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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도화 Oct 15. 2023

이거 다 역할놀이야

#20

 진오는 이틀 연가를 냈다. 승진에 아쉽게 탈락한 사람은 집에서 며칠 쉬는 공직사회의 불문율을 그대로 따랐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관례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른 직원들이 탈락한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승진자를 마음껏 축하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4급으로의 승진에 이어 차례로 실국장급 승진 발표가 났다. 정 과장은 모두의 예상대로 국장급으로 승진했다. 동기 중 첫 번째였다. 반면 실장급 승진을 마지막까지 노렸던 김 국장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58세라는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사실상 퇴직 수순이었다.     


 민정은 사회생활 선배답게 ‘인사란 까 봐야 알지, 설레발칠 때부터 알아봤다’는 말로 남편에 대한 위로를 대신했다. 유유히 출근하며 ‘집에 가만히만 있지 말고 빨래며 청소 좀 하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연가 내내 집에만 있던 진오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한 사람은 고 사무관, 아니 며칠 전 승진한 고 서기관이었다. 저녁에 잠깐 보자는 그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진오는 동기에게 축하 인사도 제대로 못 건넨 자신의 옹졸함이 들킬까 봐 길을 나섰다. 


 맥줏집에서 만난 고 서기관은 진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진오는 김 국장과 도 사무관 사이의 내연관계를 목격한 사건을 제외하고, 그간의 일어난 일을 차례로 설명했다. 고 서기관은 ‘누가 가장 원망스럽냐’고 물었다. 진오는 주저 없이 김 국장을 뽑았지만, 그의 의견은 달랐다.


 “정 과장님이 제일 얄밉지 않아? 애초에 도 사무관하고 김 국장님 의도를 모를만한 사람도 아니면서, 네 고생으로 본인만 덕 본 거 아니야. 결국 자기 손 하나도 안 더럽히고 본인만 승진했으니 이 사건의 진정한 승리자는 정 과장님이지. 하여간 그 양반도 참,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믿을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곧 파견을 갈 예정이니, 본인의 자리로 와서 새로 시작해 보는 것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지금 자리에서 더 일하는 건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어렵지 않겠냐고. 진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든 말을 쏟아내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동기 중 가장 뒤처졌다는 패배감만 밀려들어 자리의 뒷맛이 썩 좋지 않았다.


 이틀 만에 출근한 진오를 가장 먼저 부른 건 김 국장이었다. 그는 낙담한 부하 직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으로 기회가 많으니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냐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장관님도 5~6년 만에 서기관 승진하던 그 시절에, 사무관 생활만 14년 했다고 하시더라. 사람 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만 다하면 되는 거야.”


 허 주무관은 국장실에서 나온 진오를 따로 불러냈다. 또다시 모든 일이 시작된 그 옥상으로. 진오는 따져 물었다. 처음부터 도 사무관과 계획하고, 나 같은 호구 하나 잡아서 세워 둔 거 아니냐고. 내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면 도 사무관이 결국엔 피날레를 장식하기로 한 연출이 도대체 누구의 작품이냐고. 


 “김 국장님한테도 이렇게 제대로 따지고 나오신 거 맞죠?” 


 허 주무관의 핀잔에, 진오는 다다다 쏘아대던 말문이 막혔다. 어쨌거나 직접 도 사무관을 선택한 김 국장에겐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꾸뻑 숙이고 나온 건 사실이니까. 


 “진정하세요. 도 사무관이 김 국장님하고 어떤 설계를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걸 알면 제가 인사 마피아라고 봐야죠. 막말로, 내가 인사 마피아면 나부터 사무관 승진하지, 뭐 한다고 6급을 10년이나 하고 있겠냐고요.”


 진오는 일단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이제 다 떠납니다. 김 국장은 조만간 나갈 거고, 정 과장은 승진했으니 곧 교육훈련 들어가요. 그리고 도 사무관, 아니 이제 도 서기관은 인사과로 화려한 복귀. 인사계장으로 이미 내정되었어요. 도 서기관도 사람인데 사무관님한테 부채의식이 좀 있지 않겠어요? 인사 마피아들이 자기 식구들은 기가 막히게 챙겨도 남을 2번 밟진 않아요. 특히 고시 출신들이랑 원수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무관님은 여기서 6개월, 길어야 1년만 더 버티면 다음 승진은 누가 와도 보장된 거라고요. 지금 여기저기서 옮기라고 오퍼 들어오죠? 그 말 듣고 옮겼다가 진짜 피 봅니다. 거기 선수들이 누가 세팅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움직였다간 또 당한다고요. 공무원은 무조건 존버가 답입니다. 존버!”


