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일본을 뒤흔든 혁신가인가, 피에 젖은 폭군인가

by Minor Bloom

세 명의 사나이, 그리고 한 명의 불꽃

16세기 일본. 중앙 권력은 무너졌고, 전국에는 수백 명의 영주들이 각자 성을 쌓고 전쟁을 벌였다.

이 시대를 ‘센고쿠(戰國) 시대’, 즉 전국시대라 부른다.

왕은 있었지만 힘이 없었고, 법은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칼이 곧 정의였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시절이었다.

이 피의 혼란 속에서, 세 명의 사나이가 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센고쿠를 가장 먼저 장악한 폭풍 같은 개혁자.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신을 불태우며, 철저히 현실과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뒤집으려 했다. 그러나 통일을 앞두고, 자신의 심복에게 배신당해 자결.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노부나가의 하인 출신.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만으로 발탁된 그는, 주군의 죽음 후 놀라운 정치력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무혈입성과 외교, 정략을 통해 일본 통일을 완성했지만, 말년에 조선 침략이라는 무리수를 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치밀한 인내와 계산의 제왕.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모두 섬기며 때를 기다린 그는, 결국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에도 시대(德川幕府)를 연다.

그의 정권은 260년간 지속, 일본 역사상 가장 길게 이어진 평화였다.


왜 오다 노부나가인가?

이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바꾸려 했고, 가장 과격하게 도전했으며,

가장 짧고 강렬하게 살다 간 인물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다.

그는 전쟁을 혁신했고, 신분제에 도전했으며, 종교와 권위를 불태우고

기술과 경제를 통해 근대 일본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잔혹했고, 무정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타인의 신념을 짓밟는 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잔혹한 폭군’, ‘신을 부정한 자’, ‘피의 혁명가’...


“나는 천하를 얻을 자, 천하를 다스릴 자, 천하를 정리할 자를 알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와리의 바보’라 불린 청년 -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1534년, 일본 오와리 지역의 영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명석함보다는 이상하고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검 대신 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니고, 전통 의례에서 깃발을 찢고 뛰어다니고,
상복을 입는 대신 흰 옷을 입고, 향을 집어 던지며 조롱했다.


이런 모습에 어른들은 그를 '오와리의 바보'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의 행동은 귀족 교육을 받은 또래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보면, 그 기행은 단순한 유년기의 방황이 아니었다.
그는 형식적 권위와 관습 자체에 의문을 던진 어린아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

하지만 왜?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그는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려 했다.
당시에는 ‘무례함’으로 보였던 그의 행동은, 사실 가면 뒤의 세상에 대한 탐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성장하며 점점 드러낸다.
바보가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읽는 자였음을.


새로운 시대를 꿈꾸다– 칼 위에 그린 청사진

오다 노부나가가 원한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가 꿈꾼 것은 완전히 새로운 나라,
즉 질서와 권위의 뿌리가 바뀐 사회였다.


당시 일본은 출신이 곧 운명을 결정하던 시대였다.
귀족 출신이 아니면 관직은커녕, 군에 들어서도 말단밖에 오를 수 없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 규칙을 과감히 부쉈다.

"능력으로 평가하는 사회"

그는 출신을 묻지 않았다.

상인이든, 천민이든, 승려 출신이든 능력만 있으면 등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하급 하인이었고,

노부나가는 그를 전국 통일의 후계자로 성장시켰다.

여러 문객과 기술자, 학자들도 신분에 관계없이 기용되었다.

이런 인사 제도는 일본에선 유례없는 파격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계급이 아닌 실력의 시대’를 선언한 것이다.


"경제와 시장을 정비하다"

노부나가는 전쟁만 하는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전국 각지의 도로를 정비하고, 상업을 보호하며, 시장 경제를 장려했다.

자유 상업구역(樂市樂座, 라쿠이치라쿠자) 제도를 도입해
길드의 독점권을 철폐하고,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통일된 도량형(치수와 무게)를 사용하게 해 상거래의 신뢰도와 효율성을 높였다.

이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봉건 질서 아래 억눌려 있던 경제를 해방시키는 혁신이었다.


"외세를 받아들이다 – 닫힌 섬을 여는 지도자"

노부나가는 외국 선교사와 상인을 적이 아닌 자원으로 보았다.
그는 유럽에서 들어온 조총, 망원경, 시계, 포도주, 심지어 크리스트교조차도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교사들에게 거점 허용, 외국 상인에게 무역의 문을 열어주었으며,
서양 기술과 지식을 일본의 전략 자산으로 흡수했다.

그는 일본의 외부 세계를 향한 ‘첫 창문’을 연 사람이었다.


