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일한 남자
영정(嬴政)
기원전 3세기, 중국은 전국시대라 불리는 격동의 시기였다. 진, 초, 제, 한, 위, 조, 연, 7개의 강력한 나라들이 서로를 정복하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벌였고, 정치적 음모와 배신이 일상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남고, 나라를 통일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혼돈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영정, 후에 진시황이라 불리게 될 사람이다. 그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었다. 치열한 전쟁 속에서 적을 무너뜨리고, 법과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며, 중앙집권 국가를 세운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의 통치 방식은 잔혹하고 냉혹했다. 반대파를 가차 없이 제거하고, 무수한 백성들을 동원해 장대한 건축과 군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진시황은 중국의 통일자이자, 동시에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 야망, 그리고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한 인물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개척했는지를 보여주는 연대기다.
어린시절
진시황, 후에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되는 그는 진나라가 아닌 조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진나라에서 볼모로 보내진 안국군의 아들 공자 이인(異人, 훗날 장양왕 자초)이고, 어머니는 조희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논쟁이 있다. 조희는 이인을 만나기 전,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첩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부 학자들은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면,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마천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불위는 한단 땅의 매우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초(장양왕)는 여불위와 술을 마시던 중 그녀를 보고 반하여 장수를 기원하며 그녀를 청했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이미 자초(장양왕)를 위해 집안이 무너져도 진귀함을 잡으려는 생각을 품고, 마침내 첩을 자초(장양왕)에게 바쳤다. 그녀는 스스로 임신을 숨긴 채 대기(만삭)까지 지내고, 그 후 아들 정(政)을 낳았다.
조나라에서 태어난 정(政)-시황제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위기에 처한다. 진나라 소양왕이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자초(장양왕)일가를 죽이려 했지만, 여불위의 도움으로 자초(장양왕)는 진나라로 탈출하고,정(政)-시황제와 조희는 여불위의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간접적, 조희 집안의 직접 보호 아래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여불위는 진나라에 온 자초(장양왕)을 자금과 세력을 바탕으로 태자 자리를 차지하도록 돕고,
후속 권력 투쟁에서 장양왕이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양왕 즉위 40년에 태자가 죽게 되고, 20년 후 안국군이 태자로 새로이 책봉되었으며
이 무렵 조나라는 조희와 정(政)-시황제를 진나라로 보내준다.
소양왕이 즉위 56년(기원전 251년) 75세의 일기로 마침내 사망하였고, 안국군이 태자 책봉후 14년이 지난 52세가 되어서야 효문왕에 즉위하게 되며, 장양왕(자초)는 태자가 된다.
그러나, 효문왕은 1년상을 치른지 3일만에 사망하고 만다.
이에 태자 자초(장양왕)가 왕위를 이어받아 장양왕이 되었으며 정(政)-시황제는 태자가 된다.
3년 뒤에 아버지 자초(장양왕)마저 사망하게 되며, 태자 정은 13세의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왕위 계승과 초기 권력 투쟁
13세의 나이로 진나라 왕위에 오른 정(政, 후의 진시황).
그의 즉위는 단순한 세습이 아니라, 어머니 조태후(조희)와 여불위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상 '어머니 조태후와 재상 여불위가 진시황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정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즉위 초반 모든 국사는 여불위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진나라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정의 동생 장안군 성교가 둔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시왕 9년 음력 4월에는 장신후 노애가 진왕 정의 관례를 틈타 자신의 사병과 융적 부족, 심지어 진왕의 옥새와 조태후의 인장을 도용해 기년궁을 공격했다.
하지만 상국 창평군과 창문군이 반격해 함양에서 전투를 벌였고, 진왕 영정의 군대가 승리했다. 노애와 반란군은 도망치다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노애가 조태후와 불륜으로 낳은 두 아들도 처형되었다. 또한 노애의 측근 4,000명은 촉지역 방릉으로 추방되었다.
사마천 기록과 일부 설화에 따르면, 조태후와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태후가 여불위와 불륜관계였고 여불위는 진왕 정이 성장해가며 두려움을 느끼자, 조태후에게 노애를 소개했다. 노애는 환관으로 위장해 조태후와 불륜관계를 이어가며 아이까지 생기자, 그 아이를 진왕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결국 진시황은 본격적인 숙청을 시작한다. 어머니 조태후는 1년간 옹땅으로 유배, 여불위는 시황 10년에 면직되고, 시황 12년 여불위는 사망한다. 진시황은 여불위를 조용히 매장하고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추방했다. 일부 기록에는, 진시황이 여불위를 모욕하는 편지를 보내 촉으로 추방할 것을 지시하자 여불위가 두려움과 분노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사건은 어린 진시황에게 권력의 냉혹함과 숙청의 논리를 체험하게 했고, 또한 그의 초기 국정 운영이 여불위와 조태후의 영향 아래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어릴 때부터 모든 정치적 계산과 권력 운영의 방식을 체득하며 성장했고, 이후 철저한 중앙집권과 무자비한 통치 성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통일
상방 여불위까지 제거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정은 비로소 진나라의 절대 군주로 떠올랐다. 실추되었던 왕권은 되찾았고, 그 옆에는 평생을 함께할 책사 이사가 있었다. 이제 정은 선대 소양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마침내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한 무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모사 울요의 조언에 따라 여섯 나라 대신들을 매수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이간책을 먼저 펼쳤다. 이는 의외로 강력했다. 조나라의 명장 이목은 결국 간신 곽개의 모함으로 처형되었고, 여섯 나라는 서로를 믿지 못해 손을 잡지 못했다. 정은 그렇게 전쟁의 무대를 철저히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삼진(三晉)의 멸망
첫 목표는 진나라와 맞닿아 있던 삼진(韓·魏·趙).
