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로마의 영원한 그림자

by Minor Bloom

카이사르

기원전 1세기, 로마는 공화정 체제 아래 있었지만 겉보기와 달리 끊임없는 긴장 속에 있었다. 귀족과 시민, 군사 영웅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그런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위험과 맞서야 했고, 생사를 위협하는 술라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망명과 해적에게 붙잡혔던 경험, 그리고 그 속에서 보여준 냉정함과 결단력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카이사르는 단순한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갈리아를 정복하며 로마의 경계를 넓혔고,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켜 공화정을 흔들었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클레오파트라와 연대하며 정치와 사랑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의 삶에는 항상 전쟁, 권력, 야망, 배신이 뒤섞여 있었고, 한 사람의 선택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인물은 단순히 역사의 기록 속에 남은 이름이 아니라, 운명과 시대를 스스로 밀어붙인 남자였다.



로마의 젊은 귀족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화려한 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집안은 명문이었으나, 당시 로마의 권력 구조 속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욱이 정치 상황은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듯 위험했다.


기원전 82년, 로마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무자비한 독재자이자, 마리우스(Marius)가 이끄는 평민파(Populares)와 로마 내전을 승리로 끝낸 사나이—가 원로원의 절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곧 생사여탈권을 뜻했다. ‘숙청’이라는 말조차 담담하게 들릴 정도로, 매일 아침 누군가의 이름이 처형 명단에 올랐다.


이 무렵,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직 스무 살 남짓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정치적 위험지대를 걷고 있었다. 그는 마리우스의 조카이자, 술라의 정적 세력과 혼인으로 맺어진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 코르넬리아는 마리우스파 거물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친나의 딸이었다. 술라의 눈에는 그 혼인이 곧 반역의 증거였다.

술라는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명령을 내렸다.

"카이사르는 아내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명단에 올리겠다."

이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명단에 오른다는 것은 곧 재산 몰수, 망명, 혹은 처형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젊은 귀족이라면 두려움에 떨며 명령에 복종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달랐다. 그는 차갑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아내를 버리지 않습니다. 저 여자는 제 선택입니다.”

그 순간, 카이사르는 로마 최강의 독재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길을 택했다. 술라는 분노했고, 곧 그의 이름은 숙청 명단에 올라갔다.

카이사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술라의 군사들이 그를 쫓았고, 그는 산과 숲, 시골 마을을 전전하며 은신했다. 가난에 시달렸고, 병까지 앓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술라의 최측근 몇몇이 청년 카이사르의 재능과 기개를 높이 사서 그를 구명하려 했다. 그들은 술라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그를 살려주십시오. 아직 젊고 무해합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목숨은 건졌지만 로마를 떠나 군 복무에 나서야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의 군 생활이 훗날 그의 전쟁 감각을 다지는 훈련소가 되었다.

술라가 이렇게 말했다.

“그 젊은이는 목에 마리우스 열명의 피를 품고 있다.

그의 야망을 방치한다면, 언젠가 이 나라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이 말은 예언이었다. 30년 후, 카이사르는 로마를 제 발밑에 두게 된다.

술라가 보았던 ‘잠재된 마리우스’는, 훗날 ‘카이사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중심에 선다.


해적과의 한판

그의 젊은 날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건이 있다.
카이사르가 소아시아로 향하던 도중, 키리키아 해적들에게 납치당한 것이다.
해적들은 몸값을 요구했는데, 금화 20탈란트를 요구하자 카이사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20? 나의 값은 그보다 훨씬 높다. 50탈란트를 요구하라.”

해적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결국 그의 말대로 몸값을 높였다.
그리고 포로 생활 내내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를 쓰고 연설을 하며, 심지어 해적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포로 생활 중 내내 “내가 풀려나면 너희 모두를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몸값이 지불되어 풀려난 후, 그는 즉시 함대를 모아 해적들을 추격했고,
약속대로 그들을 전부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그의 두 가지 면모를 잘 보여준다 — 치명적인 카리스마와 무자비한 실행력.


불가능을 정복하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속주 갈리아 키살피나(현재의 북이탈리아) 총독 자격으로 국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미개한 땅’이라 불리던 갈리아. 숲과 강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수많은 부족이 서로의 목을 겨누며 살아가던 곳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그곳을 위험한 변방으로만 보았지만, 카이사르는 달랐다. 그는 그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멸로 새길 기회를 보았다.


