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올해가 마지막이네.”
칼바람이 부는 1월의 새벽, 경희궁 앞 버스 정류장에서 미자가 말했다. 진오는 한겨울 날씨에 자꾸만 몸이 떨려 긴 패딩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희승이가 어렸을 때 문제은행을 그렇게 열심히 풀더니 올해 서울대 갔잖니. 희승이 누나 알지? 엄마 친구 딸.”
진오는 누군지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미자는 그러거가 말거나,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진현이는 문제집을 그렇게 사다 줘도 제대로 풀지도 않고. 내가 잔소리하면 답안지나 베끼다가 걸려서 맨날 혼나더니 결국에는 재수하잖니. 하이고, 속이 터져서 정말. 그래도 우리 아들은 큰 누나랑 다르게 문제은행을 꾸준히 풀었으니까 희승이 누나처럼 나중에 서울대 갈 수 있을 거야.”
미자가 아들의 모자 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졸업 학년이 된 진오의 키는 이제 엄마와 거의 같아서, 미자는 손을 한참이나 뻗어 올려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정동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자 드디어 ‘성문사’의 간판이 보였다. 동트기 전인데도 이미 건물 앞에는 전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와 부모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미자와 진오도 긴 줄의 자기 차례를 기다려 출판사 직원에게 현금을 건넸다. 직원은 돈을 받자마자 알록달록한 천 가방에 담긴 문제집을 무성의하게 툭 던졌다. 얼마나 오래 줄을 섰는지 이미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온 뒤였다.
천 가방은 아이들 신발주머니로 써도 때 탄 자국이 여간해선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요란했지만, 막상 문제집 디자인은 심심할 정도로 잔잔했다. 투박한 베이지색 마분지로 만든 표지엔 선전포고를 하듯 검은색 궁서체로 ‘문제은행’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고, 표지를 넘기면 갱지에 검은 잉크로 인쇄한 고난도의 문제가 한 면에 10문제씩 세로 열을 맞춰 끝없이 펼쳐쳤다. 초등학생의 흥미 유발을 위한 화려한 디자인이나 자질구레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단조로움으로만 비교하면 중고등학생이 주로 보는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에 비교해도 크게 밀릴 것이 없을 정도였다.
“작은누나도 문제은행 풀었어?”
엄마보다 팔 힘이 세진 진오가 천 가방을 들고, 왔던 길을 돌아가며 물었다.
“진원이는 성격이 황소고집이라 사다 줘도 아예 손도 안 댔어. 입 꾹 다 물고 아무 말도 안 하기 시작하면 정말로 못 말린다니까. 결국엔 엄마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애저녁에 빨간펜부터 시켰잖니.”
누나들이 ‘문제은행’을 제대로 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확인하며 진오는 일종의 우월감을 느꼈다. 동 나이대에 누나들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실에서 학년이 올라가며 학업성적이 좋을 거란 자신감도 얻었다.
모자는 아까 내렸던 경희궁 앞 정류장에서 타고 왔던 번호의 버스를 다시 탔다. 광화문에서 회차하여 마포와 신촌을 거쳐 다시 화곡동으로 가는 편도 한 시간짜리 노선이었다. 추위와 고단함에 지친 그들은 버스를 타자마자 히터의 온기에 고개를 숙이고 정신없이 졸았다. 그러면서도 진오는 덜컹대는 버스 안에서 혹여 천 가방을 놓칠까 봐, 손잡이를 자신의 손에 두어 번 단단하게 돌려 매었다.
공주맨션을 사고 찾아왔던 집안의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수능을 망친 진현의 재수가 결정되자, 부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듯 다시 큰소리로 싸웠다. 미자는 공부 못하는 학교에서 반 1, 2등을 해봐야 다 소용없다며 하루빨리 목동으로 이사를 갔어야 했다고 애꿎은 남편을 힐난했고, 태평은 중요한 시기에 엄마가 빵집을 하느라 집을 비워 아이들 교육의 중심을 못 잡았다고 역으로 비난했다. 그렇게 한참 싸우다가는 어김없이 돈 이야기나 시댁 문제로 확전에 확전을 거듭했다.
대학은 못 갔어도 어쨌거나 스무 살, 성인이 된 진현은 도통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공부하러 노량진 재수학원에 간다고 자연스레 내뺐지만 사실 어디를 가는지 누구도 알 길은 없었다. 그 사이, 아무런 죄도 없는 동생들은 진현의 재수로 촉발된 부모의 싸움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언니 잘못이 뭔지 알아?”
진원이 동생에게 물었다. 거실에서 또 한바탕 시작한 부모를 피해 방으로 막 도망친 참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수능 망친 거?”
