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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도화 Oct 15. 2023

어차피 뿌리에 따라서 꽃은 결정된 거잖아

#19

화곡동 상인회 모임. 미자는 빵집을 그만두고도 꼬박꼬박 회비를 내고 모임에 참석했다. 곗돈을 일찍 수령한 탓이었지만, 참석의 이유가 꼭 돈 때문은 아니었다. 동네의 정보가 많아 유용했고 사회의 일원으로 어딘가 속해 있다는 감각도 좋았다.


 “그래서 몇 층에 당첨된 겨?”


 미자를 축하하며 간판 집 아저씨가 물었다. ‘부부 빵집’의 간판을 직접 제작하고, 철거한 오랜 인연이었다.


 “15층이요. 최상층이라 좀 아쉬워요. 10층 정도 되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나중에 결로 좀 신경 써야겠구먼. 그래도 최상층이 1층보다는 낫지. 분양가는 기준층보다 좀 쌌겠네?”


 “아니요. 평수가 다 똑같다고 최상층도 비슷하더라고요.”


 “이상하다. 최상층은 베란다 확장이 안 돼서 건설사에서 분양가 좀 빼줄 텐데.”


 평소에도 오지랖이 넓은 그는 미자에게 자꾸, 뭔가 이상하니 정확하게 알아보라 권했다. 미자가 방법을 묻자 그는 명함 하나를 꺼냈다. 동네에서 빌라를 주로 짓는 건축사 명함이었는데, 아파트 도면을 구해오면 그를 통해 조언을 해주겠다며 나섰다.


 미자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합장에게 세대 도면을 요구하자, 그는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 도면 공개는 조합 이사회 의결이 필요하다고 했다가, 미자가 이사회 안건으로 올려달라 요구하자 다시 말을 바꿨다. 조합에는 착공 도면이 없어 K건설에 요구해야 하는데,  협조가 잘되지 않는다고 오히려 하소연만 늘어놓았다.


 미자는 답답한 마음에 직접 현장 사무소를 찾았다. 위치는 조합 사무실이 있던 삼거리 시장 바로 앞이었다. 현장소장이 된 K건설의 황 부장을 만나 세대 도면을 요구했지만 일개 조합원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대단히 고압적이었다.


 “어느 건설사나 도면은 영업 비밀입니다. 막말로 선생님이 이거 다른 건설사에 가져다 파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조합을 통해 말씀을 하셔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조합원들이 한 분씩 찾아와서 괴롭히시면 명품 아파트 건설에 큰 차질이 있지 않겠습니까.”


 조합장과 황 부장이 도면 공개를 두고 핑퐁을 치자 미자는 분통이 터졌다. 조합원이 자기 집 도면을 볼 권리가 없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태평은 이쯤 되자 도면을 봐도 우리가 뭘 알겠냐며 관심을 끄자고 했다. 하지만 미자는 분명 뭔가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원래 끈기는, 태평보다 미자의 전공이었다.


 일은 의외의 방향에서 풀렸다. 간판 집 아저씨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는 구청을 통해 도면을 받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줬다. 구청은 사업을 인가할 때 건설사에서 도면을 받아 가지고 있으니, 자기 집 도면을 보겠다고 신청하면 열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자는 그 길로 구청에 찾아가 한구석에 비치된 ‘정보공개청구서’를 성의껏 작성했다.


 창구의 젊은 공무원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청구서에 채워야 하는 내용이 빠져 있다는 이유로 면박에 가깝게 신경질을 내며 접수를 몇 번씩이나 반려했다. 자세히 가르쳐 주거나, 알아듣기 쉽게 한 번에 안내하는 법은 당연히 없었다. 비록 한나절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미자는 그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비위를 맞춰가며 청구서를 접수했다. 결과는 한 달쯤 후에 나온다고 했으나, 보름쯤 지나자 구청에서 보낸 세대 도면 사본이 떡하니 우편으로 도착했다.


 “도로 사선제한에 걸려서 최상층은 발코니가 아니라 베란다로 계획되어 있네요. 여긴 다른 층처럼 발코니 확장이 안 돼요. 샌드위치 패널 붙여서 지붕 만드는 게 최선인데, 그렇게 해도 춥고 결로 생겨서 골치 아프죠. 보통 최상층은 건설사에서 분양가를 좀 빼주는 게 이런 이유거든요. K건설에서 이런 말 안 해줬어요? 진짜 나쁜 놈들이네.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간판 집에서 만난 건축사는 도면을 슥 보고 핵심을 파악했다. 간판 집 아저씨는 내가 뭐라고 했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자는 화가 나는 마음에 그 길로 조합장을 찾아갈까 하다, 힘을 더 모으기로 했다. 같은 처지의 최상층은 10세대. 미자가 일일이 연락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모두 아연실색했다.