기원전 230년, 한나라는 단숨에 멸망했다. 이어 기원전 228년, 장수 왕전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며 조나라 역시 무너졌다. 기원전 225년에는 왕전의 아들 왕분이 위나라를 수공으로 몰아넣어 대량을 함락시켰고, 위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초나라와의 결전
문제는 강대한 초나라였다. 젊은 장수 이신이 20만 대군으로 공격했으나, 초의 명장 항연에게 참패를 당했다. 정은 전략을 바꿔 노장 왕전을 다시 불러들였다. 왕전은 무려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재공격했고, 마침내 기원전 223년, 거대한 초나라조차 무릎을 꿇었다. 궁지에 몰린 항연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막을 내렸다.
연나라와 암살자 형가
연나라는 달랐다. 사신 형가를 진나라 함양으로 보내 신하되기를 자처하며 그 증표로 진나라에서 연나라로 망명했던 번오기의 목과 독항 지역의 지도를 바친다. 이에 진왕 영정은 함양궁에서 형가의 사절단을 맞이하였는데 사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의 사주를 받은 자객으로 그자리에서 지도속에 숨겨둔 칼로 영정을 공격하나 간신히 반격한다. 연나라 태조 단은 영정이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는데 진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했던것이다. 함양궁에서 펼쳐진 피비린내 나는 암살극. 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그 분노는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연나라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기원전 222년 결국 멸망했다. 태자 단은 목이 잘려 아버지에게 바쳐졌고, 그조차 정을 막진 못했다.
마지막 제나라
기원전 221년, 마지막 남은 제나라 왕 전건은 사실상 싸워볼 의지도 없었다. 진나라의 위세에 눌린 그는 항복을 선택했고, 이로써 천하는 진의 품 안에 들어왔다. 진왕 정, 불과 마흔의 나이에 중국 대륙을 단일한 제국으로 묶어낸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는 위(衛)나라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정은 의도적으로 멸망시키지 않고 ‘야왕(野王)’이라는 작은 지역으로 옮겨버렸다. 진시황 사후, 2대 황제 호해가 마지막 위나라 군주를 서민으로 강등시키며 비로소 위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북방의 위협과 만리장성
천하를 통일했으나 북쪽에는 또 다른 위협이 있었다. 흉노였다. 척박한 땅에 살던 그들은 추수철이면 기습적으로 남하해 약탈을 일삼았다. 정은 그들을 막기 위해 각지의 성곽을 이어 붙였고, 훗날 ‘만리장성’이라 불릴 거대한 방어선이 형성되었다. 그 흔적은 오늘날 시안 북쪽, 오르도스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시황의 통일 전쟁은 불과 10여 년 만에 끝났지만, 그 과정은 피와 배신, 그리고 냉혹한 계산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제국은 이후 중국사의 기본 틀을 마련했고, 무엇보다 “통일된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상을 현실로 만든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
통일은 했지만
진시황의 승리는 피비린내 나는 잔혹함과 함께했다.
항연 자결, 연나라 태자 단의 처형, 삼진·위나라 포로 처형 등, 승리의 증표로 수급(首級)을 요구했다.
《사기》에 따르면, 일부 전쟁에서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정치와 통치
진시황은 단순한 국왕의 칭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위상과 권위를 원했고, 이에 따라 승상 이사와 왕관 등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 칭호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도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 천황(天皇), 지황(地皇) 중 어느 것을 쓸지 고심했다. 결국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만들고, 자신은 최초의 황제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황제 체제가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며, 황제 제도를 영구히 정착시키고자 했다.
시황제는 통일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군현제를 실시했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행정을 담당하는 수(守), 군사 지휘관인 위(尉), 감찰관인 감(監)을 두어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지방 저항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강제 이주시켜 산업과 감시 체제를 동시에 갖추도록 했다.
그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시황제는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기보다는 법과 결재를 스스로 처리하며,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상소의 무게는 하루 1석(약 30kg)으로 측정될 정도였으며, 그의 손을 거쳐야만 모든 국사가 결정되었다.