"전쟁이 아니라, ‘질서의 재설계’ "

그의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었다.
종교를 억압하고, 귀족을 몰아내고, 시장을 개방하고, 기술을 수입하고…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향하는 곳은 새로운 정치 구조의 수립이었다.

그는 "통일된 질서 위에서 자유가 작동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단 하나의 정점에서,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는 세상을.

노부나가의 개혁은 피를 동반했지만,
그 피는 단순한 정복의 대가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초석이었다.


종교와 전쟁 – 불타는 혼간지

노부나가가 ‘악마’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간지 전투 때문이다.

노부나가의 통치 철학은 단순했다.

“권력을 가지려면, 신의 권위부터 걷어내야 한다.”


당시 일본의 불교계는 단순한 종교 조직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혼간지(本願寺)는 자신의 무장 승병,
그리고 ‘잇코잇키(一向一揆)’라 불리는 민중 봉기 세력을 거느린 거대한 정치·군사 복합 권력이었다.

노부나가는 이 상황을 종교의 탈을 쓴 국가의 도전이라 보았다.

“이건 믿음이 아니라 권력이다.”
그는 종교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노부나가는 1570년부터 1580년까지 10년에 걸쳐
사카의 혼간지를 포위하고, 지속적인 병참 압박과 공격을 감행했다.
이것이 일본 전국시대 최장기 전투인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다. 종교의 저항과, 그에 맞선 권력의 무차별적 탄압이었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지원하는 지역에 대해 무조건적인 토벌 명령을 내렸다.

혼간지 세력의 거점으로 알려진 사찰이나 마을은 불태워졌고,

노인, 어린이, 여성 구분 없이 무차별 살육이 자행되었다.

잇코잇키(일반 신자들로 구성된 무장 민중)의 저항이 강하면 강할수록, 보복은 더욱 잔혹해졌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세·나가시마(長島) 지역의 잇코잇키 진압전이 있다.
이곳에서 노부나가는 수천 명이 피신한 사찰과 요새를 불태웠고, 불길 속에서 타죽는

사람들을 ‘소탕’이라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잇코 신자들이 항복했을 때조차, 그는 전원 생매장하거나 목을 벤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전투 마지막 해인 1580년, 혼간지 본거지가 있던 오사카 이시야마는 완전히 포위된 채,

식량과 물이 모두 끊긴 상태가 되었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갔고,

사찰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철수해야 했다.

노부나가는 그 자리를 재에서 꺼낸 듯한 정치 도시로 다시 설계했으니,
오늘날 오사카성의 기반이 된 것이다.


혼간지 전투에서 드러난 노부나가는 그 어떤 ‘전략가’보다도,
‘권력에 굶주린 통치자’, 혹은 ‘신을 무너뜨린 독재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믿음이 필요하다면, 나를 믿어라.

이 세상의 신은 이제, 오다 노부나가다.”


불교계가 수백 년 간 쌓아온 신앙과 권위를, 그는 무력과 불로 불태워 없애버렸다.

민중의 신앙은 피로 무너졌고, 노부나가는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쌓기 시작했다.


나가시노 전투 – 칼의 시대를 끝내다

노부나가는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의 규칙을 바꾼 사람이었다.


1575년,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해 전국시대 최강의 기마군을 이끌던 다케다 가쓰요리와 맞선다.
바로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이 한 전투가 일본 전쟁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다.

다케다 가문은 그 이름만으로도 무서운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전국시대의 최강자로 불렸고,
기병 부대의 위력은 "말발굽이 들리는 순간 전쟁은 끝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노부나가는 그 최강의 기병을 '총'으로 멈추기 위한 설계를 시작한다.


노부나가는 조총을 단순히 '무기'가 아닌 '전략'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조총병 3,000명을 3열로 배치하고, 순차 사격(volley fire)을 지시했다.


1열이 사격 → 뒤로 물러나 재장전
2열이 전진해 사격 → 교대
3열이 이어서 발사


끊임없이 총알이 날아드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다케다 기병대는 달려드는 순간 총알 세례에 쓰러져갔다.


또, 노부나가는 조총병 앞에 목책을 촘촘히 설치했다.
말이 쉽게 돌파하지 못하게 막는 구조물이다.

기병대는 달려들 수 없었고, 속도를 잃은 상태에서 조총의 먹잇감이 되었다.
전통적 방식의 "칼과 말"은 노부나가의 설계 앞에서 무력했다.


전투가 있기 전날, 날씨는 비가 왔다.
보통 조총은 습기와 물에 약한 무기였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먼지를 잠재우되, 조총은 쓸 수 있을 정도의 비”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전장의 환경조차 하나의 변수로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다케다 군은 1만 명 이상 전사,기마대는 거의 전멸했다.
다케다 가문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급격히 몰락한다.

