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들이 게맛을 알아
<처음 인턴>
인턴이었다. 말이 인턴이지 월급은 20만 원 받는 방학 동안의 체험형 인턴.
(대기업임에도 이런 일이 가능했다. 당시에는 최저임금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람들 인식 속에 없었다.)
방학 동안에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하고 우연히 지원했던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인턴직에 덜컥 붙었다. 방학 동안만 해보자 했던 일이었다.
그때의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인생은 사소한 데서 갈린다.
잠깐만 해보자 했던 일이 평생을 이끌기도 한다.
우리 팀 인턴은 3명이었다.
남자 2에 여자 1. 신방과에 형 1명과 지방에서 올라온 동생 1명
(당시에 빠른 이라고 반올림해서 반말했던 거 미안해. 형)
처음 배정받은 팀은 롯데리아 광고 캠페인으로 유명한 팀이었다.
당시 그 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일반적으로 CD라고 부른다)는 선영아 사랑해, 2% 부족할 때 등
연달아 히트 캠페인을 만들어서 회사에서는 ‘내가 제일 잘 나가 하는 사람’이었다. 이 OO CD.
<롯데리아 광고 캠페인>
맥도널드보다 롯데리아가 훨씬 히트 쳤던 시절. 맥도널드보다 유사 로컬 브랜드가
점포수 라든지, 마켓 셰어에서 앞서가는 사례는 글로벌에서도 우리나라 밖에는 없었고,
그에 걸맞게 광고 캠페인도 롯데리아가 맥도널드보다 훨씬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양미라 남희석의 버거소녀를 비롯 히트 캠페인을 연달아 진행한 팀.
어쩌면 많은 걸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인턴이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셋이서 자료를 보며 점심시간을 기다리기만 할 뿐.
그러다 처음 업무가 주어졌다.
크랩버거 엔딩 카피를 쓰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어떤 카피를 기대했다기보다는
그냥 젊은 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정도의 일이었던 듯하다.
사실 이 광고가 크랩버거 광고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처음 주어진 업무>
노인과 바다를 패러디한 거 같은 콘티가 있었고,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고 모델이 내레이션을 하면,
OO버거라는 브랜드 명 앞에 붙을 슬로건인지 키 클레임인지 하는
한 문장을 붙여야 했다.
당시에 우리가 냈었던 카피 아이디어는 수도 없이 많았다.
첫 업무의 막중함을 담아 셋이서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고, 많은 카피를 제시했었는데
역시나 어려웠다.
그중에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버거의 명작 크랩버거’였다.
광고 아이디어가 노인과 바다에서 왔으니 명작이라는
카피를 붙이면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선배들의 별 피드백은 없었다. 당시 담당 카피라이터는 우리가 제출한
카피를 보며 그저 말없이 고개만 몇 번 끄덕거렸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크랩버거>
두 달쯤 뒤에 온에어 된 광고를 티브이에서 보았다.
버거의 명작도, 다른 카피도 없이 그냥 크랩버거였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크랩버거!
아니 이게 뭐야. 결국 자기들도 카피를 못 찾고 카피를 아예 뺀 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 아무것도 안 붙는 게 차라리 깔끔하긴 하지. 버거의 명작 크랩버거도 잘 어울리는데 아쉽군.
그냥 참여했던 것에 의의를 둬야겠네. 하는 생각을 했었다.
참여했던 것에만 의의를 두어도 충분했던 게 그 뒤 이 광고가 이렇게 히트칠 줄이야.
답이 떠오르지 않거나, 상황이 꼬여 복잡할 땐 솔루션이 하나 있다.
빼는 것이다. 일단 빼면, 답이 보인다.
디터 람스도 그렇고 미니멀리즘도 그렇고 요즘은 빼는 게 답이 된다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해서 그리 새롭지도 않다.
서울 시청 앞에 성공회 성당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건물 하나를 털기만 했을 때도
19세기 건축양식 성당이 머리를 내밀며 거리의 풍경이 변하는 것을
서울시에 근무할 때 목격했다.
<게 속살로 만든 크랩버거>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30초 광고를 볼 기회가 있었다,
15초에서는 없던 카피가 30초 버전에는 붙어 있었다.
‘게 속살로 만든 크랩버거’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중요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거였구나.
그래 게 속살로 만들었지. 이때까지 없었던 게살 버거니까 그리고 게살로 만들었다는 게
가장 중요한 USP(unique selling point) 니까 그 말을 넣어야지.
그게 광고주의 생각이든, 카피라이터의 생각이든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카피를 쓸 때 생각한다.
잘 안 써질 때는 그 자리에 들어갈 말을 일단 빼자.
꼬이기 시작한 그 부분부터 모든 것을 전부 다 빼보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을 그 자리에 넣자.
빼고 나서야 보이는 게 있고,
그제야 그 자리를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