첫 번째 상대는 헬베티족이었다. 스위스 알프스 근처에서 살던 그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36만 명이 무리를 지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행렬이 로마 영토를 가로질러 가겠다고 하자, 카이사르는 이를 로마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자, 자신이 명성을 얻을 기회로 판단했다. 그는 로도냐 강변에 방어 요새를 쌓고 길을 차단했다. 협상은 실패했고, 결국 전쟁이 시작됐다.
불과 몇 달 뒤, 헬베티족은 완전히 패배했다. 카이사르는 생존자를 포로로 삼고,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다. 갈리아 땅에 “로마에 대항하는 자의 운명”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갈리아는 하나의 부족을 제압했다고 끝나는 곳이 아니었다. 기원전 57년, 북부 갈리아의 벨가이 연맹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그 수는 30만에 달했다. 카이사르는 속전속결을 선택했다. 강을 건너 밤낮없이 진격하며, 부족 간 불신을 이용해 연맹을 분열시켰다. 한 전투에서는 기병을 숲 속에 매복시켜 적의 측면을 기습했고, 다른 전투에서는 강을 역류처럼 건너는 허를 찌르는 전술을 펼쳤다.
벨가이 부족들은 차례로 무릎을 꿇었고, 로마의 깃발은 더 북쪽으로 뻗어갔다.


갈리아 전쟁의 백미는 기원전 52년, 베르킹게토릭스와의 마지막 대결이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역을 제패해 가자,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추장 베르킹게토릭스는 전 부족을 규합해 ‘자유 갈리아’의 최후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유목민처럼 움직이며 초토화 전술을 썼다. 로마군이 접근하면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버려, 카이사르를 굶기려 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벌어졌다. 베르킹게토릭스는 언덕 위의 성에 틀어박히고, 8만의 병력을 불러들였다. 카이사르는 그 성을 에워싸는 18km의 포위망을 건설했고, 또 외부 구원군이 올 것을 대비해 반대 방향으로 21km의 외곽 포위선까지 만들었다. 로마군은 말 그대로 성과 외부를 동시에 감싸는 거대한 고리 속에 있었다.

며칠 뒤, 25만 명의 갈리아 구원군이 몰려와 외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안에서는 베르킹게토릭스가, 밖에서는 구원군이 몰아쳤다. 포위선의 흙과 나무가 불타오르고, 비명과 함성이 산을 울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침착했다. 그는 병력을 신속히 분할해 내부와 외부를 번갈아 방어하며, 전황을 뒤집었다. 결국 구원군은 무너졌고, 베르킹게토릭스는 말을 타고 내려와 카이사르 앞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이 전쟁으로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갈리아 전쟁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로마 정치에서 카이사르를 ‘단순한 장군’에서 ‘공화정을 뒤흔드는 인물’로 변모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승리의 영광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와의 대립을 심화시켰고, 결국 내전의 불씨가 되었다.



카이사르와 로마 내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로마는 이미 평화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졌다고 우려했고, 그의 경쟁자이자 옛 동맹인 폼페이우스는 공화정을 지키는 명목으로 군을 이끌고 로마를 장악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로마로 들어가면 체포될 위험이 있었고, 물러서면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군사적 명성을 잃게 된다.
결국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역사적 결단을 내린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이 한마디가 로마를 내전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다.

루비콘 강을 넘어선 순간, 카이사르는 더 이상 귀족들의 명령을 따르는 평범한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공화정의 법과 전통을 거슬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로마의 도시와 군단, 그리고 정치적 동맹 모두를 무대로 펼쳐진, 치밀한 지략과 심리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로 빠르게 진격하며 폼페이우스의 지원군을 분리시키고, 주요 도시들을 설득과 압박으로 확보했다. 단순한 무력 사용이 아니라, 시민과 병사, 원로원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전략이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철저한 정보 수집과 빠른 기동으로 상대 연합군을 하나씩 격파했고, 병력을 나누어 기습하고 재배치하며 전황을 자유자재로 조율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48년 그리스 파르살루스 전투. 수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카이사르는 병력 배치와 기병 활용, 지형의 유리함까지 완벽하게 이용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처형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승리는 단순히 전장에서만 빛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합군 내부의 불신을 교묘히 이용하고, 일부 장군과 도시 지도자를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 시민과 병사들에게는 토지와 보상을 약속하며 충성을 확보했고, 항상 공정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관리했다. 그 결과, 그의 권위는 전장의 승리를 넘어 ‘영웅적 신화’로까지 확장되었다.


