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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18. 2022

어색함과 불쾌함

고등학교 13 | 무릎을 걸고 넘어지다

    어김없이 아침 해가 떴다. 새벽 6시 15분. 같은 방을 쓰는 3명의 친구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난 나는 교복 바지를 입을 때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뭐지, 쥐가 나는 것도 아닌 이 기분은.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4년간 나는 세단뛰기와 멀리뛰기, 4X100 계주 육상선수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왼쪽 발목의 두 인대가 모두 끊어지면서 오랫동안 재활을 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무릎이 아픈 적이 없었다.


    이상했다. 의자에 앉거나 계단을 오를 때 매일 구부리던 무릎이 어색했다. 뭔가 안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고, 무릎 관절 주변이 저릿했다.


    '뭐, 잠시 그렇겠지. 어제 체육시간에 너무 무리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채 이틀이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나는 도저히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불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어색함과 불쾌함은 점차 고통으로 변했다.


    문제는 양 무릎이 모두 그런 증상이 있었다는 거다. 붕대나 보호대를 해도 그 어색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첫 증상을 발견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선생님은 내 어색한 걸음걸이에 정형외과 진료를 볼 것을 '부탁했다'. 몸이 자주 아프던 나는 상비약에 의존해서 생활했기에 병원에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무릎에 관련된 약도 없었을뿐더러, 처음 겪는 증상에 나도 머지않아 내 고집을 꺾어야 했다.




    - 반월성 연골판 손상이네요. 수술하면 운동도 할 수 있긴 한데, 보통 재활도 오래 걸려서 다들 그냥 운동을 포기하는 편입니다. 계단 사용 자제하시고, 달리기나 자전거 타기 같은 움직임도 자제하는 게 통증이 덜할 겁니다. 지금은 직선으로 걷는 것 정도만 하세요.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아버지는 재차 "운동을 아예 하지 말라는 거죠?"라며 물었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약이 아닌 수술로도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진단을 어렸을 때부터 내가 운동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시고 응원하셨던 아버지는 차마 믿지 못했다.


    귀 옆에서 책 무더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분명 운동을 포기한 줄 알았다.


    운동으로 세상을 배웠다. 지금도 가장 행복했던 1년을 꼽으라면 친구들과 육상에 몰두하던 중학교 3학년의 해를 선택할 정도였다. 그런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내가 지금껏 느꼈던 세상을 스스로 변화시켜야 했다. 심지어 행복의 기준도 바꾸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함께 알아가던 중학교 당시의 친구들. 중학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학교에 진학한 터라 그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자주 만났다고 내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겨울. 그 친구들을 만났을 때 모두가 내게 변했다고 말했다. "우리랑 노는 게 진짜 재미있는 거 맞아?"라고 말하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최대한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대로인 친구들 앞에서 변해버린 내가 서글프게 충격적이라 도저히 솔직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색했다.


    내게 운동은 행복이었다. 내가 포기한 건 운동이었지만 한번도 행복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 지나치는 풍경에서 지난 2년 반의 장면들이 스쳐갔다. 그 순간들 중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단 한 순간도 나는 웃고 있지 않았다. 


    학교 밖으로 나온 김에 저녁으로 맛있는 거 사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도 거절하자, 아버지는 별 말 없이 나를 학교에 내려주셨다. 나는 살포시 창 너머의 아버지께 웃음을 전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아려오는 마음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저녁 식사시간이었다. 원래라면 텅 비어있을 교실에 친구들이 조금 모여 있었다. 원래라면 같이 대화라도 했을텐데. 그 친구들을 불러 혹시 조금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그 친구들은 흔쾌히 자리를 떴다.




    7시를 겨우 넘긴 안된 창밖은 이미 어두웠다. 그래, 벌써 9월이구나. 창가에 앉은 나는 학교 앞 도로를 질주하는 차의 헤드라이트에 시선을 주욱 옮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고,



    떴다. 눈의 초점이 변하자 그 어두워진 창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내가 싫었다.


    툭하면 아플 정도로 약한 체력도 싫었고, 학원비 걱정에 국어 학원을 가고 싶다는 말조차도 못 꺼내는 소심함도 싫었다. 가장 싫었던 건 혼자 있을 때 마주하던 내 얼굴이었다. 무던한 얼굴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짓던 표정의 억지를 지우면, 그 표정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고3 때는 최대한 거울을 안 보려고 악을 썼다.


    이 정도면 기습공격이었다. 텅 비어버린 눈빛과 힘 없이 쳐진 입꼬리가 차례로 눈에 비쳤다. 그리고 그 상황에도 쥐고 있던 요점정리 노트까지.


    다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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