 인권 운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말콤 X의 사상은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 등 현대 인권 운동과도 연결된다. 그의 초기 급진주의와 변화 이후의 포괄적 관점은, 인종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오늘날 활동가들에게 여전히 영감을 제공한다. 말콤 X는 그야말로 영웅이자 경고, 그리고 시대와 사회의 거울로 남아, 흑인 인권과 인류 정의의 논쟁에서 끝없이 회자되는 인물이다.


결국 말콤 X의 삶은 한 인간의 평가를 넘어선다. 그는 시대적 모순 속에서 분노와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흑인 민권 운동과 현대 사회 정의 논쟁에서 지금까지도 논란과 존경을 함께 받는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평등을 향한 싸움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말콤 X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영웅과 악당,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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