기원전 44년,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독재관(Dictator)’에 올랐다.

그는 부채를 경감시키고,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달력을 개혁해 지금도 쓰이는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이 개혁들은 서민과 속주민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권력을 독점하자, 공화정을 지키려는 세력들의 불만이 커졌다.

원로원 내 반대파는 “로마가 왕정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카이사르의 내전은 권력, 정치, 인간 심리, 야망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사건이었다. 젊은 장군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 그리고 운명을 스스로 쥐는 법을 보여준 순간.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은 단순한 군사 영웅을 넘어, 전설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무찌른 뒤,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그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왕좌를 두고 다투는 젊은 여왕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궁정 내 음모와 암살 위협. 바로 클레오파트라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한 미모의 여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카리스마,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는 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카이사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담요 속에 숨은 채 황금빛 머리카락과 녹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황금 상자에 숨어 카이사르를 찾아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첫 만남에서 이미 그녀의 재치와 용기를 알아차렸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정치적 동맹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개인적 연인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이집트의 내부 정치를 안정시키고, 자신이 왕좌를 지킬 수 있도록 설득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녀를 돕는 조건으로 군사적 지원과 정치적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권력의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이집트와 나일강의 신비로운 풍경, 궁정의 화려함과 정적들의 술책을 보여주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강철 같은 현실과 달리,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Caesarion)은 카이사르의 혈통을 이어가는 존재이자,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좌와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로마 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러왔고, 원로원과 귀족들은 경멸과 의심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그녀를 지키고, 그녀의 정치적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궁전에 입성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지략을 보여주기 위해 황금 양탄자 속에 숨어 카이사르에게 밀사로 전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의 용기와 재치, 그리고 카이사르의 즉각적 판단력과 신뢰는 이 만남을 역사 속 전설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 연인, 그리고 역사적 사건의 중심이 되며, 카이사르에게 단순한 연애 이상의 의미를 남겼습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가 내전과 정치적 야망을 이어가는 데 큰 전략적, 심리적 기반이 되었고, 역사는 두 사람의 이름을 영원히 연결해 기록했습니다.


3월 15일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의 원로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한 아침을 맞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겉모습일 뿐이었다. 이 날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이데스(Ides) 오브 마치”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과 독재적 행보는 원로원 내부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암살자들은 친우이자 동료였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포함한 60여 명의 원로원 의원들. 그들은 카이사르를 단순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공화정을 위협하는 독재자였고, 스스로 신격화하는 듯한 태도는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향한 그들의 계획은 단순한 정치적 제거를 넘어, 한 시대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다.


그날 아침, 카이사르는 평소처럼 토가를 걸치고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암살을 예감했는지 모를 묘한 긴장과 여유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료들의 배신은 감지할 수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암살자들은 한순간의 기회를 노렸다. 카이사르는 무방비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순식간에 칼이 그의 몸을 향했다. 23군데나 칼에 찔린 카이사르는 원로원 바닥에 쓰러졌고, 전장의 영웅이었던 그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그가 쓰러진 순간, 공포와 혼란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 브루투스가 칼을 들이밀자 카이사르는 낮게 한마디 남겼다고 한다.


“Et tu, Brute?”

(너마저, 브루투스여?)


그 짧은 문장은 단순한 배신의 고백이 아니라, 인간적 슬픔과 충격, 그리고 공화정과 개인의 운명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담고 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로마를 바로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그의 암살은 공화정을 지키려는 시도로 포장되었지만, 결국 권력 공백과 혼란을 낳았고, 로마는 다시 내전과 정치적 격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날 이후, 카이사르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라 역사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권력과 배신, 인간적 야망의 상징으로 길이 남았다


영웅인가, 악당인가

카이사르는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제도를 개혁했으며, 대중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피와 권모술수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가 만든 길은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이어져 로마 제국의 탄생으로 귀결되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공화정 로마’의 종말을 불러왔다.

그는 민중에게 영웅이었으나, 귀족들에게는 폭군이었다.

역사의 평가는 언제나 양면적이다.

어쩌면 진정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영웅과 악당은, 단지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순간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를 뿐 아닌가?”


그의 삶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로마의 거리를 거닐던 청년이, 지중해를 지배한 장군이,
결국 신화가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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