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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18. 2022

당연한 존재, 당면한 선택

고등학교 14 | 노력하며 행복을 잊었고, 통증을 느끼며 행복을 잃었다.

    

    억울했다. 나는 공부만 했을 뿐이었다. 다 이겨내려고 노력한 결과가 내 무릎을 걸고 나를 무너뜨렸다.


    앞으로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행복함을 느끼는 방법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노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람들은 낮은 성적에 낙담하던 내게 '노력하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라고 말했고, 나는 그 사람들 말을 듣고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노력을 하며 행복을 잊었고, 통증을 느끼며 행복을 잃었다.




    나는 억울함에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오열했다. 절망의 수준이 아니었다. 몸 밖으로 나온 눈물이 과거 행복했던 기억을 번졌다. 어떤 미래도 더 이상 꿈꾸지 못할 게 뻔했다. 꿈꾸던 미래가 번져 머릿속을 거멓게 물들었다. 그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댔다.


    누군가가 내 뒤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억지로 감정을 누르고 뒤를 바라봤다.


    담임 선생님이셨다. 아직 퇴근 안 하신지는 몰랐는데, 이제는 뒤에 앉아 내 약봉지를 살펴보고 있다.


    먹을 수 있는 게 진통제뿐이었고, 높아지는 고통에 그 진통제는 간헐적 섭취를 위한 높은 강도로 처방되었다. 처방약 종류를 살펴보던 선생님은 기분이 괜찮아지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와라고 하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저녁시간은 끝난 지 오래였다. 세수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싼 채로 교무실로 들어섰다.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뭐라시니?"라는 말로 시작한 대화는 한참 이어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기에 그저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대화를 마친 듯했다. 어물쩍 대화가 끝나갈 무렵, 선생님은 내게 그 상황에서도 밥을 먹으라고 말했고, 나는 그냥 먹겠다고 말하며 상황을 모면했다. 




    상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학습실로 돌아가니 바로 한계에 도달했다. 의자에 앉을 수가 없었다.


    칸막이 책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의 공장식 닭장과 유사했다. 자리에 서 있으면 적어도 8명과 악수도 할 수 있었고 내 의자가 뒷 친구 의자와 맞닿을 정도로 통로가 좁았다.


    어찌 보면 그 상황에서도 내게는 행복을 얻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 공부에 고통 없이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느라 바빴다. 자습시간이 끝나자마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단 한 곳만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기숙사 건물 출입구 근방에 있던 사무용 책상이었다. 에이쓰리 종이를 펼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건 상관이 없었다. 다리를 뻗으면서 책상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다들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뭐야, 관심을 받으려고 저러나?' 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느껴졌지만 공부할 때만큼 무릎 통증이 덜하다는 건 웃기게도 행복했다. 쉬지도 않고 열렸다가 닫히는 출입문 때문에 담요와 패딩을 둘둘 입은 채로 공부를 해야만 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역에 침수 피해가 다수 발생했던 가을 태풍으로 비바람 다 맞다가 몸살에 걸리기도 했고, 늦가을의 추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보통 학습실 밖에 나와 공부한다는 것이 공부 외 딴짓을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자 나를 당연한 존재로 여겼다. 교감 선생님과 사감 선생님께서는 내게 가끔씩 궁금한 것을 물어보거나 무언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사실 그 상황에서 공부를 하는 건 고등학생인 나에게 당연했다. 수능 이전의 시간은 공부하기에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고, 나는 항상 누군가를 신경도 안 쓴 채 졸지도 않고 책에 열중하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추워서 졸린 틈이 없었다는 거다. 아마 학습실에 있는 친구들보다 공부에 더 집중하게 된 비결이 아니었을까. 내가 눈 감고 있으면 그건 자는 게 아니라 기절한 것으로 봐야 할 만큼 그 자리는 매우 추웠다.)

    



    그러나 몸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가끔 다리를 뻗고 있어도 통증이 느껴지거나, 온갖 우울한 생각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날들이 점차 늘어났다. 도움은 크게 되지는 않았지만 파스를 뿌리거나 허공을 잠시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것으로 최대한 빨리 공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10월 두 번째 주.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었다. 노력을 해서 얻는 결과를 이미 직면했고, 이걸 해봤자 나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침잠해 있었다. 모의고사 문제집을 보면 숨이 가빠오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시집과 평론집이었다. 기존에 수학을 좋아하던 나는 문과생 답지 않게 국어 성적이 가장 낮았다. 국어 문제를 푸는 것에 불안함을 매번 느끼곤 했다. 그래서 시집과 평론집은 그래도 문학 작품을 익숙하게 인식하면서도, 수능에 대한 압박감은 줄일 수 있는, 나름 최선의 선택이었다.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주말 낮 자습시간. 겨울이 다가오자 남중 고도가 점차 낮아진 해는 어느새 내 등 뒤로 따뜻한 햇살을 보냈다. 그러면 출입문을 열고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선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평론가의 기록과 비교해보며 사고의 흐름이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다.


    운 좋게도 국어 선생님이셨던 담임 선생님은 수능을 한 달 남짓 남겨둔 중요한 시기에 책만 읽고 있는 나를 보고도 한 번도 혼을 내시지 않았다. "10월은 단언컨대 詩월"라고 하시면서, 내게 더 재미있는 평론집과 시집을 추천해주시곤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나에게 평론집과 시집은 새로운 행복의 기반이 되었다.


    일주일 뒤, 운 좋게 한 대학에서 수시 1차 합격 결과가 전해졌다. 수능 전이었지만 걱정 없이 면접 준비에 열중했다. 그리고선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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