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조합원은 총 500세대. 그중 150세대는 원주민, 350세대는 분양 등으로 새로 유입된 조합원. 숫자만 보면 새로 유입된 조합원들의 세가 강할 것 같았지만, 조합의 의사 결정은 조합장을 중심으로 한 원주민들의 의견대로 돌아갔다. 새로 유입된 조합원들은 대부분 조합의 일에 무신경했고, 설사 의견이 있더라도 그를 한데 모을 구심점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입주를 1년여 앞두고 아파트 골조 공사가 완료되었을 무렵, K건설은 아파트 브랜드명을 ‘K아파트’에서 ‘K스위트팰리스’로 변경하였다. 새 천년을 맞아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주택단지를 선도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드러낸 이름이라 했지만, 시공 능력 수위 업체가 시작한 외래어 아파트 이름 짓기 유행에 편승한 전형적인 후발자의 행태였다. 그래도 조합원들은 K건설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파트 이름만 바꿔도 집값이 자동으로 오를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외벽 공사나 단지 내 공사가 이제 막 시작할 참이었고, 조합이 주도권을 갖는 도급제 현장 특성상 조합원들은 새 브랜드가 당연히 적용될 거라 믿었다.
기대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황 부장은 분양 당시 입주자 모집공고에 의거하여 목동공주맨션 재건축사업의 이름은 기존의 브랜드를 적용한 ‘목동 K아파트’라고 못 박았다. 조합장의 태도도 여전했다. 조합 내부의 이사회 의결 등을 핑계로 일을 미적댔다.
지금까지와 다른 건 조합원들의 태도였다. 구(舊) 브랜드냐, 신(新) 브랜드냐에 따라 억대의 시세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조합장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를 끌어내리고 K건설과 직접 협상을 진행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의견도 무르익었다. 심지어는 일부 원주민들조차 비대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문제는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였다. 비대위원장은 조합장과 달리 월급이나 활동비가 없다 보니 생계나 가사를 핑계로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자는 초조했다. 이제 막 시작된 외벽 마감공사가 끝나면 일은 되돌리기 어려워 보였다. 고심 끝에 미자는 비대위원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감 나무 밑에서 가만히 입을 벌리고 요행을 바라기보단, 나무를 있는 힘껏 차 보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집에 있던 아줌마가 뭘 안다고 갑자기 비대위원장을 맡아서 건설사랑 일을 하냐고! 다른 사람들이 바보라서 안 한다고 하겠어. 잘 되어봐야 본전이고 잘 못 되면 조합장이 욕먹는 것처럼 우리가 그 욕 다 뒤집어쓸 텐데, 동네에서 얼굴 들고 살 수 있겠냐고. 지난번에 보상 좀 받아냈다고 뭐나 된 것처럼 자꾸만 허영심이 드는 모양인데,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 집에 가만히 좀 있으면 어디가 덧나?”
태평의 반대는 이번에도 거셌다. 그는 일이 잘되지 않았을 경우에 감당해야 할 사람들의 비난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미자는 늘 그랬듯 남편이 말린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응, 덧나. 어머님이 속 긁는 소리하고, 당신이 그 월급 가지고 유세 떠는 거 보면 정말 우습지도 않거든. 그리고 말은 제대로 하자. 나, 집에만 있던 아줌마 아니야. 내가 당신 말 잘 듣고 정말로 집에만 있었으면 우리 가족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도 이제 내 뒷다리 그만 잡아. 남자가 뭐가 그렇게 무서운 게 많아.”
미자를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지자 조합장의 비위에 대한 신고가 쏟아졌다. 조합의 이사들은 제일 먼저 나서 의혹을 뒷받침할 주요 증언을 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조합장의 거수기 역할을 했으나, 조합장이 황 부장에게 받는 돈을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 ‘떡값’ 형태로 선심 쓰듯 던지는데 불만이 컸다. 조합장만큼 많이 먹지도 못했는데, 난파선에서 같이 몰락할 이유가 없었다.
