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오전 이른 시간, 인트라넷에 승진심사계획이 떴다. 직원들은 분주하게 클릭했고 조회 수는 순식간에 천 단위로 불어났다. 고요하던 사무실은 이내 타닥타닥 타자치는 소리로 가득 찼고 이윽고 삼삼오오 복도로, 옥상으로, 흡연구역으로 빠져나갔다. 점심시간은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제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드물 지경이었다. 바야흐로 승진의 계절이었다.
<행정4급으로의 승진심사계획 공고>
승진예정인원 : 4급 10명. 자세한 내용은 붙임 파일 참고. 끝.
“이 사무관님이 근무평정이랑 다면평가를 다 합쳐서 몇 등이죠?”
허 주무관이 진오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입이 근질거릴 정도로 궁금한 게 많았지만, 어쩐지 자신의 승진과 관련한 이야기로 하급자를 먼저 부르는 일이 민망했던 진오는 그의 호출이 반갑고 고마웠다.
진오가 주변을 의식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등수를 알렸지만, 허 주무관은 그러거나 말거나 핸드폰 메모장에 받아 적으며 시끄럽게 말했다.
“밥 좀 사고 다니셨나 보네. 3등이면 이번에 되겠어요. 우리 국에서 이 사무관님 혼자 승진하시겠어.”
“그런데 거기 뭘 적는 거예요?”
“각 국마다 나 같은 인사쟁이들이 하나씩은 있거든요.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전체 등수를 조합하는 거예요.
인사과 놈들이 별것도 아닌데 치사하게 이걸 안 알려줘요. 이 사무관님을 끝으로 이제 다 완성. 한 20등까지만 정리하면 그 안에서 승진자가 다 나오니까, 우리는 다음 스텝을 미리 예상하는 거죠. 승진자들이 빠지면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갈까, 그럼 연쇄적으로 인사이동이 되는데 누굴 집어넣고 뺄까 뭐, 그런 거요. 인사가 만사라고 하지만 사실 인사는 예술입니다, 예술.”
자기도 좀 보여 줄 수 있느냐는 진오의 부탁에 허 주무관은 흔쾌히 핸드폰을 건넸다. 메모에 적혀 있는 명단에서 아직 승진하지 못한 동기들의 이름을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승진의 계절이 밝자, 허 주무관은 핼러윈을 맞은 유치원생처럼 왠지 모르게 신나 보였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인사과는 왜 그를 안 데려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국도 10개, 승진 예정인원도 10명. 이렇게 숫자가 예쁘게 맞을 경우엔 각 국에서 1명씩 승진하는 것이 관례였다. 승진을 결정하는 보통승진심사위원회는 국장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이전투구가 벌어지지 않도록 모두를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따라서 전체 3등이자, 국에서 1등인 진오의 진급은 누구나 쉽게 예측했다.
“나 이번에 승진할 것 같아.”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진오가 저녁을 먹으며 말했다. 연이에게 밥을 먹이느라 정신없는 민정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어, 축하해. 할 때도 되었지, 뭐.”
진오는 민정의 반응이 서운했다. 그래도 함부로 티를 냈다간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잠자코 주는 밥만 먹었다. 연이에게 밥을 다 먹인 민정이 자신의 식사를 시작했다.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승진하면 혹시 좀 덜 바쁜 자리로 갈 수 있나?”
“그건 나도 모르지. 공무원이 직급 올라간다고 자리를 선택할 수가 있나. 그래도 서기관 달고 조금 있으면 유학도 갈 수 있고 그때 연이 영어도 배우고 너도 좀 쉬고..”
진오의 레퍼토리에 질린 민정이 젓가락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만, 그만. 맨날 나중에 호강 시켜준다는 이야기 좀 그만해. 결론적으로 승진해도 당장 좋은 일은 없다는 거네.”
진오에게 민정은 시험에서 백 점 맞았다고 칭찬해 주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짜 엄마한테 전화해서, 곧 승진할 것 같으니 칭찬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지사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자리가 딱 한자리가 있는데, 팀장님이 그 자리로 옮길 생각 있냐고 묻더라고. 요즘엔 다들 워라밸을 찾으니까 나한테까지 기회가 온 것 같긴 한데, 연이도 아직 어리고 지방까지 와서 굳이 고생하는 자리로 가는 게 내키지 않아서 일단 거절했어.”
민정은 아쉬운 눈치였지만 진오는 상황을 좀 지켜보자며 대화를 끝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했다.
“연이야~ 오늘은 아빠랑 씻자~”
“싫어, 싫어. 아빠랑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다 엄마랑만 할 거야.”
연이는 친근하게 다가서는 진오를 외면하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연이는 점점 진오를 멀리했다. 아이의 반응은 들이는 시간과 애정에 정직하게 비례했다. 생물학적인 관계만으로는 좋은 유대를 담보할 수 없는 게 육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진오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연이는 이제 겨우 6살이었고 만회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이제 곧 승진도 하고 유학도 가면 가족과 보낼 시간은 차고 넘칠 테니 모든 것은 원상복구될 것이라 믿었다.
“안하던 짓 하지 말고 설거지나 해.”