동생의 대답에 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아빠가 기대하게 한 거. 멋모르고 기대한 사람보다 이뤄 줄 수도 없으면서 기대하게 한 사람이 진짜 잘못이야. 너도 잘 생각해. 진짜 피 터지게 공부해서 나중에 서울대 가든지, 아님 빨리 적당히 포기 시킬 방법을 찾든지.”
“누나는 어떻게 할건데?”
“나는 빨간펜 풀었잖아.”
진원은 언니의 선례를 보며 이뤄 줄 수 없는 부모의 기대는 빨리 꺾어 버리는 게 우월전략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모의 마음대로 설계한 ‘잘해야 본전’인 게임을 ‘못해야 본전’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진오는 달랐다. 빵집 한구석에서 들었던 엄마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고, 당연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대를 가는 꿈, 고시를 붙어 성공하는 꿈, 마침내 훌륭한 인물이 되어 가풍 있는 집안을 만드는 꿈. ‘뿌리-줄기-꽃’ 3단계 이론은 어린 진오의 마음에도 깊이 싹을 내린지 오래였다.
조합장의 예상은 빠르게 현실화되었다. 새 천년이 오기도 전에 서울 아파트값은 IMF사태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자연히 사업성이 제고된 재건축 현장의 진행속도는 빨라졌다. 공주맨션은 IMF 전에 이미 조합설립을 하고 K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에서 사업시행인가만 받으면 바로 착공할 수 있었다. 조합장은 진행속도를 높이고자 시공사 선정 당시 계획도서를 바탕으로 사업시행인가 신청을 서둘렀다.
하지만 조합 내부에선 이견이 터져 나왔다. IMF로 재건축 진행이 멈춘 사이 조합원 중 1/3 가량이 손바꿈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공사 선정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원주민들은 하염없이 밀린 재건축 시간표에 지쳐 있었다. 고령의 원주민에게 새 아파트에 들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민주적 절차나 아파트의 완성도보다 훨씬 중요했다.
시공사 선정을 다시 하자는 조합원들은 K건설의 계획도 문제 삼았다. 단지 내 도로가 각 동을 분리하고 있어 아파트가 하나의 단지 같은 느낌을 주지 않고 통행의 제약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시 소유의 단지 내 도로를 단지 외곽의 조합 소유의 땅과 바꿔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바로 옆의 신동아파트가 천 세대가 넘는 대형 단지로 탈바꿈할 예정인 점과, K건설이 도급 순위 10위 안에 드는 메이저 건설회사가 아니라는 점도 시공사를 재선정하자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결국 해당 안건은 조합의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동시에 이 문제는 K건설의 기존 계획을 가지고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조합장에 대한 재신임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총회는 구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조합원 200여 명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식순을 거쳐 K건설의 황 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소싯적에 운동을 한 사람처럼 몸이 다부져 보였는데, 주말인데도 현장에서 바로 온 듯 회사의 회색 작업복을 양복 위에 걸친 상태였다.
“K건설이 여러분들께 확고한 믿음을 드렸어야 하는데, 결국 이런 자리까지 모시게 되어 거듭 송구한 말씀드립니다.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성건설이 오든, 현대건설이 오든 지금 공주맨션 자리에서는 단지 내 도로와 외각 땅을 바꿔 하나의 커다란 단지로 짓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기술적인 문제도 좀 있는데 그건 복잡한 이야기니 제외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외각 땅을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면 단지 내 도로를 반대로 시에서 수용해야 하는데, 입찰 당시 서울시에 문의해 보니 1:1 등가교환이 아니라 최소한 단지 내 도로보다 2배는 더 단지 외각 땅을 내놓아야 한답니다. 종상향 없이 주어진 용적률률로는 현재 계획된 5백 세대가 아니라 4백 세대 밖에 짓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서울시에서 내년부터 조례를 만들어서, 용적률을 일괄 하향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일이 늦어지고 기부채납하면서 일반 분양 물량이 줄어들면 다들 아시죠? 네, 맞습니다. 조합원 분담금이 그만큼 증가합니다. 저희가 계산을 해보니 세대 당 최소한 5천만 원 이상을 지금보다 더 부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5천만 원이라는 숫자에 장내는 술렁거렸다. 황 부장은 곧바로 당근을 던졌다.
“조합원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K건설도 공주맨션을 절대로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시중 은행을 싹 돌아다녔습니다. 전세 놓으신 분들은 전세금 빼주셔야 하고, 직접 거주하시는 분들은 임시적으로 살 집 구하셔야 하죠? 이주지원금. 나눠드린 책자 뒤편에 보시면 K건설 주거래 은행과 연계해서 아주 넉넉하게 책정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주변에서 전세를 구하고도 남는 돈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K건설을 한 번 믿어주시면 저희는 최선의 노력으로 목동 최고의 아파트를 짓겠습니다.”
