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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18. 2022

미래의 불안은 현재의 충실함으로

고등학교 12 | 성실하게 성적을 깎아 먹었습니다.

        덥디 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사흘에 한 번 진행되던 위경련에 무언가를 먹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이제야 비로소 대입의 부담을 실감한 것이다. 그러니 밥과 국만 먹거나 단백질 셰이크, 증상이 심한 날에는 사과즙 세 봉지가 식사의 전부였다.


    수능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공부량이 사실 그렇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 시점이었다. 밥 먹는 시간, 이 닦는 시간, 옷 갈아입는 시간마저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해야 할 일이 뒤로 차곡차곡 쌓이고, 그걸 보며 나는 더 불안할 게 당연했다. 미래의 불안은 현재의 충실함으로 이겨낸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꿈꿔왔던 스포츠 전문가로서의 길을 포기했다. 스포츠 분야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보다 사회과학계열, 그중에서도 사회학에 더 많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스포츠 분야와 사회학 분야는 서로 요구하는 능력이 달랐고, 자의로 어긋나게 한 탓에 진로 방향이 변했다. 불안했다.


    자기소개서를 여름방학 직전에 미리 끝내 두었다는 게 생각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학교 전체에 반입 가능한 전자기기는 전자사전이 유일했다. 즉, 주로 자기소개서와 대학 지원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특성상 전교생 500명에 육박하는 학교에 구비된 대략 80대의 컴퓨터는 턱없이 부족했다. 모두가 치열했고, 가끔은 무섭기도 했다.


    자기소개서를 미리 완성시켜둔 나는 컴퓨터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선생님의 첨삭을 받기 위해 끝없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소재 파악을 위한 3월 상담 한 번, 글의 흐름의 적절성에 대해 묻기 위한 6월 상담 한 번. 그 외에는 홀로 내면에서 치열한 고민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9월이 찾아왔다. 고3의 9월은 고요하다. 다들 처음으로 혼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시간을 갖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6곳을 지원하는 수시 지원에서 하나의 대학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졸업한 선배들의 기록을 살펴봐도 내 성적에 붙을 수 있는 곳에 지원할지, 아니면 더 높은 대학에 지원할지 도저히 결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능에 대한 부담감으로 모의고사 성적에 점차 기복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수시 지원 대학 대부분이 내 성적보다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혹시 모를 수시 탈락에 대비하기 위해 수능을 안정적으로 치러야만 했다. 자신감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7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성적이 향상되면 남은 수시 지원 카드 한 장을 상향 대학에 써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김없이 그 모의고사에서 나는 터무니없는 성적을 받았고, 심지어 생전 처음 받아보는 등급이었다.


    모의고사 다음 날 아침. 나는 교무실 앞을 서성거렸다. '고작 모의고사인데' 싶으면서도 상향인 대학에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1학년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 하는 대학이었기에,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성장을 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출근하시자마자 교무실 앞에서 서성대던 나와 마주했다. 내 얼굴만 봐도 뭔 말을 할지 예상하신 듯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능 공부량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모순적으로 줄어드는 성적에 자꾸 소심한 기운이 올라왔다. 


    - 왜, 무슨 일인데?


    다 알고 계신듯한 눈빛으로 '그래 나는 이미 니 표정으로 다 알고 있지만 니 입으로 직접 말해봐'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오히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 국어 못 봐서 거기 지원 못할 것 같습니다.


    내 옆을 지나가던 선생님이 '무슨 저런 말을 저렇게 당차게 말하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 상관없어. 거기 쓰자.


    여기서 '거기'는 어디를 의미하는지를 몰랐지만, '상관없어'라는 말은 분명. 그 전형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내신 성적도 중요하지만 수능 등급 또한 중요했다. 4개 과목 등급의 합이 6 이내여야 하는 '극강의 전형'을 가진 그 학교에 내가. 


    선생님은 '그 정도면 수능 때 잘하겠다'라며, 고3 때나 지금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했다. 성적이 낮아졌다니까요,라고 세 번이나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쌤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은 무책임한 거 같아요."라며 웃으며 받아쳤고 '그래 사실 책임은 내가 지지, 선생님이 대신 안 지지.'라는 생각을 하며 웃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무사히 대학 결정과 지원까지 끝냈다. 이제 내게는 기다림과 공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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