증언에 의하면 황 부장과 조합장은 오래된 사이였다. IMF 사태 이전 시공사 선정 과정부터 조합장은 황 부장에게 주기적으로 돈과 향응을 제공받았고, 조합의 돈에도 일부 손을 댔다. 심지어 그간 ‘공주 부동산’의 월세를 조합의 돈으로 냈다는 의혹도 있을 정도였다. 비대위에서는 조합장을 경찰에 고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으나, 미자의 생각은 달랐다. 법적 절차를 다 밟기엔 공사 속도는 무섭게 빨랐고 주어진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그녀의 목표는 애초에 ‘K스위트팰리스’의 쟁취였지, 권선징악이 아니었다. 미자는 조합장을 찾아갔다. 빵집을 그만두고 처음 삼거리 시장 앞 회색 간이 컨테이너 박스의 조합 사무실을 찾아가던 날처럼, 괜히 마음이 설렜다.
“비대위가 가진 자료만으로도 고소고발이 가능하고, 조합에 대한 회계감사를 받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조합장님 벌준다고 우리가 얻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동안 아파트 외벽하고 조경 공사는 다 끝나버릴 텐데. 솔직히 K건설만 좋은 일이죠.”
“이번에도 내가 도와 줄 일이 남았는가?”
“어차피 황 부장하고 일하기는 글렀고, K건설 본부의 황 부장 윗선을 소개해 주세요.”
조합장은 최후 변론을 하듯 말했다.
“막내아들이 아직 중학생이라고 했지? 그때 시공사 선정을 다시 했으면 기부채납이니 뭐니, 장밋빛 미래를 파는 헛바람 든 놈들만 잔뜩 들러붙어서 아마 그 녀석이 대학 갈 때까지 공사 착공도 못했을 거야. 옆에 신동 아파트는 파리떼들이 들러붙어서 아직도 지지부진하지 않나. 따지고 보면 내가 중간에서 욕을 좀 먹더라도 사람들 이기심을 억눌러가면서 시간을 벌어다 준 거라고. 어디 자네의 시간만 벌어줬겠는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새 아파트 보기 전엔 눈도 못 감겠다는 노인네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런데 완공을 앞에 두니까 이제 와서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내게 죄를 묻겠다니, 이게 가당하냐는 말이야.”
그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어 미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장은 주섬주섬 업무수첩을 뒤져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자네는 이번 일이 끝나면 거기서 그만두게. 굶주린 군중은 늘 팔짱을 끼고 거대한 솥에 물을 팔팔 끓이면서 사냥개를 기다리고 있거든. 아무리 유능한 개라도 초원의 토끼를 다 잡는 순간, 군중들은 목을 틀어쥐고 팔팔 끓는 솥에 사냥개의 머리부터 집어넣을 걸세.”
K건설의 본사는 테헤란로에 있었다. 화곡동에서 강남까지는 5호선과 2호선을 갈아타며 1시간도 넘게 걸리는 거리. 미자는 새로 산 구두를 신고 내내 지하철에 서 있던 터라, 본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발이 퉁퉁 부었다. 미자는 선릉역에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하철역 근처라고 했는데, 족히 30층은 되어 보이는 오피스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10차선 대로변을 가득 채운 탓에 허공을 바라보며 K건설의 이름을 한참이나 찾아야 했다. 약속 시간에 늦을세라 허둥지둥이었다.
어렵게 도착한 1층 입구에선 단정한 투피스와 하이힐을 신은 비서가 친절한 목소리로 미자에게 선약이 있냐고 물었다. 미자는 조합장에게 받은 명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김 상무의 이름을 댔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김 상무의 방은 무역 센터와 탄천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과 채광이 좋았다. 그는 황 부장과 달리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였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 금테 안경, 슬림한 몸매에 얹은 질 좋은 원단의 네이비 양복이 그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했다.