 “김 국장님은 왜 도 사무관을 선택했을까요?”


 진오는 김 국장의 선택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애도 아직 대학생인데 퇴직하고 집에서 손 빨고 놀 수는 없으니, 산하단체 낙하산 자리 찾고 있겠죠. 윗선에도 열심히 줄 대고 있겠지만 인사과 실무자들한테도 줄을 좀 대야 하니까 아무래도 사무관님보단 도 서기관이 더 쓸모 있지 않겠어요?”


 허 주무관의 해석에 진오는 코웃음을 쳤다. 더 이상 비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귀엣말을 했다.


 “주무관님만 알고 계세요. 김 국장하고 도 서기관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예요. 제가 김 국장이 번개 친 날 다 봤다고요. 남의 사생활이라고 생각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맹세코 입 꾹 다물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공사 구분을 못하고 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니까요.”


 하하하- 진오의 이야기가 끝나자 허 주무관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이 드디어 미쳤나 싶을 정도로 기괴한 웃음이었다. 옥상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자꾸만 이쪽을 쳐다보았다. 진오는 좀 겁이 날 정도였는데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사무관님 참 재밌는 양반이네. 도 서기관이 김 국장하고만 했겠어요. 아니, 이 청사 안에 자기들끼리 붙어먹는 년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거랑 승진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하..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이러니 답이 안 나오지.”


 “뭐라고요? 답이 안 나온다고? 말씀이 심하시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선을 한참 넘었다는 생각에 진오도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허 주무관은 진오가 상급자로서 전혀 두렵지도 않은지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교를 늘어놓았다.


 “이거 다 역할놀이야. 주어진 역할하다가 떠날 때 되면 다들 떠나는 거라고. 고시 출신들은 2급까지, 7급들은 4급까지, 그리고 나 같은 9급 출신들은 5급까지 한 30년 자기 역할 하면서 돈 받고 놀다 가면 그뿐이라고. 불륜 때문에 김 국장이 도 서기관을 선택해?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눈치가 느려 터지니까 정 과장이 단물만 빼먹고 튀는 거 아니야! 제발 좀 모르겠으면 남들이 시키는 대로라도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 허 주무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성큼성큼 먼저 걸어갔지만, 진오는 붙잡지 않았다. 이제 그는 홀로 남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게 다 역할놀이라면 무슨 역할을 할지는 이제부터 자신이 고르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는 후회도 밀려왔지만,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묘한 해방감이 더 컸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를 지나다 우연히 연이의 친구를 만났다. 둘이 어찌나 재잘대며 잘 노는지, 진오와 민정은 잠깐의 여유를 얻었다. 부부는 잠깐 쉬자며 놀이터 한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진오가 민정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말한 승진 자리 아직 갈 수 있나?”


 “응, 아마도. 아무도 안 가려고 하나 봐. 여기 있는 직원들은 승진에 목매는 분위기가 아니더라고. 본사랑 많이 달라.”


 민정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건 왜 묻냐는 질문을 되돌려  받을 줄 알았는데 침묵이 계속되자 진오는 대화를 자가발전시켰다. 


 “그 자리 가면 승진은 얼마나 걸려?”


 “글쎄, 6개월은 너무 짧고 한 1년 걸리려나. 모르지, 뭐.”


 민정은 눈으로 연이를 좇느라 혼자 바빴다. 어디 걸려 넘어질 나이가 아닌데도 연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민정은 엉덩이를 들썩대며 주위를 살폈다. 


 “내가 육아휴직하고 집안 살림할 테니까, 승진 자리로 가 볼래?”


 진오는 큰 결심을 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민정은 코웃음을 쳤다.


 “말씀은 고마우나, 어차피 쓰지도 못할 남편의 육아휴직에 설레고 싶진 않네요.” 


 “아니야. 공무원은 남성도 8세 이하 자녀에 대해선 육아휴직 쓸 수 있다고 법에 딱 나와 있어.”


 “아유, 그러세요. 초근 수당 다 떨어져서 한 푼도 못 받아도 야근에, 주말 출근하는 법은 어디 나와 있어요? 경국대전에 나와 있어요?”


 “아,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진오가 거의 버럭 소리를 지르듯 말했기 때문에 놀이터의 아이들은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다. 민정은 소리 좀 낮추라며 어금니를 깨물고 면박을 줬다.