 미자는 10세대의 위임을 받아 최상층 대표로 조합장을 찾아갔다. 조합장에게 K건설을 상대로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보상 방안을 논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조합은 전체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거든. 500세대 중에 겨우 10세대 일을 가지고 조합이 나서면 나머지 조합원들이 곱게 안 본단 말이요. 만에 하나 최상층만 분양가를 깎아주거나 보상을 해주면 다른 세대들은 간접적으로 손해 본다고 생각할 텐데. 그렇게 되면 조합이 중간에서 아주 곤란해져.”


 조합장의 전략은 확실했다. 일부 세대의 요구에는 조합의 일이 아니라며 회피했고, 전체 세대와 관련된 요구는 조합 이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절차를 핑계로 일을 미적댔다. 게다가 어렵사리 이사회에 상정되어도 소용없었다. 이사회 구성은 조합장과 친분이 두터운 원주민들 위주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요구는 부결되었다. 그러다 보니 도급제 사업장임에도 조합 명의로 K건설에 요구하는 사항은 극히 드물었다. 분양 등으로 새로 유입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조합장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조합이 나서지 않으니 미자는 K건설을 직접 상대했다. 아는 부동산을 통해 주변 재건축 아파트의 최상층 분양가를 찾고, K건설이 분양 시 제시한 책자 등을 모으며 자료를 준비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미자는 태평을 데리고 현장사무소를 찾았다. 태평은 내가 가서 할 일이 뭐가 있냐며 쭈뼛쭈뼛 되었지만 아내의 성화에 마지못해 길을 따라 나섰다.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문 쪽에는 미자와 태평, 벽 쪽에는 황 부장이 마주 앉았다. 미자는 준비한 자료를 들이대며 항의했다. 다른 건설사는 사선제한이 걸린 최상층의 경우 해당 사실을 미리 고지하고 기준층보다 10퍼센트가량 싸게 분양했다며 대책을 요구했다. 황 부장은 심드렁했다. 한 쪽으로 다리를 꼰 상태로 배 위에 팔짱을 껴 올렸다.


 “어차피 발코니 확장은 다 불법이고요. 전용면적이나 공급면적에 포함되지도 않아요. 발코니든 베란다든 서비스 면적 차이에 불과한데, 그걸 가지고 왜 똑같이 분양가를 책정했냐고 따져봐야 소용없다고요. 그리고 제발 좀 조합 통해서 말씀하시라고요, 정말 피곤해 죽겠네.”


 그 순간, 태평이 긴 책상 위로 잽싸게 올라가더니 황 부장을 향해 발길질을 할 것처럼 다리를 내뻗었다. 미자와 황 부장이 ‘엇!’ 하는 사이 원형의 궤적을 그린 그의 오른발은 황 부장의 눈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황 부장은 아연실색을 하며 다리를 꼰 채로 팔을 휘두르다 의자에서 거의 넘어질 뻔했다.


 “너, 이 새끼. 건방지게 자세가 이게 뭐야. 다리 안 풀어?”


 황 부장은 그 이후 미자와 태평을 만나 주지 않았다. 미자는 태평에게 가만히나 있지 왜 나서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드냐고 타박을 했고, 태평은 그런 놈들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놈들이니 본때를 보여 준 거라며 항변했다.


 K건설과 미자 사이의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몇 번이나 내용증명을 주고받던 어느 날, 미자의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 황 부장 밑에서 일하는 유 대리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미자가 봉투 안을 보자 천만 원짜리 수표 2장이 보였다.


 “이 정도 받고 마무리하시죠. 대신 다른 분들에겐 비밀입니다.”


 미자는 노발대발하며 그를 쫓아냈다. 그녀는 즉시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K건설이 돈으로 조합원을 회유한다는 소문이 돌자 조합에서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K건설과 미자는 최상층 10세대에게 오븐과 빌트인 냉장고 등을 현물 보상하고 취등록세를 일부 지원하는 선에서 합의했다. 미자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녀는 이제 조합원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조합장의 뭉개기와 K건설의 막무가내식 버티기를 뚫어내고 실질적인 보상을 이끌어 낸 건 미자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K건설의 수표를 마다한 행동도 사람들의 호감을 자아냈다. 증거가 없어 아무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조합장이 K건설로부터 금품을 받았을 거라 의심했다.






 진현은 재수 끝에 서울 시내에 있는 중위권 4년제 사립대학에 합격했다. 태평과 미자는 못내 아쉬웠다. 미자는 맏딸이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해서, 태평은 학비가 저렴한 교대나 국공립대학을 두고 사립대학에 가서 아쉬웠다. 대학생이 되자 진현은 집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날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난 큰누나에게 진오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누나, 대학 가니까 뭐가 제일 좋아?”


 “과외든 알바든 내 맘대로 돈 벌 수 있어서 좋아. 엄마가 아직도 너네한테 용돈 안 주지? 목동에 아파트를 사면 뭐해. 애들은 거지같이 키우면서. 하긴, 진짜 목동 아파트도 아니지만.”