미자는 미팅에서 입을 만한 옷을 옷장에서 뒤졌지만, 그런 옷이 그녀에게 있을 리 없었다. 정장을 사기 위해 백화점까지 가서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골라 한참을 집었다 놓았다 했지만, 진오의 몇 달 치 학원비에 맞먹는 가격표 앞에 결국 시장통 보세 옷 가게에서 최대한 점잖은 옷을 골랐다. 하지만 미자는 김 상무를 만나고는 백화점 옷을 사지 않은 걸 후회했다. 옷차림 때문인지 몰라도 자꾸만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자와 김 상무의 이해관계는 대체로 일치했다. 김 상무는 야심 차게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한 K건설이 소송 등과 엮여 언론에 부정적으로 보도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미자는 일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 대신 ‘K스위트팰리스’를 목동공주맨션 재건축 사업에 적용하기를 희망했다.
“좋습니다. 대신 브랜드를 변경하면 아무래도 조경과 외벽 공사에 비용이 더 소요됩니다. 도급제로 계약을 했으니, 그에 따른 추가 비용은 조합원들이 부담해야 하고요.”
김 상무의 말에 미자는 분담금을 올려야 하냐고 되물었으나, 그는 그렇게 해서 일이 언제 끝나겠냐며 대안을 제시했다.
“조합이 가진 보류지가 있을 겁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선분양을 하지 않고 남겨 놓은 물량. 보통 1퍼센트 정도니까 500세대면, 5세대 정도. 보류지 소유권을 K건설로 넘기시지요. 이번 겨울이 지나면 바로 입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합과 달리 비대위는 이사회나 총회라는 절차가 없어 위원장인 미자에게 전권이 위임되어 있었다. 미자는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상기하고는 보류지의 소유권을 넘기는데 바로 동의했다. 그들은 황 부장과 조합장의 거취도 논의했다. 김 상무는 공식적으로 K건설은 황 부장의 비위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에 대한 내부 감사에 착수하여 결과에 따라 징계를 내릴 예정이라 했다. 미자는 조합장이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아마도 이 동네에서 더 발붙이고 살기 어렵지 않겠냐는 추측까지 곁들였다. 미팅이 끝나자 하늘이 어느새 어둑해졌다. 감사하다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김 상무가 직접 방문을 열어주며 감사를 표했다.
“솔직히 처음엔 좀 걱정했습니다. 비대위원장이 여성분이라고 하셔서 소리만 지르다가 가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토록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종국엔 합리적인 결론까지 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퇴근 시간 테헤란로는 차도, 사람도 만원이었다. 밝을 때와는 또 다른 거리의 모습에 미자는 지하철역을 찾느라 또 한참을 헤맸다. 2호선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빵집을 그만두고 좀 나아진 종아리의 핏줄이 다시 새파랗게 터지는 느낌이었다.
교대나 사당 같은 환승역을 지날 때마다, 열차에는 사람이 빠지기는커녕 더더욱 밀려들었다. 다시 5호선을 갈아타고 집에 가는 여정은 아득했고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머리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미자는, 태평의 시간이 생각났다. 매일 저녁 지옥철을 뚫고 퇴근을 하자마자 가게로 달려와 셔터를 내릴 때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버티던 그의 5년을.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나, 미자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내가 더 힘들다며 악다구니를 쓴 기억밖에 없었다.
입주를 몇 개월 앞두고 ‘목동 K스위트팰리스’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감도와 비교했을 때 별로 달라진 점은 없었지만 어쨌든 변경된 브랜드가 적용된 건 멀리서 봐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에선 미자에게 입주 후 동 대표나 부녀회장 출마를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솥에 물이 끓기 전에 군중의 시야에서 우아하게 사라지는 법을 택했다.
대신 그녀의 눈엔 ‘공주 부동산’이 사라진 무주공산이 보였다. 조합장이 차지했던 지대는 그대로인데, 그걸 받아먹을 사람만 없는 형국이었다. 미자는 바로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웬일인지 태평은 회사에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며 아내의 생각에 처음으로 찬성 표를 던졌다. ‘부부 빵집’에 이어 ‘부부 부동산’으로 이름을 짓자고 태평이 눙을 치자, 부부부가 세 번 겹쳐 어색하다며 미자가 웃었다. 시험은 아직 붙지도 않았는데 마음만은 벌써 간판 집 사장님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