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김 국장은 퇴직을 신청했다. 퇴직 후엔 연봉 2억, 임기 3년의 산하기관 사무총장 자리로 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본인의 개인기로 얻었는지, 인사과 차원에서 그를 소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좋은 조건의 낙하산임은 분명했다. 승진한 정 국장은 바로 교육 연수를 떠났다. 과천에 있는 공무원교육원에서 일 년 정도 푹 쉴 계획이라고 했다. 도 서기관은 허 주무관의 말처럼 인사계장으로 발령이 났다. 인사 마피아가 드디어 진용을 제대로 갖췄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그녀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이 채웠다. 관료제는 결코 공백을 허락하지 않았다. 진오는 자리에 남기로 결정했다. 허 주무관의 의견을 따른 건 아니었다. 오로지 본인의 선택이었다. 새로 온 국과장은 총괄 사무관인 진오에게 일의 맥락을 아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라고 독려했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요한 순간이 되면 업무의 숙련도나 연속성을 존중하기보단 상사의 권위에 기댈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면 평가를 잘 받으려면 점심시간을 부단히 활용하라는 허 주무관의 조언을 진오는 그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승진에서 미끄러진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홀로 조용히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청사 인근의 호수 공원을 30분가량 산책하는 일이 억지 대화로 구겨 넣는 점심시간보다 훨씬 좋았으니까. 가끔 혼자 밥을 먹는 진오를 연민과 조롱 사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직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 가려는 힘을 줄이면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약화시켜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도 잠시 멈출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었다. 회전무대를 앞으로 세게 미는 건 기구를 타고 있는 본인이 아니라 언제나 구경꾼 형들이었다.
고 서기관은 승진 이후 감사실로 자리를 옮겼다. 직원들의 뒤를 캐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을 발휘해 적당히 봐주는 감사실 업무가 오지랖 넓은 그의 성격과 찰떡궁합인 덕분에, 늘 싱글벙글이었다.
“A 협회에 대해 좀 알아?”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고 서기관이 진오를 따로 호출했다. A 협회는 도 서기관이 최 의원실과 밀어붙여 작년에 출범까지 끝낸 보조금 통합관리단체였다. 최 의원실 보좌진 출신들로 낙하산을 태운 것 까진 그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졌으나, 어찌나 경영이 방만하고 다른 민간단체에게 갑질을 일삼았던지 설립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언론의 입방아에 여러 번 오르내리는 모양이었다. 결국 감사원은 A 협회의 설립 과정과 운영에 대해 실지감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진오에게 A 협회를 둘러싼 사정을 들은 고 서기관은 왠지 모르지만 신이 나서 말했다.
“잘하면 이번에 정 국장하고 도 서기관 둘 다 보낼 수 있겠네. 꼴 보기 싫었는데 잘 됐다.”
감사 대상은 A 협회 설립에 관여한 정 국장, 도 서기관 그리고 진오로 추려졌다. 김 국장은 민간인이 되었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였다. 진오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를 앞두고는 괜히 마음이 콩닥거렸다. 혼나러 교무실에 들어가는 학생처럼 괜히 주눅이 들었다. 다 큰 어른 사이에서도, 신분이 보장되는 공무원 사이에서도 역할 놀이는 언제나 유효했다.
“최 의원실에서 A 협회 만들자는 법안 발의했을 때, 최초에 반대 의견을 내셨죠?”
고개를 숙이고 자료만 훑어보던 감사관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감사 준비가 힘들었던 모양인지 안경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어 더 무서워 보였다.
“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법이라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업무가 변경돼서 이후의 일은 잘 모르고요.”
“업무 변경은 누구의 지시입니까?”
“당시 정 과장님 통해서 김 국장님이 지시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김 국장님에게 들은 건 아니고요.”