 “주변 남자 사무관 중에 육아휴직 쓴 사람은 있고?”


 민정이 핵심을 짚어 물었다. 진오는 조그맣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민정은 고개를 돌려 다시 연이를 눈으로 찾았다. 


 “승진하고 싶지 않아? 본사에 있는 동기들은 벌써 과장 달았다며.”


 “누구 때문에 못 했는데.”


 민정이 반쯤은 장난 섞인 표정으로 진오를 힐끗 째려보았다.


 “본사에 남은 동기가 이제 한 30퍼센트 되려나. 나머지는 퇴사도 하고, 나처럼 지방 지사에 눌러 앉은 경우도 많고. 더러는 건강 문제로 안 좋게 된 경우도 있어. 연이 낳고 본사에 있을 땐 엄마 찾는 애를 떼어놓고 출근하는 게 괴롭고 회식이나 야근도 못하니까 승진도 자꾸 멀어져서 자괴감도 컸는데, 오히려 여기 와서는 일도 많지 않고 연이 크는 것도 챙기면서 사니까 만년 대리가 뭐 어떤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야, 어차피 우린 서울로 돌아가야 하니까.”


 “여기에서도 승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여긴 여기만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아. 난 그걸 굳이 거스르고 싶지 않고. 대신 다시 본사로 돌아가면, 그땐 그곳의 방식을 거스르지 않을 거야.”


 연이가 놀다 손을 베였다고 울며 달려오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민정이 재빨리 손을 확인해 보았으나 다행히 핏방울도 맺히지 않을 만큼 얕게 팬 상처였다.


 “연이 소독하고 밴드 붙여서 다시 나올 테니까 당신은 여기 있어.”


 민정과 연이가 집으로 잠시 간 사이, 진오는 심심한 마음에 놀이터의 놀이 기구들을 괜히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그의 관심을 끈 건 소위 ‘뺑뺑이’라 불리는 회전무대였다. 


 진오는 어릴 적 동네 형들이 회전무대를 세게 돌리면, 몸이 밖으로 쏟아져 벌렁 넘어질까 유독 무서웠던 기억이 났다. 기구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손잡이를 잡고 벌벌 떠는 어린 진오가 보기 안쓰러웠는지, 태평은 아들에게 차라리 손을 한 번 놓아보라고 했다. 생각과는 달리 벌렁 뒹구는 것이 아니라 기구가 도는 방향으로 몸이 튀어 나갈 테니 제대로 착지 준비만 하면 다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키면서. 하지만 원체 겁이 많던 진오는 기구에서 단 한 번도 손을 놓아보지 못했다. 


 진오가 원심력과 구심력에 대해 배운 건 중학교 과학 시간이었다. 원운동에서 구심력은 중심으로 당기는 힘이고, 원심력은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되는 힘이다. 둘의 조화로 원운동이 유지된다고 오해하기 좋으나, 구심력은 실재하지만 원심력은 가상으로만 존재한다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직선으로 운동하는 물체에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 것일 뿐 원심력은 관성에 의한 효과의 일종일 뿐이다. 진오는 그때야 깨달았다. 결국, 어릴 때의 자신이 회전무대에서 두려워 한 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원심력이란 사실을.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건 붙잡은 자신의 손을 통해 중심으로 그를 옭아매는 구심력인데도 말이다. 


 손에 붙이는 밴드를 찾기가 어려운지 민정과 연이의 복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진오는 그 사이 오랜만에 회전무대를 타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힘으로 먼저 세게 돌리고는 잽싸게 그 위에 탔는데 빙글빙글 돌던 기구는 더 이상의 힘이 붙지 않자 속도가 느려지며 이내 멈췄다. 몇 번의 시도를 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그는 놀이터에서 놀던 다른 아이들에게 회전 무대를 힘껏 밀어달라고 요청했다. 아이들은 다 큰 어른이 무슨 놀이기구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순순히 요청에 응했다. 몇몇 아이들의 힘이 더해지자 회전무대는 그가 원하는 만큼 힘껏 돌았다. 속도가 최고조에 이르자 그는 손을 놓고 놀이터 우레탄 바닥으로 힘껏 착지했다. 어릴 적 들었던 태평의 말처럼 벌렁 넘어지기는커녕 진행 방향으로 몇 발자국 몸이 쏠릴 뿐이었다. 신기한 구경을 한 것처럼 아이들은 손뼉을 쳤고, 그는 머쓱했지만 고마운 마음에 주머니의 사탕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랜 숙제를 끝낸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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