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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도화 Oct 15. 2023

할머니, 저는 나중에 커서도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24

 “만주벌판 달려라 관개토대와 신나장군 이사부 배결선생 떱바다 삼천군녀 의자와 환사버레 계백 마써 싸운 관찰 역사는 흐른다~”


 어린이집에서 배웠다며 연이가 혀 짧은 소리로 동요를 불렀다. 가사는 가끔 틀렸지만 미자와 태평은 우리 손주 잘 한다며 노래에 맞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차가 많이 막혔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진오는 태평에게 물었지만, 미자가 대답을 가로챘다.


 “몇 번이나 와봤는데도 동네가 어찌나 비슷비슷하게 생겼는지 근처를 다 와서 한참을 뱅뱅 돌았어. 그러길래 네비를 켜고 가자니까, 네 아버지가 그냥 찾아갈 수 있다고 어찌나 고집을 부리는지. 이 씨 똥고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진오는 우리가 서울로 올라갈 걸 그랬다며 고생하셨다고 대답했고, 민정은 이 씨 똥고집은 정말 대단하다며 시어머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진오의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이 모인 자리,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 외식이나 하자는 진오의 제안에 미자는 무슨 외식이냐며 서울에서 가져온 겉절이와 수육을 꺼냈다.


 “김장철에만 맛볼 수 있는 거니까 많이들 먹어라. 젊은 애들이 맞벌이하느라 평소에 제대로 챙겨 먹기나 하겠니.”


 미자는 음식을 시집와서 배웠다. 시어머니의 음식은 간이 슴슴했기에 미자의 음식 역시 대체로 그랬다. 독립한 지 오래된 진오는 엄마의 슴슴한 김장 김치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며느리인 민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다행히 연이는 할머니의 수육을 좋아했다.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손녀의 재롱에 미자와 태평은 서울에서 새벽부터 서두른 피곤함이 싹 가셨다.


 “케이크 사 주세요, 케이크 먹고 싶어요.”


 저녁 식사를 끝내고도 더 먹고 싶은 건 없느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연이가 냉큼 대답했다. 진오와 민정은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무슨 케이크냐며 만류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미 외투를 챙긴 후였다.


 “20년 전에 빵집 할 땐 생크림 케이크 위에 과일 올린 거나 초코 케이크밖에 없었는데 종류도 참 다양해졌구나.”


 허리를 숙이고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쇼윈도를 살피던 미자가 눈을 반짝였다.


 “할머니 빵집 했었어요?”


 “그럼, 아빠가 연이만 했을 때 할머니가 빵집을 해서 아빠는 원 없이 빵을 먹었지. 그래서 아빠 키가 저렇게 큰 거란다.”


 “우와~ 아빠 좋았겠다.”


 연이가 부러운 얼굴로 진오를 쳐다보았다. 진오의 기억은 달랐다. 하루 종일 빵집에 있어도 케이크는 언감생심이었고, 그날그날 다 팔리지 않은 단팥빵이나 슈크림빵 하나를 겨우 먹은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어린 딸의 부러운 표정을 앞에 두고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를 엄마와 따지고 싶진 않았다.


 연이는 쇼윈도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만화 캐릭터 모양의 케이크를 골랐다. 캐릭터 장난감 때문에 다른 케이크에 비해 가성비가 좋지 않았지만 미자는 두 말없이 카드를 꺼냈다. 집으로 가져온 케이크를 그냥 갈라 먹자니 어딘가 심심해서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촛불은 자기가 모두 끄겠다며 연이는 다람쥐처럼 숨을 크게 들이 마셔 양볼을 부풀렸다. 민정은 재빨리 주방과 거실의 불을 껐다. 촛불의 주황색으로 반사된 가족들의 얼굴에선 제법 연말의 냄새가 났다.


 “아빠는 서울대 나왔으니까, 연이는 나중에 하버드 대학교 가자.”


 누가 뺏어 먹을세라 정신없이 케이크를 먹는 손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자가 말했다.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직 한글도 안 뗀 애한테 무슨 놈의 하버드 대학교에요.”


 진오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미자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공부 잘하면 좋지, 뭘 그러니? 네가 공부 잘 했다고 애도 공부 잘 하는거 아니다. 공부도 어릴 때부터 부모가 관심을 기울여야 잘 하는 거야.”


 미자의 공부 이야기에 누구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묻지도 않은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아범이 국민학교 때 월드컵을 본 다음에, 갑자기 축구 선수를 하겠다고 설치는 거 아니겠니. 그래서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 운동장 한 바퀴씩 뛰면 시켜주겠다고 했지.”


 민정이 호기심을 보이며,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어떻게 되긴. 며칠 일찍 나가는 것 같더니 바로 포기하더라고. 사실 몸도 약한 애가 무슨 놈의 운동을 하겠니. 운동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진오의 기억은 이번에도 달랐다. 축구부에 가보고 싶다는, 그맘때 남자아이들이 흔히 갖는 소망을 말했을 때 엄마의 반응은 차가웠다. 새벽에 운동하는 축구부 아이들 뒤에서 한 번 뛰어 보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고 냉정하게 아들을 다그쳤다. 그 이후 진오는 공부 이외의 진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공부 외에는 어떤 재능도 없다는, 설사 재능이 있다 한들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 일이 말처럼 쉬운 줄 아냐는 부모의 인식이 스스로에게 깊이 뿌리박혔기 때문이었다.