정 국장은 감사가 시작되기 전에 진오에게 연락해 당시 작성한 자료를 송부해 달라고 요구했다. 실무선에서 제기한 최초의 반대 의견이 기재되어 있어 감사를 대응하는 데 유용한 자료였다. 자료를 보내면서도 진오는 내심 정 국장이 이 파도를 어떻게 헤쳐 나올지 궁금했다. 그는 진오와 달리 해당 업무 라인에 계속 있으면서 실무를 지휘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이거 다 김 국장이 지시한 겁니다. 반대하던 실무자까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바꿔가면서 지시하는데 과장이 중간에서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안 한다고 버텨봐야 실무자가 국장한테 기안 올리면 그만인데요. 김 국장이 얼마나 치사한지, 자기 말 잘 들은 실무자는 서기관으로 승진시키고 반대하던 실무자는 한참 선임인데도 승진을 누락 시켰다니까요. 제 말이 맞는지 틀린지 감사관님이 인사과에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여기서 할 말은 아니지만 항간에는 그 둘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까지 떠돌 정도라니까요.”
정 국장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희생시켜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퇴직한 김 국장은 애초에 항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직급과는 관계없이 가장 쉬운 상대였다.
김 국장이 자신의 말을 따른 실무자를 발탁 승진시켰다는 프레임은 대단히 강력했다. 공무원 사회에서 승진보다 더한 대가는 없다는 걸 암묵적으로 모두 인정했기 때문이다.
도 서기관은 궁지에 몰렸다. 상급자들이 시켜서 했다기엔 진오가 남긴 최초의 반대 의견과 김 국장에 의한 발탁 승진이라는 결과가 동시에 발목을 잡았다. 그녀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은 소신껏 일을 한 결과에 대해 징계로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적극적으로 일을 하겠냐는 항변밖에 없었다. 물론 감사 기간 내에 손에 잡히는 결과를 원하는 감사관에게 그녀의 추상적인 항변이 유효할 리 없었지만.
감사 결과는 싱거웠다. 도 서기관은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감봉 2개월의 경징계를 받았고 이외에 징계 대상자는 없었다. 그녀는 즉시, 본부 인사계장에서 소속기관으로 좌천되었다. 징계를 받고 본부의 인사 업무를 총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사원은 쉽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자신들에게 감사 권한이 없는 최 의원실의 전현직 보좌관들에 대해서는 수사를 따로 의뢰하지 않고 실무 공무원만 징계를 주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처음부터 A 협회의 설립은 청와대의 컨펌이 있던 사안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감사원 입장에서도 더 이상의 확전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을 주도했던 박 비서관이나 조 보좌관, 그리고 퇴직한 김 국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도 서기관은 판이 깔린 모양을 보며 징계에 대한 이의 제기인 소청심사도 포기했다.
조직 내에서 진오에 대한 평판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감사 이전엔 승진도 제때 하지 못한 무능한 놈이라는 비아냥이 주류였다면, 이후엔 그래도 강단 있는 직원이라는 평가가 더 많아졌다. 다루기가 까탈스럽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였으나 어쨌든 이제 부처 내에서 진오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평판과 인지도란 점심 식사 따위를 열심히 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승진의 계절이 6개월 만에 다시 찾아왔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정년퇴직이 올해 유독 많은 탓이었다. 진오는 바로 발탁 승진 대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추천 총평은 ‘후보자는 소신을 가지고 업무에 전념하는 유능한 공무원이다’로 시작되었다. 그는 도 서기관의 추천 총평을 떠올리고 설핏 웃음이 나왔다. 같은 사안에 대한 조직의 시각이 6개월 만에 정 반대로 뒤집힌 셈이었다.
“사람들은 공무원이 무사안일을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 중앙부처 공무원은 이슈가 생겨야 쉽게 승진을 하거든. 문제가 될 만한 일에 손 더럽힌 사람이 일단 한 번 승진하고, 문제가 터지면 그걸 수습하는 사람이 또 한 번 승진하고. 도 서기관이 이번 일로 징계를 받은 건 안타깝지만 어쨌든 승진을 무른 것도 아니고, 이 사무관도 좀 늦게 승진하긴 했지만 평판과 인지도를 쌓았으니 서로 남는 장사한 거야.”