민정은 연이를 추슬러 화장실로 데려갔다. 진오는 내민 손이 무안해 괜히 거실 정리를 했다. 거실 한구석에서 발견한 연이가 그린 정체불명의 그림 밑엔 서툰 글씨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진오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머리를 공들여 말리고 아끼는 회색 정장을 골라 입었다. 회색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골라달라고 민정에게 부탁할까 하다, 아무래도 오버하는 것 같아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보통승진심사위원회는 이른 오후에 열렸지만 위원회가 끝나는 시간과 관계없이 결과는 퇴근 시간에 맞춰 공개되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직원들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6시에 결과를 공지하고는 인사과 직원 모두 바로 회식을 갔다. 인사과가 하필 그날 회식을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전통은 그랬다.
승진 결과가 발표되는 시간을 뻔히 알면서도 진오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트라넷 공지를 새로 고침했다. 하루 종일 어찌나 오줌은 자주 마려운지 화장실을 수십 번이나 들락날락했다. 누가 봤다면 전립선에 문제없냐며 농담을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진오는 행정고시를 합격하던 날이 기억났다. 세 번째 도전이었고, 나름대로는 배수의 진을 친 상황이었다. 발표 날,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가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늦게 일어나기 위해 승환과 함께 전날 밤을 지새우며 술을 진창 마셨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다음 날 아침 눈은 일찍 떠졌다.
합격자 발표 역시 오후 6시가 되어서야 결과가 나왔다. 민원 전화에 시달리지 않으려는 담당 공무원들의 교묘한 꼼수라고 수험생들은 생각했고, 일부분은 사실이었다. 진오는 숙취에 시달리며 머리도 감지 않은 채 몸에 이불을 둘둘 말고는, 하루 종일 수험생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를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쓸만한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합격자 명단을 확인할 것도 없이 진오의 핸드폰으로 정부에서 보낸 합격 문자가 도착했다. 진오와 미자, 그리고 태평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기쁜 날이니 저녁은 외식으로 하자며 집을 나섰지만 변변히 아는 가게가 없어 동네만 빙빙 돌았다. 목동에 이사를 와서 10년을 살았는데도 좋은 날 외식할 만한 단골집 하나 아는 곳이 없었다. 겨울밤 길거리를 헤매다 보니 배는 꼬르륵-요동쳤다. 할 수 없이 더 이상의 탐색을 포기하고 사람이 적당히 앉아있는 평범한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추운 날씨에 배회하다 들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맛집이라도 되는지 삼겹살은 정말 맛있었다. 태평은 좋은 날이라며 자연스럽게 소주를 시켰다.
“이제 우리 아들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될 거야.”
붉은 얼굴의 미자와 태평이 차례로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그 삶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인사과는 이번에도 관례를 지켜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승진 결과를 공지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사무실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오도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공지를 클릭했다. 눈으로 재빨리 문서를 훑어 내려갔지만 자신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ctrl+f’를 눌러 ‘이진오’를 직접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여전히 ‘없음’이었다.
김 국장의 선택은 도 사무관이었다. 파티션 뒤에서 결과를 확인한 정 과장은 진오의 어깨를 몇 번 툭툭 치고는 ‘며칠 좀 쉬라’는 말만 남기고 먼저 퇴근했다. 직원들은 이내 썰물 빠지듯 삼삼오오 사무실을 나섰다. 축하나 위로를 위한 술자리들이 많은 날이었다. 하지만 흔한 위로의 손을 내미는 사람이 진오에겐 아무도 없었다.
발탁 승진. 성과와 능력을 고려하여 승진 명부에서 후 순위인 대상자가 조기에 승진하는 제도. 연공서열 위주의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 넣기도 하지만 공정성 시비도 있기 때문에, 규정 상 전체 승진자의 10% 이내에서만 발탁 승진자를 선발했다. 도 사무관은 제도의 수혜자였다. 명부 상 순위는 20위 밖이었지만, 승진자 중 티오가 단 1명인 발탁 승진 대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하나의 국에서 한 명만 승진할 수 있는 관례상, 진오는 자연스럽게 승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같은 결정은 보통승진심사위원회에 참여한 김 국장의 판단이었다.
진오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인트라넷 공지에 게시된 도 사무관의 발탁 승진자 추천서를 읽었다. 근무부서와 업무역량, 주요 성과가 글자 크기 10포인트로 A4 1장을 다 채울 만큼 빼곡하게 적혀있는 가운데, ‘후보자는 남들이 꺼리는 업무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솔선수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로 추천 총평이 시작되었다. 진오는 정 과장의 권유대로 그때 그 업무를 넘기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란 생각도 했지만, 애초에 업무 분장 변경은 김 국장의 지시로 일어난 일임을 상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발탁 승진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내린 지시라는 추론쯤은 이제 쉽게 할 수 있었다.
진오의 추론은 시간을 거슬러 꼬리를 물었다. 누구의 연출인지는 몰라도 처음 도 사무관이 올 때부터, 어쩌면 허 주무관이 진오에게 주무과로의 이동을 권했을 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정 과장은 왜 자신을 받아줬던 걸까. 생각은 깊어졌고, 탓할 사람을 맹렬히 찾아보았지만 명확하게 잡히는 인물은 없었다.
진오는 청사를 나와 무작정 걸었다. 머무를 곳도, 그렇다고 어딘가 갈 곳도 분명치 않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똑바른 길로 직진만 하며 한참을 걸었는데도 여전히 청사는 가까웠다. 분명 도로 위 표지판의 행정구역은 달라지는데도 그저 그런 아파트 숲이 연속되고 인공 하천이 흐르는 풍경은 아무리 걸어도 변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같은 동네를 계속 배회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얼마나 갔는지도 모르는 한 밤의 아주 고약한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