짝 짝 짝짝 짝짝짝짝-. 처음에는 작게 시작한 박수가 삽시간에 강당을 휘감았다. 마이크를 놓고 자리로 돌아온 황 부장에게 조합장은 귀엣말을 건네며 친근감을 표현했다. 그리고는 연단에 올랐다.
“일부 조합원 여러분들이 우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압니다. 속된 말로 K건설이 시공 과정에서 개판 치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조합원분들의 의결을 통해 지분제에서 도급제로 계약 방식을 바꾸려고 합니다. 도급제란 무엇이냐. 사업으로 발생한 이익금 전액과 결정권을 조합에서 갖는 계약 방식입니다. K건설은 조합이 시키는 대로 공사를 하고, 계약한 금액만 받아 가면 되고요. K건설은 지분제를 더 선호했지만, 요구를 안 들어주면 아예 계약을 해지하자고 반협박을 하다시피하여 도급제로 계약 방식을 바꾸는데 동의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이 추인해 주신다면, 그리고 우리 조합과 K건설에 힘을 모아주신다면 저는 명품 아파트 건설에 밀알이 되겠습니다!”
조합장의 말이 끝나자 강당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 순간, 박수를 뚫고 한 남자가 손을 들며 외쳤다.
“도급제로 했다가 미분양이 나면 조합원 분담금이 증가하는데 책임질 수 있어요? 조합 능력이 유능해야 건설사를 잘 컨트롤하죠. 무능하면 오히려 건설사에 질질 끌려다닐 수도 있습니다. 도급제가 꼭 좋은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애초에 계약 방식 변경은 오늘 총회 안건도 아니잖아요! 이런 식으로 날치기하지 마세요!”
몇몇 사람이 ‘옳소!’를 외쳤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냉소에 가까웠다. 이어진 투표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K건설을 시공자로 사업시행인가를 신청하기로 했고, 조합장이 주도한 도급제로의 계약 방식 변경을 추인했다.
미자 역시 총회에 오기 전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긴가민가 했으나, K건설이 제시한 넉넉한 이주지원금에 마음을 굳혔다. 세입자 전세금을 빼주고 당장 계약금과 분담금을 납부해야 하는 입장에선 한 푼이 아쉬웠다. 더욱이 진오가 고등학교 가기 전에 아파트 입주를 원했기 때문에 신속한 사업 추진에 더 마음이 끌렸다.
총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강당을 하나둘씩 떠나는데, 한구석에서 노인이 삿대질을 하며 고성을 질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젊은 놈들이 IMF 때 아파트 싸게 사서 남겨 먹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돈에 눈이 시뻘겋게 멀어가지고서는 건설사를 바꾸니 뭐니! 열심히 노력하는 조합장을 그렇게 비하하고 말이야! 여기서 30년씩 산 사람들도 가만히 있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버르장머리들인지 원.”
“말씀 삼가세요! 어디서 굴러먹었다니요! 다 똑같은 조합원 아닙니까. 도급제로 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새로 들어온 조합원들은 저 복덕방 아저씨를 조합장으로 뽑은 적도 없고, K건설을 시행사로 선택한 적도 없어요!”
노인이 삿대질을 하고 있는 상대는 조합장에게 손을 들고 이의를 제기했던 남자였다. 그가 지지 않고 맞서자, 격노한 노인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허공에 휘두르며 남자를 가격하려는 모션을 취했다. 연단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조합장은 한달음에 달려와 노인을 말렸다. 노인이 어느 정도 진정하자 조합장은 남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는 경찰을 부르겠다는 남자를 어르고 달래며, 새로 들어온 조합원들의 우려를 충분히 헤아리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맨션 앞에서 작은 부동산을 운영하던 그가 어떻게 조합장 자리까지 꿰찼는지 모두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새 천년이 되고 이뤄진 첫 서울시 동시분양에 공주맨션은 이름을 올렸다. 결과는 미분양 없는 완판이었다. IMF 사태로 인해 예기치 않은 하락장에 굶주려 있던 시장의 폭발력은 가공할 만했다. 도급제를 선택한 조합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10% 정도의 미분양을 가정하고 산정한 조합원 분담금은 일반분양의 완판에 따라 결과적으로 그만큼 줄어들었다. 지분제로 했다면 그 차액은 고스란히 K건설의 몫이 되었을 터라, 영리한 조합장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