 “연이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할머니의 질문에 연이는 입술을 깨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입술이 열릴 듯 말 듯 몇 번이나 뜸을 들였지만 끝내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부동산은 잘 돼요?”


 진오는 미자에게 물었지만 이번엔 태평이 답을 가로챘다.


 “호가만 뛰지 거래가 없어서 장사도 안 되는데 수수료까지 인하했으니 임대료도 안 나올 판이다. 이제 부동산도 그만둬야 할 까 봐.”


 “자격증 있는 사람은 가만있는데, 그만두겠다는 결정은 당신이 해? 그만두면 뭐 먹고 살 건데? 아직도 살 날이 구만 리인데 돈 백도 안 나오는 국민연금 받으면서 어떻게 살려고. 쯧쯧.”


 미자가 눈을 흘겼지만, 서로를 향하는 목소리에 젊을 때처럼 날선 힘은 없었다.


 “주택연금 받으면 되지. 알아보니까 아파트 담보로 잡으면 죽을 때까지 월 200은 나온다고 하던데.”


 “집 파먹고 산단 이야기를 뭣하러 벌써 해. 열심히 일해서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갈 생각은 안 하고, 벌써부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진오는 주택연금을 받든, 부동산을 계속하시든 두 분의 일이니 알아서 하시라며 대화를 정리했다. 밤이 깊어 연이는 연신 하품을 해댔고 어른들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 날 아침, 미자와 태평은 새벽부터 깼다. 잠자리가 바뀌어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어제 남은 밥과 반찬으로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는 서울로 가는 채비를 서둘렀다. 더 계시다 가라는 며느리의 빈말도 소용없었다. 외투까지 걸쳐 입고 현관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데, 연이가 할머니에게 급하게 할 말이 있다며 귀를 잡아당겼다. 미자는 기꺼이 허리를 숙였고 연이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할머니, 저는 나중에 커서도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엄마, 아빠랑 오래오래 행복하게요.”






 “장모님 칠순인데 진짜 밥만 먹고 와도 되나?”


 서울 방향 경부고속도로 안성 나들목을 지나며 진오가 민정에게 물었다. 나들이 차량으로 토요일 오전부터 극심한 정체를 겪는 하행과 달리 상행은 뻥뻥 뚫려 있었다.   


 “이모들이랑 가을에 여행 갈 거라고 나한테 이미 얘기했어. 엄마는 꼭 그런 건 오빠보다 나한테 먼저 이야기하더라.”


 민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진오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침묵이 이어졌다. 집을 나설 때부터 옷이 불편하다고 징징대던 연이도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수원 나들목 부근에 도착하자 영동고속도로에서 합류한 차량의 영향으로 상행 역시 본격적으로 막히기 시작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간은 슬금슬금 늘어졌다. 진오는 운전의 지루함을 달래려 민정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연이 내년에 학교 가기 전에 서울로 이사 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아? 집도 찾아봐야 하고 각자 회사에서 알아봐야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지금 사는 집도 부동산에 내놓아야 하고 본사로 인사이동 신청도 해야 하고.”


 “그럼 당분간 주말부부를 해야 하나? 평일에 서울에서 세종 출퇴근은 도저히 못 할 것 같은데. 혼자 서울에서 연이 데리고 살 수 있겠어?”


 “몰라. 그나저나 요즘 서울 집값은 얼마나 하나. 우리 집 팔면 서울 갈 수는 있나?”


 운전 중인 진오는 나도 모른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했다. 민정은 본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핸드폰의 부동산 앱을 켰다. 서울 관심 지역의 아파트를 살펴보다, 턱도 없는 가격에 화가 났는지 핸드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끄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원부터 막혔던 고속도로는 분당쯤 도착하자 제 속도를 찾았다.


 “근데 우리는 왜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지?”


 민정의 질문에 진오는 ‘네가 가자며’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했다가는 꽤나 험난한 서울 나들이가 될 것 같아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연어도 자기 고향 찾아가서 죽으려고 그렇게 고생을 한다잖아. 우리 둘 다 고향이 서울이니까 돌아가고 싶은 거지.”


 또다시 침묵. 서울 톨게이트까지 도로 상황은 무난했다. 그래도 한 번 늘어난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간은 요지부동이었다. 민정이 다시 입을 뗐다.


 “주말부부에 집 크기는 반 토막 날 거고. 연이도 친구들 다시 사귀어야 하고. 본사에서 승진하려면 나도 지금보다 바빠질 거고. 당신도 평일에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몸 구겨 자야하고.”


 “초등학교 1학년은 점심만 먹고 하교한다던데. 오후엔 연이를 누가 돌보지? 정말로 사람을 써야 하나.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이제 와서 장모님이나 우리 부모님한테 도와달라 하기도 그렇잖아. 도와주시지도 않겠지만. 게다가 주말에만 아빠 얼굴 보면 지금보다 연이와 사이가 더 멀어질 텐데.”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다시 시작한 고속도로 정체는 양재 나들목 부근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제부터 한남대교까지는 엉금엉금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상습 정체구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방에 고장차량이 멈춰 섰다고, 고속도로 전광판이 번쩍였다.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비게이션의 도착시간은 그만큼 늘어났다.


 막힌 도로 위에서 진오와 민정은 서울로 왜 돌아가야 하는지, 돌아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부의 대화는 고속도로 정체만큼이나 열기를 더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이정표는 허약했고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번번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되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고속도로 정체만큼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아직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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