제국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시황제는 도량형·화폐·문자를 통일하고, 전국 도로를 정비해 물류와 군사 이동을 강화했다. 화폐 정책도 단일화하여 진나라의 반량전만 사용하게 했으나, 구리 부족으로 화폐 가치가 급등하기도 했다.
군사적 확장과 국경 관리도 철저했다. 남쪽에는 4개 군을 신설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북쪽의 흉노족 위협에는 대장군 몽염을 보내 북방을 정벌하고 내몽고 일부를 진나라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처럼 시황제는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통해 권위를 확립하고, 철저한 중앙집권과 통일 정책, 효율적 행정을 통해 최초의 통일 중국을 완성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며, 반대파는 철저히 제거되었고, 국민들의 삶은 종종 희생되었다
그는 통치의 효율과 질서를 위해 무자비함을 선택했으며, 이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립했다.
폭정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시황제는 46세의 절정기에 거대한 연회를 열었다. 연회 도중 박사 순우월과 봉건제 부활을 주장한 복야 주청신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순우월이 봉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자,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 역사·의술·농경 관련 책을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라 명했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분서(焚書)다.
다음 해,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불로장생의 약을 구해오라 명했으나, 학자들은 도리어 그를 비판하고 도망쳤다. 이에 시황제는 조정 내 학자 460여 명을 잡아 생매장했고, 이를 갱유(坑儒)라 한다. 분서와 갱유를 합쳐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부른다.
황태자 부소가 이를 간언했으나,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유배당하고 말았다.
시황제는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상앙의 십오연좌법과 달리,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상가와 책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절대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토목공사
시황제는 국가 방위를 위해 만리장성 건설을 명했다. 북방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몽염 대장군에게 임도에서 요동까지 성을 쌓게 했으며, 150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건설하고, 자신의 능묘를 여산 전체에 조성하도록 70만 명을 동원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는 국가 재정을 압박했으며, 전국 남성의 절반 이상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시황제의 폭정과 토목사업은 단순한 권력 과시를 넘어, 황제의 권위와 제국 통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불로장생과 시황제의 최후
어느 날 시황제는 낭아산을 행차하다가 그 풍경에 매료되어 약 3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러던 중,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오늘날에는 이를 신기루로 추정하고 있다.
시황제는 이 섬을 봉래산으로 믿고, 불로불사의 약을 구하기 위해 방사 서복을 파견했다. 서복이 탄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렸으나,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황제의 불로불사에 대한 집착은 점점 강해졌다. 각지에서 수상쩍은 방사들이 나타나 “이곳에서 약을 구할 수 있다”거나 “내가 기도를 올리겠다”며 시황제를 현혹했고, 시황제는 효험이 없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시황제가 불로불사라 믿고 복용한 약은 대부분 수은이었고, 결국 자신의 건강을 갉아먹는 결과를 낳았다. 시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며 살아가다가,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진시황은 단순히 정치적 통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리장성을 축조하며 국경을 방어하고, 불로장생을 추구하며 자신을 신격화했다. 수많은 백성들이 혹독한 노동과 희생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영원한 권력과 불멸의 왕국이 보였다. 이 집착은 그를 위대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공포와 존경이 동시에 뒤섞인 지도자, 그것이 바로 진시황이었다.
죽음과 왕위 계승
기원전 210년, 시황제는 마지막 순행을 떠났다. 이번 순행에는 승상 이사, 중거부령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이자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가 평원진을 지나던 중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운석에 ‘始皇帝死而地分(시황제 사이지분)’,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이 악화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화가 난 시황제가 그 지역 주민을 몰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러 병세가 심각해지자, 조고에게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 유언의 내용은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되어,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시황제는 50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여산 지하궁전에 안장되었으며, 이 능묘는 1974년 발굴 중 군사 모형인 병용과 함께 발견되어 지금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시황제의 죽음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운반하면서 절인 생선을 함께 놓아 부패 냄새를 감추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언을 조작하여,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했다. 부소는 유언을 따른 채 자결했으나, 몽염은 의심을 품고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결국, 시황제의 26남 호해가 황제로 즉위하며 진 이세황제가 되었다. 본래 이세황제는 몽염을 살리려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 몽염과 그의 일가족을 반역 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하였다. 이렇게 시황제의 죽음과 권력 승계는 환관과 호해의 권력 다툼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진 제국의 후계 체제는 불안한 시작을 맞게 되었다.
진시황
진시황은 중국을 하나로 묶은 최초의 통일자였다. 서로 다른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사와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역사상 유례없는 중앙집권 국가를 세웠다. 그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운 거대한 비전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길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불로불사와 미신에 집착하며, 후계 구도를 혼란에 빠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의 권력과 영생을 향한 집착이, 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함과 자비를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진시황은 단순한 폭군이 아니다. 그는 한 시대를 바꾸고, 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었다. 영웅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그래서 더욱 드라마틱한 인물. 그의 삶은 우리가 권력과 인간, 역사와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하게 만드는 살아있는 기록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