승진을 축하한다며 진오에게 전화를 건 정 국장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과천에 있는 공무원교육원에선 본인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는지 입이 근질 거리는 모양이었다. 언제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소명의식을 강조하던 그가, 갑자기 승진 타령을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진오는 헷갈렸다. 어쨌든 그 모든 말을 본인 자랑으로 받아들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긴 했다.
“앞으로 어느 국에서 일하고 싶어?”
정 국장의 질문에 진오는 얼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혀를 차며 가벼운 핀잔을 줬다.
“국장님 가는 데서 일하고 싶다고 해야지. 아직도 이런 걸 알려줘야 하나.”
진오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통화 중이라 서로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윗 기수에 다면 평가 잘 받아보겠다고 동기들 욕하고 다닌 선배도 있었잖아. 결국 1년 상간에 다들 승진할 건데 우리는 다른 기수들처럼 동기들끼리 꼴사나운 모습 안 보여서 다행이다. 자, 진오야 축하한다. 건배! 건배!”
진오의 승진을 축하한다며 동기들이 서너 명 모인 자리, 고 서기관이 불콰한 얼굴로 건배사를 했다. 승진도 했으니 좀 좋은 걸 사라는 동기들의 성화에 진오는 방이 따로 있는 참치집을 예약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원래 가게의 종업원이 많지 않은 건지, 지난번에 들어왔던 여 종원업이 서빙을 했다. 여전히 짙은 화장에 치마는 짧았지만 진오를 알아보진 못하는 눈치였다.
“이모, 이거 한 잔 드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고 서기관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소주잔에 감아 건넸다. 그녀는 한 잔을 거침없이 마시고는 자신이 마신 만큼의 소주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젊은 오빠가 어디서 예의를 잘 배웠네. 뭘 더 드리면 되나?”
“제가 오빠 맞아요? 암만 봐도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뭘 더 줄 수 있는데요?”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 앞섬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윗가슴을 고 서기관이 슬쩍 훔쳐보며 말했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동기들은 피부에선 세월이 느껴지는데 몸매 관리는 잘한 것 같다며 칭찬인지, 험담인지, 음식점에 대한 평가인지, 음담패설인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도 묻지 않은 각자의 계획을 말했다. 누군가는 서기관을 달았으니 빨리 과장 보직을 받고 싶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국비 유학을 가서 학위도 따고 아이들 영어 공부도 시키고 싶다고 했다.
진오는 달리기 시합에서 한 바퀴를 전력 질주하여 이제 막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숨을 고를새도 없이 다시 출발선에 선 느낌이었다. 도대체 몇 바퀴를 돌아야 끝나는 시합인지 누군가 알려 줬다면 좋으련만, 애초에 그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나름대로 흥겨운 자리가 끝나고 자리의 주인공인 진오가 계산대에 섰다. 여 종업원은 카드를 받아 들고는 이제야 그를 알아본 것처럼 말을 걸었다. 진오는 내심 반가웠다.
“여전히 멀쩡하네? 내 말을 못 알아 들은거야, 아님 정말로 단단해진 거야?”
“중심을 채운다는 게 말처럼 쉽나요. 한사코 힘을 줘도 비어 있는 티만 나죠. 요즘엔 되려 나를 중심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어디서 왔을까 많이 생각해요. 그러니까 왜 매번 나는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도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좋은 일이 있어 보이던데.”
“얼마나 뛰어야 끝나는지 모르는 달리기 시합이라면 출발선에 서서 남들이 결승선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 아닐까요?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씩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영수증에 서명을 하라며 펜을 내밀었다. 진오는 서명란에 이름 대신 조그만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그녀가 어김없이 소리쳤다.
“다음에도 우리 가게 와요. 다음엔 더 잘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