그리고 일본 전쟁 방식은 이 전투 이후부터 완전히 달라진다.

"무사의 전투"는 끝났다.

"총과 전략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승리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무사의 용맹”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사도의 종말, 그 시작을 알린 건 노부나가였고, 그 현장이 바로 나가시노였다.


혼노지의 불길 – 미스터리가 된 죽음

1582년 6월 21일.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다.
천하통일이 눈앞에 있었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느긋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날 새벽.
그를 따르던 장수 중 한 명,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정예 병력을 이끌고 혼노지를 급습했고, 노부나가는 결국 “적이 왔다!”는 말을 남긴 채, 자결한다.
불타는 절 안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가장 흔한 해석은 “미츠히데의 개인적 원한”이다.
노부나가는 평소에도 신하들을 거칠게 대했는데, 특히 미츠히데에겐 공공연히 모욕을 줬다는 기록이 있다.

가족에게 모욕을 줬다

땅을 뺏었다

전쟁의 실책을 모두 그에게 덮어씌웠다

이런 개인적 분노가 폭발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단순히 감정만으로 전국 통일 직전의 리더를 암살한다?
그건 너무 단순한 해석이란 반론도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음모"

노부나가의 후계 구도는 불안정했다. 그의 아들 노부타다는 정치적 기반이 약했고,
그 사이 빠르게 성장하던 인물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혼노지의 변 직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미츠히데를 제압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역할을 차지한다. 너무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히데요시는 배후였을 수 있다. 적어도 미츠히데가 움직일 거란 걸 알고 있었고, 기다린 거다.”


"천황과 조정의 개입?"

노부나가는 천황을 넘보는 듯한 언행을 했다.
황실 권위를 무시하고, “신이 아닌 인간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발언은 당시로선

신성모독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날, 교토 황궁과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이 벌어졌다는 점도 주목된다.

‘무언의 묵인’ 혹은 ‘정치적 제거’였다는 시선도 있다.


"그의 죽음은 자작극이다?"

일부 일본 대중문화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노부나가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죽음을 위장하고 어딘가로 숨어들어, 새로운 세상을 준비했다는 식의 음모론 + 전설이다.
지금은 거의 픽션으로 간주되지만, 그만큼 그의 죽음이 미완이었고, 의문을 남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했을까?

왜 그 시점이었을까?

왜 모든 것이 히데요시에게 유리하게 전개됐을까?


이 질문은 아직도 일본사 연구자들과 창작자들 사이에서 가장 매력적인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배신이라면, 너무 허무하다.
그의 삶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그가 그 시대에 너무 컸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노부나가는 죽음마저도 역사적, 철학적질문을 던지고 있다.


악당인가, 영웅인가

역사는 종종 단순한 이분법으로 인물을 판단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영웅’과 ‘폭군’.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를 두고는, 이 구분이 유난히 모호하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찰을 불태우고, 민중을 학살했으며, 권위와 전통을 거침없이 짓밟았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했고,
그 어떤 이상주의자보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의 ‘균열’ 속에서 태어났다

센고쿠 시대는 말 그대로 모든 규칙이 무너진 시기였다.
왕이 실권을 잃고, 무사들이 서로를 배신하고,
신앙이 칼을 들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눈이 멀어 싸우던 시절이었다.

그 속에서 노부나가는 말했다.


“질서를 다시 만들겠다.

하지만 그 질서가 아름답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학살과 파괴는, 현존하는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해체였다.
즉, 그는 기존 시스템을 부순 파괴자이자,
그 위에 새로운 세상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그는 ‘신의 시대’를 끝내고 ‘이성의 시대’를 열고자 했다

노부나가는 신보다 사람을 믿었다.
사원 권력을 불태우고, 조정의 권위를 무시하고,
‘신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오래된 믿음을 부정했다.

그의 시대는 그를 이단이라 불렀지만,
오늘의 시선에서 보면 그는 근대 이성주의의 선구자로 보이기도 한다.


“무례한 자”, “악마 같은 자”라 불렸던 그 말들 속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타인의 신념을 태워버렸다.


자신이 만들고자 한 세상을 위해, 기존 세상을 부정했다.

그는 분명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 혼란을 잠재울 수 없었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잔혹한 독재자였을까?

아니면 시대가 감당하지 못한, 너무 빠른 진보였을까?


그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그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


정의인가? 효율인가? 질서인가? 자유인가?
그의 이름 앞에서, 우리는 역사를 넘어 인간 자체를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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