 중학생이 된 진오도 누나들이 그랬듯 용돈이 절실했다. 로데오 거리에 가서 게스 청바지도 사고 싶었고, 소니의 시디플레이어도 탐났다. 무엇보다 학원에서 만나는 목동 아이들과 어울리려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정도 사 먹을 돈은 있어야 했다.


 돈이 필요할 때 말하라는 미자의 말은 공허했다. 진오가 이런저런 이유로 용돈이 필요하다 어렵게 말을 꺼내도, 엄마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제집 살 돈이나 학교에 낼 회비 등을 부풀려 용돈을 충당했지만, 그 정도로는 늘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누나라고, 진현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돈 필요할 때 쓰라며 동생에게 건넸다.


 “누나, 근데 나 서울대 갈 수 있을까?”


 “열심히 하면? 그건 벌써 왜 물어?”


 “엄마는 맨날 서울대 가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아는 사람 중엔 서울대 간 사람도 없고, 얼마나 잘해야 가는지도 모르겠고. 좀 막막해서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일가친척 중에 제대로 된 대학을 간 게 아마 내가 처음일 걸. 무조건 좋은 대학만 가라고 하는데, 나도 뭐가 와닿아야지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엄마가 너보고 맨날 서울대 타령하는 건 욕심이라고 볼 수 있지. 그래도 고등학교 가서 공부 잘하고 수능도 잘 보면 서울대 갈 수도 있어.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누나의 말에 진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없는 집 자식이 공부 잘해서 서울대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기도 해. 계급은 고착화되고 역전의 사다리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동생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진현은 눈높이 설명을 시도했다.


 “엄마가 맨날 말하는 뿌리-줄기-꽃 이론 알지?”


 누나의 질문에 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빠가 뿌리를 내리면, 우리가 줄기나 꽃이 되라는 말인데. 어차피 뿌리에 따라서 꽃은 결정된 거잖아. 서울대를 간다고 안개꽃 심은 데서 장미꽃이 피나?”


 누나의 말에 진오는 의기소침했다. 겨우 중학생인 막냇동생에게 하기엔 잔인한 말이었단 생각이 들었는지, 진현은 얼른 수습을 시도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네가 엄마 아빠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고 마음에도 없는 응원을 했다. 반대로 진오는 누나가 재수까지 했으면서도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용돈을 받은 터라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외출에서 돌아온 미자였다. 큰딸을 보자마자 집에 일찍 좀 들어오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나갈 준비를 위해 얼른 화장실로 대피했다.


 진오는 누나와의 대화가 잔상에 남았는지 대뜸 미자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용돈 좀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얼마를 주든 맞춰 써 보겠다, 꼭 필요한 데만 아껴 쓰겠다고 아무도 묻지 않은 다짐을 늘어놓았다. 미자의 대답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용돈을 받는 데로 족족 써버리고, 결국 다시 손을 벌릴 거라고 단언했다. 누나들에게 그간 적용한 ‘무용돈 원칙’이 진오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어떻게 이 집 사람들은 나만 보면 노인네부터 애들까지 돈만 달라 그러니. 내가 아주 돈이 많아 보이나 봐. 그냥 날 가져다 팔아라, 팔아.”


 미자가 언성을 높였다. 엄마의 말이 그만하라는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진오도 이번엔 결론을 보고 싶었다.


 “우리 집에서 제일 돈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 아니야? 맨날 돈돈돈 거리는 건 엄마 같은데.”


 미자는 외출용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와 동전을 긁어모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진오를 향해 던졌다. 동전이 거실 바닥에 쨍그랑 부딪히는 소리가 팝콘 터지는 소리 같았다.


 “다 가져! 이거 다 가져가서 어디 한 번 네 맘대로 써 봐!!”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던 진현이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진오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뒹구는 지폐와 동전을 바라보았다. 동전은 소파와 냉장고 아래의 틈까지 굴러갔다. 마침 1층에 있던 할머니도 큰소리에 놀라 한달음에 올라왔다. 진현은 진오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고, 할머니는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지폐와 동전을 정리했다. 미자는 시어머니가 보이자 일부러 들으라는 듯 떠나가라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의 역린은 돈이야. 돈 문제 앞에선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이라니까. 자식이라고 뭐 다르겠니. 우리가 태어난 뿌리가 결국 이런 거야. 별 수 없으니까 용돈 포기하고 공부나 열심히 해.”


 진현이 동생을 달랬다. 진오는 누나 앞에서 부끄럽게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아 제 방으로 얼른 돌아갔다. 오히려 혼자 있으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까 내가 준 돈 있지? 피시방이라도 가서 기분전환이라도 해.”


 진현이 집을 나서며 말했다. 진오는 방안의 시계를 보았다. 수학 학원에 갈 시간이었다. 목동으로 가는 학원 셔틀을 타려면 곧 집을 나서야 했다. 책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서는데 아직,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학원에 가냐며 진오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여 주었다. 진오는 그  돈이, 엄마가 던진 돈인지 아니면 할머니가 주시는 돈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저 감사하다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얼른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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